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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21년 70쇄 551/620쪽 ~02/13 본문

독서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21년 70쇄 551/620쪽 ~02/13

singingman 2023. 2. 1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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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적 관점에서 현재와 미래를 보는 저자의 섬뜩한 경고와 보수적이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책.

저자는 워낙 똑똑해 보인다.
내가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으로 성경을 오류투성이의 책이라고 주장하고 신은 없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의 주장대로 인간의 삶에는 변수라는 것이 있고 우리의 뇌가 놓친 것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데이터가 지배할 것이라는 주장에는 거의 동의한다.
그렇다고 종교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도 동의한다.


차례

서문_다시, 한국의 독자들에게

1 인류의 새로운 의제

제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2 인류세

3 인간의 광휘


제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4 스토리텔러

5 뜻밖의 한 쌍

6 근대의 계약

7 인본주의 혁명

8 실험실의 시한폭탄

9 중대한 분리


제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10 의식의 바다

11 데이터교

아래는 이 책의 중요한 내용들을 복사했다

비록 수억 명이 여전히 궁핍과 영양실조에 시달린다 해도 중국은 자국 역사상 처음으로 기아에서 해방되었다.

오히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아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과식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8세기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굶주린 민중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했다는데,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은 이 충고를 문자 그대로 따른다. 비벌리힐스에 사는 부자들은 양상추 샐러드와 퀴노아를 곁들인 찐 두부를 먹는 반면, 빈민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트윙키 케이크, 치토스, 햄버거, 피자를 배터지게 먹는다. 2014년에 21억 명 이상이 과체중이었던 반면, 영양실조를 겪는 사람은 8억 5,000만 명이었다. 2030년에는 인류의 절반이 과체중일 것으로 예상된다. 2010년에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총 100만 명 정도였던 반면, 비만으로 죽은 사람은 300만 명이었다."

기아 다음으로 인류의 두 번째 강적은 전염병과 감염병이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상인, 공직자, 순례자 들로 항상 붐비는 도시는 인류 문명의 산실인 동시에 병원균의 이상적인 번식처였다. 따라서 고대 아테네나 중세 피렌체에 살던 사람들은 다음주에라도 병에 걸려 죽을 수 있고, 갑자기 전염병이 발생해 온 가족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만 구의 시신이 길거리에 널브러져 부패했으나 아무도 시신을 수습해 파묻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며칠 만에 이집저집에서 일가족이 죽어나갔고, 당국자들은 시신을 그대로 둔 채 집을 무너뜨리라고 지시했다. 몇몇 동네에서는 인구의 절반이 죽었다.

1520년 9월, 그 전염병은 멕시코 계곡에 도달했고, 10월에는 아즈텍 왕국의 수도인 인구 25만 명의 웅장한 대도시 테노치티틀란의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두 달 사이에 인구의 최소 3분의 1이 죽었다. 그 가운데는 아즈텍 황제 쿠이틀라우악도 있었다. 1520 년 3월에 스페인 함대가 도착했을 당시 멕시코에는 2,200만 명이 살고 있었으나 12월에는 1,400만 명만 살아 있었다. 천연두는 첫 번째 타격에 불과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원주민을 착취하느라 정신없는 동안, 독감과 홍역을 비롯한 치명적인 전염병들의 물결이 멕시코를 차례로 강타해 1580년에는 인구가 200만 명 이하로 줄었다."

2세기 뒤인 1778년 1월 18일,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제도는 인구 50만 명의 조밀한 지역이었는데, 유럽이나 아메리카와 철저히 격리된 상태로 살았던 탓에 그동안 유럽이나 아메리카의 질병에 노출된 적이 없었다. 쿡 선장과 부하들은 독감, 결핵, 매독을 일으키는 균을 하와이에 처음으로 전파했다. 이어서 들어온 유럽인들이 여기에 장티푸스와 천연두를 보탰다. 1853년 하와이의 생존자는 겨우 7만 명이었다"

가난과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는 개발도상국 페루, 아이티, 필리핀, 가나에서는 매년 10만 명당 다섯 명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자살한다. 반면 스위스와 프랑스, 일본, 뉴질랜드 같은 부유하고 평화로운나라들에서는 매년 10만 명당 열 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1985년에 한국은 비교적 가난한 나라였고, 전통에 얽매여 있었으며, 독재체제하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은 경제강국이고,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교육받은 사람들이며, 안정된 상태에서비교적 자유로운 민주정권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1985년에 10만명당 아홉 명 정도의 한국인이 자살한 반면, 현재 한국의 연간 자살률은 10만 명당 서른여섯 명이다."


