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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26.01.22 본문

역사 문화 유적지 관광지

추사고택 26.01.22

singingman 2026. 1. 23.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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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당호 트래킹을 갔다오는 길에 들르다.
추사에 관한 관심 덕분에 들르게 되었다.
30년 전쯤에 한번 온 적이 있다.

추사는 많은 호를 사용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중국에서도 그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당대 청나라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옹방강과 완원에게서 인정을 받았고 그들을 스승처럼 모셨다.
완당이라는 호도 완원이 지어 준 것이다.
30대로 들어서서는 추사보다 완당으로 더 널리 불리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고 지나쳐서 교만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다.
그의 증조부가 경주 김씨 월성위 김한신으로 화순옹주와 결혼한 영조의 사위가 된 왕족의 후손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좋은 스승을 만났다.
박제가에게 배웠고 사검서나 당대의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류도 있었다.

제주 유배 시절에는 우선 이상적, 초의 선사, 소치 허련등이 와서 도와주기도 했고 다른 제자들 가운데 전라지방에 수령으로 왔던 사람도 필요한 물품도 보내고 하면서 도왔다.
추사는 8살 무렵 백부인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월성위 집안의 큰집에 뒤를 이어갈 아들이 없자 막내동생인 김노경의 큰아들을 입양시킨 것이었다.
이로써 추사는 월성위 집안의 종손이 되었다.

추사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자기화, 토착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요즘의 천류 해외파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추사는 고증학의 정신과 방법을 한편으로는 자기 몸으로 익히고 한편으로는 자기 현실에 적용시켜 그렇게 이룩한 성과를 연경학회로 전했다.
이런 식으로 추사는 국내 학계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추사가 열어놓은 길로 수많은 힉예인들이 뒤를 따랐다.

자하 신위, 이재 권돈인, 동리 김경연, 황산 김유근, 운석 조인영, 운경 조용진,  육교 이조묵, 산천 김명희 등은 추사 못지않게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고 추사가 미처 만나지 못한 학자들을 만나며 그 교류의 폭과 깊이를 더해 갔다.  

연경에 갈 기회가 많은 역관 중 우선 이상적, 추재 조수삼,  대산 오창렬,  소당 김석준, 역매 오경석 등은 추사의 애제자가 되어 추사가 연경학계와 계속 교류할 수 있도록 연결 고리가 되어 주었다.

대원군 석파 이하응도 그의 제자다
또 추사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조선 서화계에 우봉 조희룡, 소치 허련, 고람 전기 같은 중인 출신 서화가들에게 고차원의 문인적 이상이 담긴 글씨와 그림을 지도하며 예단을 이끌었다. 이리하여 조선 지식인 사회 한쪽에서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한 학풍과 예술사조가 생겨났다.

이들 후대 사람들은 완당 바람이라 불렀으며 이렇게 일어나 완당바람은 날로 그 세를 더하여 가히 일세를 풍미하게 된다.
추사는 북한산 중흥사에도 놀러 다녔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가 있을 때 그의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인데 이 그림을 일본인 후지츠카가 일본으로 가지고가 있는 것을 우리나라의 소전 손재형이 조르고 졸라서 우리나라로 가져왔다.

그 이후 손재형이 국회의원에 출마할 때 선거 자금에 쪼달리게 되어서 사채업자 이근태에게 저당 잡히고 돈을 끌어다 썼지만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어서 이 그림은 미술품 수장가 손세기에게 팔아넘겼고 지금은 그 아들이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귀하게도 추사가 8살 때 생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백부에게 양자로 들어간 추사가 예산에 있는 생부에게로 가는 인편이 있어 급히 쓴 안부 편지이다.

"굽어 살피지 못하는 한여름에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사모하는 마음이 절절합니다.
소자는 어른을 모시고 책 읽기에 한결같이 편안하오니 걱정 마십시오.

백부께서는 이제 곧 행차하시려고 하는데 장마가 아직도 그치질 않았고 더위도 이와 같으니 염려되고 또 염려됩니다.

