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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조선을 말하다. 조재모 아트북스 2012년 256쪽 6/12~6/6/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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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조선을 말하다. 조재모 아트북스 2012년 256쪽 6/12~6/6/15

singingman 2023. 1. 12.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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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궁궐들을 설명하면서 여러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조선의 상황들을 설명했다.
궁궐 여행하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궁궐의 영역을 외조, 치조, 연조(燕朝)의 3조로 구분했다.
조선의 궁궐은 중국 궁궐을 모델로 했지만 정치 행위의 공간인 외전과 왕실 가족의 일상생활을 위한 내전으로 양분하는 개념이 강했다.
왕실 의례 중 왕사동례는 관혼상제의 사례이고
왕사부동례는 종묘사직등의 길례, 임금과 신하의 조회, 천자국 중국에 대한 사대례, 교육, 관례, 혼인등 왕실의 각종 행사를 다루는 가례, 사신의 접대를 다루는 빈례, 군대 통솔을 다루는 군례,  국상의 절차를 다루는 흉례의 5례이다.
 
임금은 죽을 때도 경복궁의 편전인 사정전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죽어야 한다.
하지만 이 규정은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관례는 오늘날의 성인식으로 남자는 관례를 치르고 나면 상투를 틀고 관을 썼기 때문이고 여자는 쪽을 지고
비녀를 꽂으므로 계례라 했다.
전통시대에는 여자의 머리 모양만 보면 성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국혼 기간에 왕비 책봉하는 동안은 민간의 혼인을 금했다.
 
왕가의 혼례는 신랑쪽에서 예물을 보내고 그 청을 받아들이는  납채, 폐백을 보내는 납징, 혼례를 위해 길일을
택해 알리는 행위인 고기, 신부를 왕비나 왕세자비로 책봉하는 책비, 신부의 집에서 신부를 맞이해 오는 진영,
신랑 신부가 함께 술잔을 마시는 동뢰의 순으로 왕실 혼례가 진행되었다.
 
정조의 후궁 중에  성송연이라는 의빈 성씨와의 로맨스가 유명하다고.
 
창덕궁 선원전은 돌아가신 왕실의 선조에게 제사를 모시는 시설이다.
종묘가 신위를 모시는 것과는 달리 어진을 모시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신위 제사가 유교적이고 어진 제사가 불교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부모상이 3년인 이유는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가 나를 온전히 보살펴 준 3년을 되갚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궁궐 공간은 대규모 조회를 위한 정전, 임금이 일상적으로 집무하는 편전, 임금과 왕실 가족의 침소인 침전,
상이 나서 상여가 나가기 전까지 시신을 모시는 임시 건물인 빈전, 상을 치른후 종묘에 갈 때까지의 3년상을
치르는 혼전으로 나눌 수 있다.
 
편전의 이름들은
경복궁의 근정전과 사정전, 창덕궁의 인정전과 선정전, 창경궁의 명정전과 문정전, 경희궁의 숭정전과 자정전, 덕수궁의 중화전과 덕흥전이다.
편전은 좌식 건물이고 정전은 입식 건물이다.
 
온돌의 유무에 따라 거주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조선의 궁궐은 규모로는 자금성을 따를 수 없고 장식의 게임으로는 동남아의 건물에 못 미친다. 
대신 조선의 궁궐은 정연한 논리 체계와 이론적인 건축 장치들, 명징함과 단정함으로 승부한다.
조선의 궁궐은 엄격한 질서와 유교적 이상을 실천하는 공간이다.
 
연경당은 순조의 세자였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익종이 건축했다.
민간 건축을 따랐다는 점에서

후원 건물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로 이어졌으면서도 독립된 영역을

이루고 있다.
 
경복궁은 정도전이 설계했고 창덕궁은 내시였던 박자청이 설계했다.

태조가 지은 경복궁, 태종대에 지은 창덕궁, 창경궁, 지금은 없어진 인경궁과 경희궁, 덕수궁의 순으로 지어졌다.
 
종묘에 향사될 수 있는 인물은 왕과 그의 정식 왕비뿐이다.
빈의 소생은 아무리 강력한 왕권을 가졌어도  종묘에 빈인 그 어머니를 향사시킬 수 없었다.
 
정조는 애초에 대비들을 위한 보조 궁궐로 만든 창경궁에 굳이 임어했던 것은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에
있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경모궁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창경궁에 담장을 헐고 월근문이라는 별도의 문을 만들기도 했다.
 
왕이 왕궁 밖을 나갈려면 義와 恩이 상충한다.
신하가 힘이 세면 의를 내세워 함부로 못 나갔고 왕이 힘이 셀 때는 은을 내세워 자주 나갔다.
 
전통 건축가들이 꼽은 주변 경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전통건출 베스트 건물로는 영주 부석사, 안동 병산서원,
종묘를 꼽는다.
 
종묘는 고대의 예를 따르면 7칸으로 해야 한다.
제후의 종묘는 시조묘 1위, 4대조 신위, 그리고 불천위(대수가 지나도 계속 모시는 신위)2묘로 구성해야 한다.
그런데 종묘는 동당이실의 19칸으로 되어 있다.
 
종로 뒤편 피맛길은 임금의 행차로 인한 백성들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만들었던 길이다.
정조는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궁궐에 난입하여 임금의 행차를 가로막고 징이나 꽤과리, 북을 쳐서 자신의
사연을 왕에게 직접 알리는 격쟁을 활용했다. 수원 화성 행차시에 하층민인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일도 자주
있었고.
 
칠궁은 영조 때에 지은 숙종의 빈이고 영조의 생모였던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었던 육상궁 터다.
여기에 1908년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이 들어오고 1929년에 덕안궁이 들어와서 7궁이
되었다. 지금의 청와대 바로 옆자리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황손 이석은 그래서 청와대가 귀신들이 다니는 길이라서 터가 안 좋아  청와대에 들어간
사람들의 뒤끝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잠저는 왕이 궁궐에 들어오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한다.
 
태조가 경복궁을 짓고 살다가 정종은 개경으로 돌아갔다가 태종이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서 법궁인 경복궁을
두고 이궁인 창덕궁을 짓고 여기에 거주한다.
그 아들 세종을 위해 경복궁을 보수 중건한다. 그래서 세종은 재위 7년부터 경복궁에 거주했고 임진왜란 때
까지 경복궁이 정궁의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1592년)때 불타고 나서부터는 약 270년간 창덕궁이 법궁의 역할을 한다.
정조는 창덕궁에 머물면서 여러 일들을 했고 주합루에서도 여러 일들을 처리했다.
흥선 대원군 때(1867년) 경복궁을 재건하고 고종은 여기서 생활하다가 나라도 망하고 덕수궁으로 옮긴다. 
 
창덕궁만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남은 이유는 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궁들은
일제 때 다 심하게 훼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