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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皇世孫) 이구씨 장례식 모습 본문
사진으로 보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皇世孫) 이구씨 장례식 모습
1. 빈청모습
2. 빈소 조문 모습
暴炎(폭염) 속에 찾아온 문상객들
지난 7월16일 大韓帝國(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영친왕)의 둘째 아들인 李玖(이구·74)씨가 일본 東京(동경)의 한 호텔에서 生을 마쳤다. 이로써 500년을 내려오던 조선 왕실은 嫡統(적통)이 끊어졌다.
기자는 7월22일부터 장례식이 열린 7월24일까지 李玖씨의 殯廳(빈청: 빈소)에서 조문 온 시민들을 상대로 취재를 했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적통을 弔喪(조상)하러 온 시민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역사 인식은 어떠한지 기록에 남겨 놓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李玖씨의 장례식이 열리는 기간에 전국은 暴炎(폭염)으로 끓어올랐다.
밖에서 5분만 서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다. 장례식을 진행하는 사람들이나, 빈소를 찾은 문상객들이나 모두 땀에 흠뻑 젖었다.
낙선재 밖과 안 마당은 前ㆍ現職(현직) 대통령과 각계 인사들이 보낸 화환으로 뒤덮였다. 빈소에는 정치인과 각계 인사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정치인들을 제외하면 문상객들 대부분은 전주 李氏 종친들이었다. 이들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서너 명 혹은 10여 명씩 짝을 지어 빈소를 찾았다.
일반 시민들은 빈소가 있는 낙선재 안채에 직접 올라가지 않고, 낙선재 안마당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弔意(조의)를 표했다. 종친들을 제외한 순수 일반 시민들의 문상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養子(양자) 문제로 몸싸움
7월22일 금요일, 낙선재가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이날 오전 10시에 전주 李氏 대동종약원(이환의 이사장)이 李玖씨의 養子(양자)를 발표한 것이다. 대동종약원은 義親王(의친왕)의 9남인 李忠吉(이충길·미국 거주)씨의 아들 李源(이원·주민등록상은 李相協·44·현대홈쇼핑 부장)씨를 李玖씨의 양자로 결정했다. 의친왕은 高宗(고종)과 貴人(귀인) 張氏(장씨) 사이의 소생으로, 영친왕(英親王)의 배다른 형이다.
李桓儀(이환의) 이사장은 『故人(고인)의 유언에 따라 李源(이원)씨를 양자로 입적해 代를 잇도록 했다. 아무리 멸망한 왕실이라고 해도 그 代를 끊기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李源씨는 즉시 상복으로 갈아 입고 상주가 되어 빈소를 지켰다.
의친왕의 11남인 李錫(이석)씨는 대동 종약원 측의 양자 발표에 반발했다. 李錫씨는 『장례도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황손들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養子를 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후 2시경 養子 문제로 李錫씨와 대동종약원 측이 낙선재 안마당에서 몸싸움을 벌였다. 『친일파』, 『깡패』란 험한 말들이 오갔다. 몸싸움에서 낙선재 밖으로 밀려난 李錫씨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는 『몇 명이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사람을 세워 놓고 종약원을 계속 주무르려는 수작』이라고 말했다.
종약원의 이환의 이사장은 『養子 문제는 종약원 상임이사회에서 결정한 것이고, 충분한 회의를 거쳤다. 불평불만을 가지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다. 李錫씨의 주장은 들을 가치도 없다』고 맞받았다.
한바탕 소란이 인 후 낙선재는 다시 조용해졌다. 오후 4시가 넘어서자 북적거리던
기자들도 기사 마감 시간을 맞추기 위해 모두 철수했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문상객들의 발걸음이 뜸했다.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
1996년 11월25일 영구 귀국한 조선왕조 마지막 왕세손 李玖씨가 서울 종묘에서 자신의 귀국을 조선왕조 신위들에게 알리는 고유제를 올리고 있다. |
이때 20代 후반의 여자 두 명이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빈소로 다가간 이들은 李玖씨의 영정에 절을 했다. 조문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이들에게 다가갔다.
그중 한 여자(30)에게 『어디서 왔냐』고 말을 걸었다. 그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물어보아도 그냥 웃기만 했다. 같이 온 여자(25)가 대신 대답을 했다.
『오늘 종로에 이 언니를 만나러 나왔는데, 언니가 李玖씨가 돌아가셔서 「너무 슬프다」며 빈소에 가보자고 해서 왔어요』
알고 보니 처음 질문을 받았던 여자는 언어장애가 있어서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다.