아우 명희와 어린 여동생은 잘 있는지요? 제대로 갖추질 못합니다.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사룁니다.
개축년 1793년 6월 초 열흘 아들 정희가 아룁니다."

제주 유배 시절 8년 3개월에 그의 학문과 예술은 무르익는다.
짐작건대 20대의 약관에 중국 최고의 학자들에게서 이미 인정을 받았으니 그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겠나?
하지만 위리안치의 유배생활을 거치면서 그의 성품은 많이 누그러졌으리라 추측된다.

유배 기간동안 제자들과 아들들이 와서 보살펴주기도 했지만 눈병등으로 고생을 한다.
소치 허련과 우선 이상적 같은 제자들은 헌신적으로 스승을 돕고 돌보았다.
특히 이상적은 중국을 드나들면서 귀한 책을 구해서 제주도까지 가져오기도 했다.
결국 그는 스승에게서 세한도를 얻어서 중국에까지 알리고 여러 글들을 받아오기도 한다.

제주 유배가 끝나고 강상(용산)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또 다시 정쟁에 휘말려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해제된 뒤에는 과천에서 4년을 더 살고 1856년 10월 10일 71세로 세상을 떠난다.
평생 영의정을 지낸 이재 권돈인과 가깝게 사귀었고 석파 이하응에게 난초 그리는 법을 가르쳐서 석파는 난초의 대가가 된다.

말년에는 봉은사에 자주 갔고 마지막 그의 글이 봉은사 현판에 있는 판전이다.

완강이 북청 유배에서 해배된 후 초의 선사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남쪽 끝과 서울은 기러기도 반대로 날고 물고기도 왕래하지 못하네.
지난 여름 인편에 차 편지를 받았고 아울러 초의의 편지도 받았네.
또한 천만 뜻밖에도 편지와 함께 화등과 다포가 차례로 도착했네.
이것을 일러 만리도 지척과 같고 하늘 끝도 이웃과 같다고나 할까!

상하 천백년 세월과 종횡 일 만 리 땅 위의 무릇 마음과 힘이 통하는 곳이라면 이루지 못할 곳이 없거늘 다만 사람이 마음을 쓰지 않고 힘을 쓰지 않을 뿐이라네.
요즘 경사가 겹쳐서 기껍기 그지없다 하니 멀리서 축하를 물 흐르듯 보내네.
천한 이 몸은 초췌한 모습으로 읊조릴 뿐, 갈수록 어리석고 갈수록 염치가 없다네.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임자8월 19일 노완

완당은 잡기로 장기와 바둑을 좀 두었던 것 같다.
안춘근 선생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박보 장기책은 완당의 필사본이라고 했다.

완당의 72구초당 시절 현판 중에 서첩 글씨와 나무현판으로 전하는 재미있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일독 이호색 삼음주 라는 현판이다. 내용이야 씌어 있는 대로 첫째는 독서(공부) 둘째는 여자(섹스) 셋째는 술이라는 뜻이다.

완당 글씨의 전서기와 글자 구성에서 멋이 느껴지고 단아한 가운데 흥취가 엿보인다. 그 내용을 살피자면 호색과 술을 얘기하는 중 공부를 말한 것이 신기한 것인지, 공부를 말하는 중 호색과 술을 말한 것이 이상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완당이 고지식한 선비만이 아니었고 어떤 면에서는 솔직한 인간적 쾌락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완당의 금강안(뛰어난 감식안)은 역매 오경석, 위창 오세창, 동주 이용희로 이어져 내려왔다.

완당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관용의 미덕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매사에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따져야 했고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열정과 관용한 선택이 아니라 불같은 열정에 너그러운 관용이 곁들여질 때 비로소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관용의 미덕을 곁들이지 못했다면 완당의 뜨거운 열정과 개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한낱 기(奇)와 괴(怪)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요, 끝 모르고 치솟던 기개도 어느 정도 높이에서는 허리째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완당은 그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 배웠고 이제 과천 시절 그의 예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개성과 보편성, 열정과 관용은 곁들여야 되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사 대 명필로 안평대군 이용,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를 꼽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 4대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조선 후기 김정희를 꼽는다. 여기서 또 그 중 둘을 고르라면 김생과 김정희만 남는다.
그러면 한 명만 꼽으라면 어떻게 될까? 유홍준은 완당 김정희를 꼽는다.

