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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 영단 2016-09-17 본문
경순왕릉 갔다가 나오면서 들르다. 경순왕릉은 몇 번 왔는데 이 영단은 그동안 못 보고 지나쳤다가 오늘 처음 봤다.
영단은 영가(靈駕/죽은 사람의 넋·영혼)를 안치한 단(壇)이라고 한다.
마의태자는 위키백과에 의하면
마의태자(麻衣太子, ? ~ ?)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이다.
신라 경순대왕의 왕자로,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는다.
후대에 마의를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 태자라 부른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신라 경순대왕과 왕후 죽방부인 소생의 왕자로, 935년 10월 부왕 경순왕이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나라를 고려에 귀부(歸附)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여, 개골산(지금의 금강산)에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草食)으로 연명하다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1]
왕자의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으며, 단지 왕자라 할 뿐 장자(長子)니 태자(太子)니 하는 말은 없다.
다만 후대에 태자 또는 마의(麻衣)를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른다.
지금 전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도 후대 소설에서 비롯되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935년(경순대왕 9) 10월 부왕 경순대왕이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세력에 눌려,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어 나라를 스스로 보존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여러 신하들과 함께 고려 태조에게 양도할 것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그의 동생 덕지(德摯) 왕자 및 이순유(李純由) 등과 함께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삼국사기》
그러나 경순왕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잡고 말을 하며, 양도를 청하는 글을 지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고려 태조에게 편지를 보었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구나.” 하였다.(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삼국사기》
이에 그는 통곡(痛哭)을 하며 부왕 경순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草食)으로 연명하다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의 동생 덕지 왕자도 처자(妻子)를 버리고 그와 함께 개골산에 들어갔다가, 이후 화엄종에 귀의(歸依)하여 중이 되어 법수사와 해인사에 머물면서 도(道)를 닦으며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2]
《동국여지승람》 사서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또 다른 왕자가 있었는데, 그도 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매 처자를 버리고 태자와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신라가 망할 때 다른 귀족들은 차라리 너나없이 고려에 귀부를 선언하여 왕건이 주는 벼슬과 녹봉을 받고 여전히 호사를 누렸지만, 이들 왕자들은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킨 인물들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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