역사 공부의 목표는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돌려, 조상들이 상상할 수 없었거나 우리가 상상하기를 원치 않았던 가능성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를 지금 여기로 이끈 우연한 사건들의 연속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생각과 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깨닫고, 다른 생각과 다른 꿈을 품을 수 있다. 역사 공부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하라고 알려주지 않지만, 적어도 더 많은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다.


개인의 집과 공공건물 입구에 잔디를 심는다는 생각은 중세 말 프랑스와 영국 귀족들의 저택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이 습관은 근대 초기에 깊이 뿌리 내려 귀족을 상징하는 표식이 되었다.


루아르 계곡에 있는 샹보르 성의 잔디밭. 16세기 초 프랑수아 1세가 이 성을 지었다. 이성에서 잔디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잔디는 지나가는 모든 행인에게 당당히 공표했다.'나는 부자이고 힘이 있다. 그리고 이 푸르른 사치를 감당할 수 있을만큼 많은 땅과 농노를 소유하고 있다.' 잔디밭이 넓고 잘 정돈되어있을수록 힘 있는 가문이었다. 어느 공작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의집 잔디밭이 형편없다면 그가 곤경에 처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귀한 잔디밭은 중요한 축하연과 사회적 이벤트들이 열리는 무대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엄격한 제한구역이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궁전, 정부청사, 공공장소에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고단호히 명령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내가 다닌 옥스퍼드 대학교에는 사각형 모양의 안뜰 전체가 크고 매력적인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1년에 딱 하루만 그곳에 들어가 걷거나 앉을 수 있었다.


미래를 이해하고 싶다면, 게놈을 해독하고 통계수치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허구들도 해독해야 한다.



과학혁명은 카이로나 이스탄불이 아니라 런던과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근대사를 과학과 종교 사이의 투쟁으로 그리는 것은 관례처럼 되어 있다. 이론상으로 과학과 종교는 둘 다 다른 무엇보다 진리에 관심을 두지만, 각기 다른 진리를 지지하므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학도 종교도 진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둘은 쉽게 타협하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협력도 할 수 있다.

종교는 다른 무엇보다 질서에 관심이 있다. 종교의 목표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한편 과학은 다른 무엇보다 힘에 관심이 있다. 과학의 목표는 연구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전쟁을 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과학자와 성직자 개인이 다른 무엇보다 진리를 우선시할 수는 있겠지만, 집단적인 제도로서 과학과 종교는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우선시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의외로 잘 어울리는 짝이다. 타협 없는 진리 추구는 영적여행이라서, 종교나 과학의 제도권 내에 머물기 어렵다.

따라서 근대사를 과학과 특정 종교, 즉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 과정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관점일 것이다. 근대 이후의 사회는 인본주의 교의를 믿고, 그 교의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교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과학을 이용한다. 21세기에 인본주의 교의가 순수한 과학이론으로 대체될 것 같지는 않다.


근대성은 일종의 계약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는 날 이 계약에 서명하고, 죽는 날까지 이 계약의 통제를 받는다. 이 계약을 취소하거나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계약은 우리가 먹는 것, 우리의 직업, 우리의 꿈을 주무르고, 우리가 사는 곳, 사랑하는 사람, 죽는 방식을 결정한다.

