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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완당평전 2권 유홍준 학고재 2002년 784/816쪽 ~2.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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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평전 2권 유홍준 학고재 2002년 784/816쪽 ~2.4

singingman 2025. 2. 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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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배 시절 8년 3개월에 그의 학문과 예술은 무르익는다.
짐작건대 20대의 약관에 중국 최고의 학자들에게서 이미 인정을 받았으니 그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겠나?
하지만 위리안치의 유배생활을 거치면서 그의 성품은 많이 누그러졌으리라 추측된다.
유배 기간동안 제자들과 아들들이 와서 보살펴주기도 했지만 눈병등으로 고생을 한다.
소치 허련과 우선 이상적 같은 제자들은 헌신적으로 스승을 돕고 돌보았다.
특히 이상적은 중국을 드나들면서 귀한 책을 구해서 제주도까지 가져오기도 했다.
결국 그는 스승에게서 세한도를 얻어서 중국에까지 알리고 여러 글들을 받아오기도 한다.

제주 유배가 끝나고 강상(용산)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또 다시 정쟁에 휘말려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해제된 뒤에는 과천에서 4년을 더 살고 1856년 10월 10일 71세로 세상을 떠난다.

평생 영의정을 지낸 이재 권돈인과 가깝게 사귀었고 석파 이하응에게 난초 그리는 법을 가르쳐서 석파는 난초의 대가가 된다.
말년에는 봉은사에 자주 갔고 마지막 그의 글이 봉은사 현판에 있는 판전이다.

완강이 북청 유배에서 해배된 후 초의 선사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남쪽 끝과 서울은 기러기도 반대로 날고 물고기도 왕래하지 못하네.
지난 여름 인편에 차 편지를 받았고 아울러 초의의 편지도 받았네.
또한 천만 뜻밖에도 편지와 함께 화등과 다포가 차례로 도착했네.
이것을 일러 만리도 지척과 같고 하늘 끝도 이웃과 같다고나 할까!
상하 천백년 세월과 종횡 일 만 리 땅 위의 무릇 마음과 힘이 통하는 곳이라면 이루지 못할 곳이 없거늘 다만 사람이 마음을 쓰지 않고 힘을 쓰지 않을 뿐이라네.
요즘 경사가 겹쳐서 기껍기 그지없다 하니 멀리서 축하를 물 흐르듯 보내네.
천한 이 몸은 초췌한 모습으로 읊조릴 뿐, 갈수록 어리석고 갈수록 염치가 없다네.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임자8월 19일 노완

완당은 잡기로 장기와 바둑을 좀 두었던 것 같다.
안춘근 선생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박보 장기책은 완당의 필사본이라고 했다.


완당의 작품 중에 특이한 것이 있다.
위의 사진이다.

완당의 72구초당 시절 현판 중에 서첩 글씨와 나무현판으로 전하는 재미있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일독 이호색 삼음주 라는 현판이다. 내용이야 씌어 있는 대로 첫째는 독서(공부) 둘째는 여자(섹스) 셋째는 술이라는 뜻이다.
완당 글씨의 전서기와 글자 구성에서 멋이 느껴지고 단아한 가운데 흥취가 엿보인다. 그 내용을 살피자면 호색과 술을 얘기하는 중 공부를 말한 것이 신기한 것인지, 공부를 말하는 중 호색과 술을 말한 것이 이상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완당이 고지식한 선비만이 아니었고 어떤 면에서는 솔직한 인간적 쾌락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완당의 금강안(뛰어난 감식안)은 역매 오경석, 위창 오세창, 동주 이용희로 이어져 내려왔다.

완당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관용의 미덕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매사에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따져야 했고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열정과 관용한 선택이 아니라 불같은 열정에 너그러운 관용이 곁들여질 때 비로소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관용의 미덕을 곁들이지 못했다면 완당의 뜨거운 열정과 개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한낱 기(奇)와 괴(怪)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요, 끝 모르고 치솟던 기개도 어느 정도 높이에서는 허리째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완당은 그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 배웠고 이제 과천 시절 그의 예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개성과 보편성, 열정과 관용은 곁들여야 되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사 대 명필로 안평대군 이용,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를 꼽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 4대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조선 후기 김정희를 꼽는다. 여기서 또 그 중 둘을 고르라면 김생과 김정희만 남는다.
그러면 한 명만 꼽으라면 어떻게 될까? 유홍준은 완당 김정희를 꼽는다.

완당한 호를 200 여 가지를 사용했다. 70세가 되자 호를 과칠십이라 했고 이것은 70세의 과천 사람이란 뜻이다.
그리고 71세가 되자 이번에는 칠십일과라고 했다.
그렇게 평범한 말로 자신의 호를 만들어 쓰면서도 발음의 운을 위하여 과칠십, 칠십일과하며 똑같은 과자를 앞뒤로 붙였다.
과천에 산다는 뜻이다.

아내는 초의 선사가 완당 사후 2년에 철상하기 직전에 바친 제문이다.

무오년 2월 청명일에 방외의 친구 초의는 한 잔의 술을 올리고서 김공 완당 선생 영전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좋은 환경에 태어나서 어찌 굳이 좋은 때를 가리려 했나이까? 신령스런 서기로서 어두운 세상에 따랐으면 그게 곧 밝은 세상이었을 텐데 이를 어기고 보니 기린과 봉황도 땔나무나 하고 풀이나 베는 나무꾼의 고초를 겪은 것입니다.
슬프다! 선생은 천도와 인도를 닦아 여러 학문을 체득하시고 글씨 또한 조화를 이루어 왕희지, 왕헌지의 필법을 능가하고 시문에 뛰어나 세월의 영화를 휩쓸고, 금석에서는 작은 것과 큰 것을 모두 규명하여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치셨나이다.
달이 밝으면 구름이 끼고 꽃이 고우면 비가 내립니다.
슬프다! 선생이시여 42년의 깊은 우정을 잊지 말고 저 세상에서는 오랫동안 인연을 맺읍시다.
생전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도에 대한 담론을 할제면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제면 그대는 실로 봄바람이나 따스한 햇볕 같았지요.
손수 달인 뇌협과 설유의 차를 함께 나누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그대는 눈물을 뿌려 옷깃을 적시곤 했지요.
생전에 말하던 그대 모습 지금도 거울처럼 또렷하여 그대 알허은 나의 슬픔 이루다 헤아릴 수 없나이다.
슬프다! 노란 국화꽃이 찬 눈에 쓰러졌는데 어쩌다 나는 이다지 늦게 선생의 영전에 당도했는가.
선생의 빠른 별세를 원망하나니
땅에 떨어진 꽃은 바람에 날리고 나무는 달 그림자 끝에 외롭습니다.
선생이사여! 이제는 영원히 회포를 끊고 몸을 바꿔 시비의 문을 벗어나서 환희지에서 자유로이 거니시겠지요. 연꽃을 손에 쥐고 안양을 왕래하시며 거침없이 흰 구름 타고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가벼운 몸으로 부디 편안히 가시옵소서 흠향하소서.

초의 선집에 있는 글이다.

완당평전 3권은 자료와 해져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