얼마 후 40代 후반의 여자 두 명이 빈소를 찾았다. 이 둘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이 가운데 金씨(48)는 서울에 살고 있고, 崔씨(48)는 조문을 하러 경북 안동에서 일부러 올라왔다고 한다. 金씨가 말했다.
『궁궐에 자주 오는데 올 때마다 「일본은 패전국인데도 왕실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왜 없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승만(李承晩) 정부 때 왕실 후손들은 재산을 다 빼앗기고 평생 홀대받고 살았잖아요. 그 생각만 하면 화가 나요』
―조선 왕실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이 크지 않습니까.
『조선을 빼고 오늘날 우리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나요? 좋든 싫든 오늘날 우리에게 이만큼 풍요로운 문화유산을 남겨 주었잖아요.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인데 우리가안아 줘야죠』
조금 있으니 아주머니 한 명이 빈소에 들어섰다. 韓씨(51)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요. 한적한 사적지를 자주 찾습니다. 그곳에서 혼자 명상에 잠기다 보면, 전율을 느낄 정도로 우리 역사를 사랑하게 됩니다. 李玖씨는 너무 소극적으로 사신 것 같아요. 살아 생전에 대접을 받았어야 하는데…』
아들과 함께 조문 온 은행원
李玖씨의 양자가 된 李源씨가 상복을 입고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 마련된 빈청을 지키고 있다. |
7월23일 토요일 오전 11시 李玖씨의 빈소 취재를 위해 창덕궁으로 향했다. 창덕궁 돈화문 옆 담벼락에는 「대한제국 皇世孫(황세손) 李玖 저하 서거」라는 흰 천이 걸려 있었다. 돈화문 앞에는 창덕궁 관람을 위한 관광객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빈소에는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전날보다 더 많은 조문객이 몰려 들었다.
서울 목동에서 온 임현자(62)씨는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 정부가 이런 분을 진작 챙겨 줬어야죠. 평생 혼자 떠돌며 사신 것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일본이나 영국은 자기 왕실을 하늘처럼 떠받들잖아요. 안타까운 마음을 이루 표현할 수 없어요』
천주교 신자라는 임씨는 낙선재 마당에 줄줄이 놓인 정치인들의 화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부 생색 내는 일에만 앞장서죠. 저 사람들이 평소 이분의 삶에 털끝만큼의 관심이라도 있었나요』
점심 때가 되자, 소복을 입은 10여 명의 여자들이 낙선재 안채에 올라가 절을 했다. 장례식 진행을 돕던 전주 李氏 여성회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李玖씨의 시신이 국내에 들어온 이후 문상객 안내와 장례 준비에 바빠 미처 빈소에 절을 할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하는 도중 틈틈이 조문을 했다.
얼마 후, 40代 초반 여자 다섯 명이 낙선재로 들어왔다. 이들은 어느 여행사 직원들이었다. 「어떻게 왔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들은 『당연히 와야죠. 왕손인데』라는 말만 남기고 낙선재를 빠져나갔다.
낙선재 마당 땡볕에서 아들과 아내에게 구한말의 역사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은행원인 鄭樂臣(정낙신·39)씨였다. 鄭씨는 『쉬는 날이어서 가족과 함께 조문을 왔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 찬희(13·정릉초등)군은 낙선재 마당에 줄줄이 놓인 화환의 어려운 한자(漢字)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鄭씨는 『아들에게 어려서부터 漢字를 가르쳤다. 아들이 4자 소학(小學)을 뗐다』고 말했다.
―일부러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까.
『현대는 스피드 시대입니다. 무척 빠르게 변하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존중되어야 할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아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그래야 아이가 정체성을 바르게 확립할 수 있거든요』
―왕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영국을 보면 왕실이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왕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老부부가 빈소에서 힘겹게 절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 부부는 충북 청주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 21대 손이오. 후손된 도리로 왕실의 마지막 어른이 가는데 조문을 해야지요. 내일 아들 둘을 데리고 다시 올 것이오』
―아직도 왕실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李玖씨의 죽음으로 이젠 막을 내렸죠. 서운한 마음은 있지만, 시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입니다』
『전통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인천에서 딸과 함께 온 咸基文(함기문·53)씨 부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咸씨는 『딸이 같이 가자고 해서 왔다』며 『우리는 기독교 신자인데 내일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교회에 가야 하니까 오늘 조문을 왔다』고 말했다.