얼핏 보면 근대라는 계약은 엄청나게 복잡해서, 예컨대 당신이 어떤 소프트웨어를 다운받았는데 난해한 법률용어로 도배된 수십 쪽짜리 계약에 서명하라고 하는 경우와 같다. 당신은 쓱 한번 훑어보고는 곧장 마지막 페이지로 화면을 내려 '동의'란을 클릭하고는 그 계약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사실 근대는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이다. 계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이다. 즉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 대부분의 문화는 인간이 우주적 규모의 장대한 계획 안에서 한 역할을 맡는다고 믿었다. 그 계획은 전능한 신 또는 영구불변의 자연법칙이 짠 것이므로 인류가 그 내용을 바꿀 수는 없다.



인간이 늑대보다 우월한 것처럼, 인간의 문화들 가운데서도 일부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더 수준이 높다. 인간 경험에는 분명한 위계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타지마할이 초가집보다 더 아름답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다섯 살짜리 조카가 최근에 만든 찰흙 공작물보다 뛰어나고, 베토벤이 척 베리나 콩고 피그미족보다 훨씬 더 나은 음악을 작곡했다.



많은 과학자들을 포함해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권위의 원천으로 계속 성경을 이용하지만, 이 문헌들은 더 이상 창조성의 원천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의 진보적 분파들이 동성결혼이나 여성 성직자를 수용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이들은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성경, 성 아우구스티누스, 또는 마르틴 루터를 읽어서가아니다. 그보다는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 또는 다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 같은 텍스트를 읽어서이다." 하지만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무리 진보적일지라도 자신들의 윤리적 태도가 푸코나 해러웨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마르틴 루터로 돌아가 그 문헌들을 철저히 조사한다. 그들은 필요한 내용을 발견할 때까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한 페이지도 빠짐없이 샅샅이 읽는다. 그들이 찾는 것은, 창의적으로 해석할 경우, 신이 동성결혼을 축복하고 여성들이 성직자가 되는 것도 허락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금언, 비유, 결정이다. 이런 생각이 실제로는 푸코에게서 나왔지만, 그들은 마치 그것이 성경에서 유래한 것처럼 말한다. 성경은 더 이상 창조적 자극을 주지 못하는데도 권위의 원천으로서 계속 자리를 지킨다.



10억 명은 하루에 1달러 이하를 벌고, 또 다른 15억 명은 하루 1~2달러를 버는 세상이다. 이들은 평생에 걸쳐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3,000달러라는 유전자 검사 비용을 마련할 수 없다. 그리고 경제적 차이는 현재 계속 증가하고 있다. 2016년 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62명이 가장 가난한 36억 명의 부를 가지고 있었다. 세계인구가 약 72억 명이므로, 이는 62명의 억만장자들이 인류의 하위 절반이 가진 부를 보유한다는 뜻이다."



그동안의 역사에서도 부자들은 많은 사회적·정치적 이점을 누렸지만, 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는 생물학적 차이는 결코 크지 않았다. 중세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맥에 우월한 푸른 피가 흐른다고 주장했고, 인도의 브라만 계급도 자신들이 원래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허구였다. 하지만 미래에 우리는 업그레이드된 상위 계급과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 사이에 육체적 · 인지적 능력 차이가 실제로 벌어지는 현장을 보게 될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손에 넣지 못했던 과학의 성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다. 그 성배란 음악학부터 경제학을 거쳐 생물학까지 모든 과학분과들을 통합하는 하나의 일반이론을 말한다. 데이터교에 따르면,베토벤의 〈5번 교향곡>, 증권거래소의 거품, 독감 바이러스는 데이터 흐름의 세 가지 패턴으로, 동일한 기본 개념과 도구를 이용해 분석할 수 있다. 엄청나게 매력적인 개념이다. 모든 과학자가 공용어로 소통하고, 학문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고, 탁월한 식견이학제를 가로지르며 자유자재로 오간다고 생각해보라. 음악학자, 경제학자, 세포생물학자들은 마침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교는 학문의 전통적 피라미드를 뒤집는다. 지금까지는 데이터가 지적 활동이라는 긴 사슬의 첫 번째 단계에 불과했다. 인간이 데이터에서 정보를 증류하고, 정보에서 지식을 증류하고, 지식에서 지혜를 증류해야 했다. 하지만 데이터교도들은인간이 더 이상 막대한 데이터의 흐름을 감당할 수 없고, 따라서 지식과 지혜를 증류하는 것은 고사하고 데이터에서 정보를 증류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데이터를 처리하는 일은 연산능력이인간의 뇌 용량을 훨씬 능가하는 전자 알고리즘에게 맡겨야 한다.실질적으로 데이터교도들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믿지 않고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더 신뢰한다는 뜻이다.