완당한 호를 200 여 가지를 사용했다. 70세가 되자 호를 과칠십이라 했고 이것은 70세의 과천 사람이란 뜻이다.
그리고 71세가 되자 이번에는 칠십일과라고 했다.
그렇게 평범한 말로 자신의 호를 만들어 쓰면서도 발음의 운을 위하여 과칠십, 칠십일과하며 똑같은 과자를 앞뒤로 붙였다.
과천에 산다는 뜻이다.

아래는 초의 선사가 완당 사후 2년에 철상하기 직전에 바친 제문이다.

무오년 2월 청명일에 방외의 친구 초의는 한 잔의 술을 올리고서 김공 완당 선생 영전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좋은 환경에 태어나서 어찌 굳이 좋은 때를 가리려 했나이까? 신령스런 서기로서 어두운 세상에 따랐으면 그게 곧 밝은 세상이었을 텐데 이를 어기고 보니 기린과 봉황도 땔나무나 하고 풀이나 베는 나무꾼의 고초를 겪은 것입니다.

슬프다! 선생은 천도와 인도를 닦아 여러 학문을 체득하시고 글씨 또한 조화를 이루어 왕희지, 왕헌지의 필법을 능가하고 시문에 뛰어나 세월의 영화를 휩쓸고, 금석에서는 작은 것과 큰 것을 모두 규명하여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치셨나이다.
달이 밝으면 구름이 끼고 꽃이 고우면 비가 내립니다.

슬프다! 선생이시여 42년의 깊은 우정을 잊지 말고 저 세상에서는 오랫동안 인연을 맺읍시다.
생전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도에 대한 담론을 할제면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제면 그대는 실로 봄바람이나 따스한 햇볕 같았지요.
손수 달인 뇌협과 설유의 차를 함께 나누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그대는 눈물을 뿌려 옷깃을 적시곤 했지요.

생전에 말하던 그대 모습 지금도 거울처럼 또렷하여 그대 알허은 나의 슬픔 이루다 헤아릴 수 없나이다.
슬프다! 노란 국화꽃이 찬 눈에 쓰러졌는데 어쩌다 나는 이다지 늦게 선생의 영전에 당도했는가.
선생의 빠른 별세를 원망하나니
땅에 떨어진 꽃은 바람에 날리고 나무는 달 그림자 끝에 외롭습니다.

선생이사여! 이제는 영원히 회포를 끊고 몸을 바꿔 시비의 문을 벗어나서 환희지에서 자유로이 거니시겠지요. 연꽃을 손에 쥐고 안양을 왕래하시며 거침없이 흰 구름 타고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가벼운 몸으로 부디 편안히 가시옵소서 흠향하소서.
초의 선집에 있는 글이다.


추사기념관


집 앞에 있는 세한도


추사고택


김정희 선생 고택 (House of Kim Jeong-hui)

지정: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면서 하사받은 저택으로, 원래 53칸 규모였으나 1976년 일부가 복원되었습니다. 김정희는 성묘와 독서를 위해 이곳을 자주 왕래하며 머물렀습니다.


김정희 선생 유적 (Historic Site of Kim Jeong-hui)

지정: 충청남도 기념물
생애와 업적: 조선의 대표적 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는 청나라 고증학을 접하고 '실사구시' 학문을 완성했습니다. 제주도 유배 시절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했으며, 그의 글씨는 당시 국왕인 헌종은 물론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대문


사랑채 (Sarangchae)
용도: 남주인이 손님을 접대하고 문학 활동을 즐기던 공간입니다.

특징: 남향의 'ㄱ'자 집으로 대청 문을 위로 들어 열 수 있는(들어열개 문) 개방적 구조입니다. 수만 권의 장서가 있었으나 1910년경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석년



해시계 (Sundial) 특징: 김정희가 직접 제작한 석조 해시계로, 건물과 달리 남북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기록: 앞면에 새겨진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아들 김상우가 추사체로 쓴 것입니다.

