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지금까지 내가 읽은 정조의 이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비판적으로 그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책 뒷 표지에 실린 글을 보면 " 수신 제가에 성공했으나 치국평천하에 좌절하다. 정조는 조선의 국운을 어떻게 좌우했는가 국가의 개혁과 인간적 고뇌 사이에서 갈등한 비운의 군주 거듭되는 역모 속에 일궈낸 탕평. 초계 문신. 장용영. 화성건설도 서학과 북학의 유입이 가져온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에는 무력이었을 뿐! 새 시대의 비전보다 과거로의 회귀를 지향한 리더의 최후를 되돌아본다."
세종에 이어 요순의 정치를 꿈꾼 정조는 시대와의 불화를 넘어서거나 비껴가지 못했다. 열한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죽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함으로써 이미 개인적 불행과 불운은 평생 그를 괴롭히는 업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정조 르네상스라는 정체불명의 역사평가에 의해 개혁의 화신인양 과도하게 높이 평가되고 있는 정조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정조는 결코 개인적인 피해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포용의 정치보다는 불신의 정치로 나아갔다. 집권 이후 10년 이상 계속된 역모와 반란, 백성들의 한 무리는 천주학에, 또 한 무리는 예언사상에 기대려 했다. 나라, 임금, 조정에 대해 더 이상 희망을 갖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식이 뛰어났다고 해서 성군이라 명명한다면 그것은 역사 인식의 기본을 잃은 태도다. 정조가 정말 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듯 뛰어난 국왕이었다면 그 다음 임금부터 곧바로 나라의 운명의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영조는 세자를 가르치는 기관을 시강원이라 하고 세손을 가르치는 기관을 강서원이라 부르게 했다.
정조는 정순왕대비의 명에 따라 판윤 윤창윤의 딸인 화빈 윤씨를 후궁으로 받아들인다. 화빈 윤씨는 딸을 한 명 낳았지만 어려서 죽었고 이후 자식이 없었다. 실록에는 화빈 윤씨와 관련된 이렇다 할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조의 별다른 총애를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신 정조는 한 궁녀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훗날의 의빈 성씨로 불리게 되는 여인이다. 미천한 집안 출신인 성씨는 화빈 윤씨의 궁녀로 있다가 정조의 성은을 입고 정조 6년 9월 7일 아들을 출산해 소용에 봉해졌다. 후궁의 품계는 정1품 빈, 종1품 귀인, 정2품 소의, 종2품 숙의, 정3품 소용, 종 3품 숙용, 정4품 소원, 종4품 숙원이었음을 감안할 때 소용은 중간쯤 됐다. 그러나 소용이 됐다는 것은 한낱 궁녀의 신분에서 정식 후궁의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다.
17세 정조와 가래를 올린 수빈 박씨는 3년 후인 정조 14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아들을 출산했다. 훗날의 순조다. 가순궁이란 칭호를 얻은 박씨는 1822년 숨을 거둘 때까지 예절 바르고 착한 행실로 궁중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녀가 죽자 동대문 밖 배봉산 기슭에 묘를 썼고 이름은 휘경원이라고 했다. 오늘날 동대문구 휘경동의 어원이다.
정조는 세종에 버금갈만큼 수신과 제가에 완벽했던 몇 안 되는 임금이다. 학문적으로 보자면 그의 학문적 깊이와 폭은 이황과 이이를 합쳐도 못 따라올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여색이나 사냥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시간이 나면 고금의 고전을 가까이했다. 그의 학문은 수도자의 삶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제가에서도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의문이 남는다. 수신 제가에 성공한 임금은 자연스레 치국과 평천하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저자의 경우 선조의 생애를 추적하면서 수신 제가와 치국 평천하는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조도 수신 제가에는 성공했지만 치국에는 실패한 국왕이다. 그것은 인간 정조의 성품이나 지적 능력과 무관치 않다.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역모와 반란이 거듭되던 정조 9년(1785년) 5월 22일 사헌부 지평 최현중은 상소를 올려 수신 제가에 나무랄 게 없는 정조가 치국과 평천하에는 왜 실패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4검서는 이덕무, 박제가, 유덕공, 서이수 4명이다.
정조는 안경을 사용했다. 정조 23년 5월 5일 정조는 좌의정 이병모와 서학 문제에 대해 논의하던 중 이런 이야기를 한다. "몇 년 전부터 점점 눈이 어두워지더니 올봄 이후로는 더욱 심하여 글자의 모양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다. 정사의 의망에 대해 낙점을 하는 것도 눈을 매우 피로하게 하는 일인데 안경을 끼고 조정에 나가면 보는 사람들이 놀랄 것이니 6월에 있을 몸소 하는 정사도 시행하기가 어렵겠다."
이가환 (1742년 영조 18년 ~ 1801년 순조 1년)은 천주교인 이승훈의 외숙이며 학문적 교우로는 정약용, 이벽, 권철신등 초기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1777년 (정조 1년) 문과에 급제해 1780년 비인 현감이 되었다. 1784년에 생질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오고, 동료 학자들이 서학에 관심을 가졌을 때 그는 천주교에 대한 학문상의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이벽과 논쟁을 벌이다가 도리어 설득되어 천주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1791년 신유박해 때 정조의 뜻을 받아들여 교리 연구를 중단하고 광주 부윤으로서 천주교를 탄압하였고 거뒤 대사성. 개성 유수. 형조 판서를 지냈다. 1795년 주문모신부 입국 사건에 연루되어 충주 목차로 좌천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천주교를 탄압하다가 다른 문제로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천주교를 연구하여 1801년 이승훈 권철신등과 함께 순교하였다.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하여 그 자신이 "내가 죽으면 이 나라의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라고 할 만큼 수학의 대가였다.
화성건설의 책임자는 채제공과 현장 책임자 조심태, 그리고 기술자 정약용이 있었다.
정순 대왕 대비를 반 개혁의 상징, 정조의 업적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악녀, 세도 정치를 연 장본인 등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대왕대비 수렴청정 때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기 때문에 서학의 물결을 가로막은 장본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정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세력이나 사람일수록 정순대왕대비에 대한 비판은 증오의 수준으로 치닫기도 한다. 심지어 아무런 증거도 없이 대왕대비를 정조 독살의 기획 연출자로 싸잡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조 승하 이후 흔들리는 왕실과 조정의 중심을 바로잡아 그나마 더 큰 혼란으로 몰아가지 않은 공은 전적으로 정순대왕 대비에게 있다. 그 이전까지 조선의 왕실 역사에서 수렴청정을 했던 대비로는 예종 초와 성종 초 수렴 청정을 했던 세조비 정희왕대비 윤씨, 명종 때 수렴 청정을했던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윤씨, 선조 초 잠시 수렴 청정을 했던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 등이 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정순대왕대비 통치는 정희왕대비 와 문정왕후 윤씨의 중간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권력을 당당하게 행사했다는 점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 있었던 정희왕 대비 와 달랐고 시대적 한계에서나마 선정을 베풀려 했다는 점에서는 폭정으로 나아간 문정 왕후와 달랐다. 정순대왕대비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어른답게 행동했다. 그에 대해 보수냐 개혁이냐 운운하는 것 자체가 철없는 탁상공론일 수 있다. 정조의 죽음은 왕실 차원에서나 국가 차원에서나 중대한 위기 국민임에는 틀림없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성공적인 위기 탈출이다. 정순대왕대비에 대한 성패 평가는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순대왕대비때 신유박해 때는 100 여 명이 사형당하고 400 여 명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