조선 성리학, 지식 권력의 탄생 김용헌 저 프로네시스 2010 275/307쪽 ~03.19
singingman
2024. 3. 1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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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권력층들은 기본적으로 다 학자 출신들이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했기 이들은 모두 유학자들이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주자학자들 혹은 성리학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의 유학은 주자의 이론을 따르지 않으며 이단시했다. 양명학등이 중국에서는 많이 연구되었지만 조선에서는 경시되었다.
정도전은 맹자로부터 혁명의 이론을 수립해서 조선을 건국했다고 할 수 있다. 태조가 삼봉을 이용했는지 삼봉이 태조를 이용했는지는 장량과 유방의 경우와 같다.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조선 유학의 출발점으로 봐도 무난한 인물이다.
조광조는 젊은 나이에 뛰어난 학자이며 관료로 개혁을 위해 전력투구했지만 급격한 개혁이 훈구파들의 저항을 받아 4년만에 불발로 그쳤고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다. 언관으로 갓 부임한 신출내기였을 때부터 대간들 전원을 파직하라는상소를 올려 그것을 관철시킨 대단히 소신있는 언관이었다.
조식과 이황은 동시대의 뛰어난 학자들이었지만 이황은 문묘에 종사되고 조식은 그러지 못했다. 실천에 있어서는 오히려 조식이 뛰어난 것 같은데 결국 이론에 있어서 더 뛰어난 이황이 인정을 받았거나 혹은 현실 정계에 몸담았던 이황이 더 유리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조선 중기 철학 논쟁은 이와 기에 관한 견해 차이로 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퇴계는 이를 중시했고 율곡은 기의 활동을 중시한 것 같은 느낌이다.
공맹의 뒤를 이은 뛰어난 학자들은 문묘에 종사되는 영예를 얻었다. 우리 나라의 문묘에 종사된 18인은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이다. 오현으로 일컬어지는 김굉필에서 이황까지의 사람들이 문묘에 종사될 때도 국왕이나 정치적인 반대파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이와 성혼이 종사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현을 종사할 때는 훈구파와 사림의 대결이 심했고 이이와 성혼을 종사할 때는서인과 남인의 대결이 심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공관(동맹휴학)은 왕도 사과할만큼 위력이 있었다. 효종 때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다툴 때 성균관 유생들도 남, 서인으로 나뉘어져서 싸웠고 이들이 자기들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공관으로 투쟁했다. 오늘날 대학들이 동맹휴학하는 것처럼 이들도 종종 공관으로 자기들의 주장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