방 안












안채 (Anchae)
특징: 'ㅁ'자 모양으로 안방, 건너방, 부엌 등을 갖추고 있으며 6칸 대청은 흔치 않은 큰 규모입니다.

구조적 배경: 여성들의 공간으로 밖에서 보이지 않는 구조이며, 특히 안채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용 부엌이 따로 있습니다. 이는 왕실 사람인 화순옹주가 살았던 왕실 주택 구조의 특징입니다.



6칸 대청마루는 보통 민가에서는 보기 어렵다.
대청마루 좌우에 온돌방이 있다.




온돌방


담장 밖에서 본 모습


추사영실








영당이 있는 고택 뒷편


안채를 옆에서 본 모습






고택 바깥 모습


아궁이


다락


아궁이


대팽두부과강채
최고 요리는 두부, 오이  생강, 나물


반일정좌 반일독서
한나절은 정좌하고 한나절은 책을 읽네.



오무종죽 오무예소
다섯이랑은 대를 심고 다섯이랑은 채소 갈고


묘용시수류화개
진리가 작용할 때 물 흐르고 꽃이 피네


정좌처다반향초
고요히 앉은 곳에  차가 반쯤 우러나 향이 오르고




고회부처아녀손
최고의 모임은 부부, 아들, 딸, 손자


산월조탄금
산 달 비춰주니 거문고 타네


송풍취해대
솔바람 불어오니 허리띠 풀고



춘풍대아능용물
춘풍처럼 큰 아량 만물을 포용하고


추수문장불염진
추수처럼 맑은 문장 티끌 하나 없구나



만수기화천포약
만 그루 기이한 꽃 천 이랑 작약 밭


일장수죽반상서
집엔 온통 긴 대나무 책상에는 책이 반



직성유궐하
바른 말은 대궐에 남아 있고


수구만천동
빼어난 글귀는 조선에 가득하네


추수재심사오척
가을물 깊어봐야 겨우 네댓 자


녹음상간양삼가
녹음 사이 섞여있는 초가 두세 집


벽옥반중농수정
푸른 옥쟁반엔 수정이 구르고


황금합이성홍설
황금합 속엔 홍설(귀한 화장품)이 가득하네


범물개유가취
모든 물건마다 취할 게 있는데


어인하소불용
사람은 어찌하여 포용하지 못하는가


하정상이주석고
하나라의 정 상나라의 이기 주나라의 석고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문자·금석 자료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


진비한예진은구
진나라의 비문 한나라의 예서 진나라의 은구(아름답고 굳센 글씨)


유애도서겸고기
아끼는 건 오직 그림, 책, 고기



차장문자입보리
문자(불교경전)를 통해 보리(깨달음의 경지)에 드네


차호명월성삼우
밝은 달 불러 삼우(청풍, 명월, 작자) 만들고


호공매화주일산
즐겁게 매화와 같은 산에 사네



천하일등인충효
천하의 제일은 충성, 효도하는 사람



세간양건사경독
세상의 일 두 가지는 농사와 독서



화법유장강만리
화법은 만리를 흐르는 장강의 유장함이 있고


서예여고송일지
글씨는 가지 하나 뿐인 외로운 소나무 같네



호고유시수단갈
옛 것이 좋아 때때로 깨진 비석을 찾아 다녔고


연경루일파음시
경전 연구하느라 며칠동안 시를 읊지 못했네


원문가사칩심허
멀리서도 훌륭한 선비 이야기 들으면 문득 마음으로 인정하고


노견이서유안명
늙어서도 특이한 책을 보면 오히려 눈이 밝아지네


구곡수통다조외
차 끓이는 부엌 밖으로 구곡산(중국의 명산) 물 통하고



경정산견석란서
돌난간 서쪽으로 경정산(중국의 명산)이 보이네



매화나무


모란




영당 옆 모습


바깥에서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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