『외래문화 일색에서 역사의 언저리 하나쯤은 남겨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어요. 무관심 속에 전통이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너무 무심합니다. 왕실을 보존하는 데 예산이 얼마나 들겠어요. 수억의 예산으로 엄청난 정신문화 유산을 지켜 나갈 수 있잖아요』
咸씨의 딸 旼伶(민영ㆍ21)씨는 성공회大 일어일문과 1학년에 재학 중이다. 旼伶씨의 말이다.
『저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빈소에서는 기도를 했어요. 평소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아요. 왕실의 마지막 세손이고,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에 왔어요. 우리 또래 아이들은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너무 무관심해요』
빈소를 찾은 중학생들
스스로 찾아와 낙선재 마당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조문하고 있는 경기도 시흥中 1학년 김선우(14)ㆍ홍수민(14) 학생. |
중학생 두 명이 낙선재 마당을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서울 대치中 2학년인 남승원·최은석군이었다. 어떻게 조문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학생들에게 전주 李氏 여성회원들이 절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남승원군에게 물었다.
―어떻게 오게 되었나.
『아버지가 방송국에 다니시는데 조선 왕조 마지막 세손이니 빈소에 가서 절을 하고 오라고 해서 친구하고 왔어요. 체험학습도 할 겸해서요』
―돌아가신 李玖씨에 대해 알고 있었나.
『신문에서 「타향살이 했다」고 해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좀더 많이 알게 되었어요』
빈소를 지키던 의친왕의 9남 李忠吉(이충길)씨와 새로 李玖씨의 양자가 된 李源씨도 더위에 지쳤는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들은 조문객이 오면 일어서서 맞은 후 다시 앉았다.
오후 2시, 낙선재 맞은편 툇마루에 한 여학생이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 오랫동안 빈소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이 여학생은 기자가 도착한 오전 11시부터 이곳에 앉아 있었으니까, 벌써 세 시간째 한 곳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조문을 위해 창원에서 올라온 고려大 1학년에 재학 중인 신수영이라고 했다.
―왜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 있나요.
『새벽에 경남 창원에서 올라오는데, 마땅한 정장도 없고 해서 그냥 교복을 입고 왔어요』
―몇 시간째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요.
『세월이 좋아서 그렇지, 옛날 같으면 우리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겠어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앉아 있는 중이었어요』
―와서 보니까 무슨 생각이 들어요.
『생각보다는 장례식이 소박하고, 단촐해요. 곡하는 사람도 없고, 슬퍼하는 사람도 없어요…. 마음이 쉽게 떠나지지 않아 이렇게 앉아 있어요』
여대생 신수영씨와 이야기하는 사이, 어린 여학생 두 명이 빈소에서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경기도 시흥 중학교 1학년에 다니는 김선우(14)·홍수민(14) 학생이었다.
李玖씨 사망 뉴스를 듣고 스스로 찾아온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구한말 역사뿐 아니라 왕실 가계(家系)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돌아가신 분이 누군지 아나요.
『잘 알고 있어요. 숙제로 덕혜옹주에 대해서 리포트를 쓴 적이 있는걸요. 어려서부터 궁궐에 자주 오는데 올 때마다 우리나라에 왕실이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李玖씨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왕실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나요.
『의친왕 자손들이 많이 있잖아요. 아직은 왕실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분들도 고종(高宗)의 자손들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왕실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쉬워요』
인상 깊었던 두 여중생의 역사관
―왕실이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 하나요.
『잘못 알려진 게 많아요. 高宗도 나라 살리려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당시 전체적인 상황이 나라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봐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잖아요. 나라를 지킨 약소국이 몇 개나 되나요. 우리나라는 왕실한테만 너무 책임을 돌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이 두 여중생은 기자가 빈소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조문객이었다.
이 여학생들은 『줄리아 여사는 빈소에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줄리아 여사를 꼭 만나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줄리아 여사는 영친왕의 며느리이자, 李玖씨의 前부인이다. 자손을 생산하지 못한 그녀는 李玖씨와 이혼했다.
여학생들이 보고 싶어 한 줄리아 여사는 李玖씨 빈소를 찾지 않았다. 다음날 李玖씨의 장례행렬이 종묘를 지날 때 길 건너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줄리아 여사의 모습이 목격되었다.
서울 독산동에서 왔다는 李모(51)씨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히 와 봐야 하는데 「일반인도 올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미루다가 이제야 왔다』고 말했다. 전주 李氏인 그녀는 『아버지가 함흥 출신인데 이성계 할아버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말했다.
