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평전이다. 추사는 많은 호를 사용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중국에서도 그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당대 청나라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옹방강과 완원에게서 인정을 받았고 그들을 스승처럼 모셨다. 완당이라는 호도 완원이 지어 준 것이다. 30대로 들어서서는 추사보다 완당으로 더 널리 불리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고 지나쳐서 교만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다. 그의 증조부가 경주 김씨 월성위 김한신으로 화순옹주와 결혼한 영조의 사위가 된 왕족의 후손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좋은 스승을 만났다. 박제가에게 배웠고 사검서나 당대의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류도 있었다.
제주 유배 시절에는 우선 이상적, 초의 선사, 소치 허련등이 와서 도와주기도 했고 다른 제자들 가운데 전라지방에 수령으로 왔던 사람도 필요한 물품도 보내고 하면서 도왔다.
추사는 8살 무렵 백부인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월성위 집안의 큰집에 뒤를 이어갈 아들이 없자 막내동생인 김노경의 큰아들을 입양시킨 것이었다. 이로써 추사는 월성이 집안의 종손이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귀하게도 추사가 8살 때 생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백부에게 양자로 들어간 추사가 예산에 있는 생부에게로 가는 인편이 있어 급히 쓴 안부 편지이다. "굽어 살피지 못하는 한여름에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사모하는 마음이 절절합니다. 소자는 어른을 모시고 책 읽기에 한결같이 편안하오니 걱정 마십시오. 백부께서는 이제 곧 행차하시려고 하는데 장마가 아직도 그치질 않았고 더위도 이와 같으니 염려되고 또 염려됩니다. 아우 명희와 어린 여동생은 잘 있는지요? 제대로 갖추질 못합니다.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사룁니다. 개축년 1793년 6월 초 열흘 아들 정의가 아룁니다."
조선에서 해마다 동짓날에 맞춰 동지사가 중국에 가는 것은 책력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책력을 만드는 것은 천자의 고유 권한이라는 생각이 그렇게 퍼져 있었다. 그리하여 홍대용은 더 이상 천문과 역법에 관한 논의를 이어갈 수 없었지만 그는 서양과학자들과 그렇게 만났던 것이다. 이 천주당에서 홍대용은 파이프 오르간을 보고 매우 신기해했다. 홍대용은 오르간 소리를 들어본 다음 그 구조를 자세히 물어 설명 듣고는 자신이 한번 연주해 보겠다고 하였다. 홍대용은 음악에 본래 조예가 깊었고 거문고의 명수였다. 그는 연경에 가면서도 거문고를 어깨에 메고 갈 정도로 음악광이었다. 신부의 허락을 얻은 홍대용의의 파이 츠 오르간으로 조선의 풍류 한 곡조를 비슷하게 연주하였다. 그리고 연주를 마치고는 서양 신부에게 이것이 동쪽 나라의 음악이랍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왕성한 지식욕과 호기심, 그리고 투철한 과학 정신을 갖고 있던 홍대용은 이 연경 방문에서 운명적으로 중국의 학자들과 만나게 되었고 이 만남은 조선 북학의 길을 활짝 열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추사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자기화. 토착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요즘의 천류 해외파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추사는 고증학의 정신과 방법을 한편으로는 자기 몸을 익히고 한편으로는 자기 현실에 적용시켜 그렇게 이룩한 성과를 연경학회로 전했다. 이런 식으로 추사는 국내 학계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추사가 열어놓은 길로 수많은 힉예인들이 뒤를 따랐다. 자하 신위, 이재 권돈인, 동리 김경연, 황산 김유근, 운석 조인영, 운경 조용진, 육교 이조묵, 산천 김명희 등은 추사 못지않게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고 추사가 미처 만나지 못한 학자들을 만나며 그 교류의 폭과 깊이를 더해 갔다. 연경에 갈 기회가 많은 역관 중 우선 이상적, 추재 조수삼, 대산 오창렬, 소당 김석준, 역매 오경석 등은 추사의 애제자가 되어 추사가 연경학계와 계속 교류할 수 있도록 연결 고리가 되어 주었다. 대원군 석파 이하응도 그의 제자다 또 추사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조선 서화계에 우봉 조희룡, 소치 허련, 고람 전기 같은 중인 출신 서화가들에게 고차원의 문인적 이상이 담긴 글씨와 그림을 지도하며 예단을 이끌었다. 이리하여 조선 지식인 사회 한쪽에서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한 학풍과 예술사조가 생겨났다. 이들 후대 사람들은 완당 바람이라 불렀으며 이렇게 일어나 완당바람은 날로 그 세를 다여 가히 일세를 풍미하게 된다.
추사는 북한산 중흥사에도 놀러 다녔다.
새한도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가 있을 때 그의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인데 이 그림을 일본인 후지츠카가 일본으로 가지고가 있는 것을 우리나라의 소전 손재형이 조르고 졸라서 우리나라로 가져왔다. 그 이후 손재형이 국회의원에 출마할 때 선거 자금에 쪼달리게 되어서 사채업자 이근태에게 저당 잡히고 돈을 끌어다 썼지만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어서 이 그림은 미술품 수장가 손세기에게 팔아넘겼고 지금은 그 아들이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