이날 취재를 마치려고 하는데 30代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네 명이 낙선재로 들어왔다. 일본어 통역 가이드라고 했다. 이들은 『외국인들을 데리고, 문화유적을 찾다 보면 자연스럽게 역사를 사랑하게 된다』며 『우리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하느냐』고 말했다.
『역사가 슬프고, 李玖씨 개인의 삶이 슬프죠. 세계 어느 왕조도 흥망성쇠를 겪잖아요. 조선왕실의 역사는 영친왕에서 끝났다고 봅니다. 모든 것은 역사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잖아요. 아쉽지만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는 것이죠』
―일본어 통역 가이드면, 이런 자리에 일본 사람들도 좀 데리고 오지 그랬습니까.
『역사의 아픈 한 장면이고, 우리에게는 상처입니다. 조선을 삼키려고 일본이 벌인 짓을 생각하면 日人들을 이곳에 데리고 오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초라한 장례행렬
7월24일 일요일, 李玖씨의 영결식이 있는 날이다. 기자는 오전 7시30분 빈소를 찾았다. 의친왕의 11남인 李錫씨가 고인에게 마지막 上食(상식)을 올리고 있었다. 상식은 고인에게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음식을 말한다.
『자, 마지막 상식입니다. 곡을 하세요』
장례식 제례 진행자인 듯한 사람이 말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메마른 곡소리가 흘렀다. 종묘제례 보존회 측에서 나온 카메라맨은 장례절차를 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전 10시, 낙선재 옆에 있는 희정당 마당에 마련된 영결식장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이 몰려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일본인 단체관광객이 무리를 지어 영결식장 옆을 지나갔다. 「대한제국 皇世孫 李玖 저하 영결식」이란 한자를 알아본 몇몇 일본인들이 손짓을 하며 영결식장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웃거리며 지나갔다.
일본인 관광객을 보고 착잡한 심경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金永錫(김영석·40·배우)씨는 『일본인들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웃으면서 지나가지만,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희정당 앞은 너무 좁아 의자에 앉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영결식 진행 모습을 자세하게 볼 수 없었다. 시민들은 저마다 카메라와 휴대폰을 치켜 들고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영결식이 끝나자 李玖씨의 시신을 실은 캐딜락 장례차량은 옆문으로 창덕궁을 빠져나간 후, 다시 정문인 돈화문에서 장례행렬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오전 11시20분, 600여 명의 장례행렬이 돈화문을 출발했다. 상여를 뒤따르는 高宗황제의 후손 중 남자로는 李玖씨의 새로운 양자가 된 李源씨, 李源씨의 아버지 이충길씨와 의친왕의 아들 李錫씨가 고작이었다. 초라한 후손들의 행렬이 몰락한 왕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했다.
길가에는 많은 시민들이 무더운 날씨 속에서 장례행렬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장례행렬을 만난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리둥절해하기도 했다.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한 상여는 路祭(노제)를 지내기 위해 종묘 앞에서 잠시 멈췄다. 시민과 기자들이 뒤엉켜 소란스러웠다.
路祭를 지내고 있는데 술에 취한 한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뭐야? 李氏 왕조가 뭐야, 일본에서 살다 온 놈이 路祭는 무슨 놈의 路祭야!』
그러자 주변에 있던 수십 명의 노인들이 소란을 피운 노인에게 욕을 퍼부었다.
『제사 지내는 데 뭔 소란이야? 개망나니 같은 놈, 조용해! 알지도 못하면서』
낮 12시, 장례행렬은 동대문에서 멈추었고, 장례행렬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은 이내 흩어졌다.
짓밟힌 일본王의 화환
전주 李氏 종친들을 실은 버스 5대와 기자들의 차량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장지 「영원」으로 향했다. 영원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평생 타국을 떠돌던 조선 왕실의 마지막 嫡統(적통)은 자기 부모 곁에서 영면을 하게 된 것이다.
오후 2시, 李玖씨의 시신이 장지로 옮겨진 후, 오후 2시30분 안장됐다. 하관이 끝나고 산을 내려오던 전주 李氏 종친 중 한 명이 일본 國王 내외가 보낸 화환을 발견했다.
그는 화환의 리본을 떼어 내더니 땅에 팽개친 후 밟기 시작했다.
『나쁜 놈들, 남의 나라 왕실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어디 감히 화환을 보내』
그러자 다른 종친 한 명이 리본을 주워 다시 화환에 걸었다.
『그래도, 조의를 표하느라 보낸 것이니 다시 걸어 놓는 것이 예의에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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