데이터교는 두 모태 학문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데, 바로 컴퓨터 과학과 생물학이다. 둘 중 생물학이 더 중요하다. 컴퓨터 과학분야에 한정된 변화가 생명의 본성 자체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격변으로 바뀐 것은 생물학이 데이터교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기린, 토마토, 인간이 단지 데이터를 처리하는 각기 다른 방법에 불과하다는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시점의 과학적 정설이며 우리 세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개별 유기체들만이 아니라 벌집, 박테리아 집단, 숲과 도시 같은 사회 전체가 데이터 처리 시스템으로 간주된다. 경제학자들도 점점 데이터 처리 시스템으로 경제학을 해석하는 추세이다. 일반인들은 경제가 밀을 재배하는 농부, 옷을 만드는 노동자, 빵과 속옷을 사는 소비자로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경제란 욕망과 능력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해 그 데이터를 결정으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국가가 통제하는 공산주의는 서로 경쟁하는 이념, 윤리적 신조, 정치제도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둘은 경쟁하는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데이터를 나누어 처리하는 반면, 공산주의는 중앙에서 모두 처리한다. 자본주의가 데이터를 처리하는 방식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해 그들이 자유롭게 정보를 교환하고 독립적으로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유시장에서 빵 가격은 어떻게 정할까? 우선 모든 빵집이 원하는 만큼 빵을 생산하고, 원하는 만큼 가격을 매길 것이다. 소비자들도 여력이 되는 한 얼마든지 많은 빵을 살 수 있고, 경쟁관계인 빵집에 가서 빵을 사도 된다. 바게트 한 개에 천 달러를 매겨도 불법이 아니지만 아무도 그 빵을 사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중앙 프로세서가 모든 데이터를 처리하고 모든 결정을 내리는 극단적인 상황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공산주의 경제는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다시 말해 정부가 당신의 이윤을 백 퍼센트 가져간 뒤, 당신의 필요를 결정하고 그 필요를 공급한다. 이런 계획경제의 극단적 형태를 실현한 국가는 아직 없었지만,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이 가장 근접한 사례이다. 이 나라들은 분산식 데이터 처리 원리를 포기하고 중앙 집중식 데이터 처리 모델로 전환했다. 소련 전역의 모든 정보가 모스크바의 한 장소로 흘러갔고, 그곳에서 모든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생산자와 소비자들은 직접 소통할 수 없었고 정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로크, 흄, 볼테르 시대에 인본주의자들은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데이터교가 인본주의자들에게 그들이 한 대로 똑같이 돌려줄 차례이다.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인간 상상력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18세기에 인본주의는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신을 밀어냈다. 21세기에 데이터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인간을 밀어낼 것이다.

데이터교 혁명은 100~200년까지는 아니라도 몇십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인본주의 혁명도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계속 신을 믿었고, 인간이 신성한 이유는 신이 어떤 신성한 목적을 위해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참 나중에야 몇몇 사람들이 용기를 내, 인간은 그 자체로 신성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대부분의 데이터교도들은 만물인터넷이 신성한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필요를 위해 그것을 창조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만물인터넷은 그 자체로 신성해질 것이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으로의 이동은 그저 철학적인 혁명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실용적인 혁명이 될 것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혁명은 모두 실용적이다. '인간이 신을 지어냈다'는 인본주의 사상이 중요했던 것은 그것이 실생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는 데이터교의 교의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일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이라는 실로 장대한 관점으로 본다면, 상호 관련된 다음의 세 과정 앞에서 다른 모든 문제와 상황들은 작게 보일 것이다.

1. 과학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교의로 수렴하고 있고, 이 교의에 따르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생명은 데이터 처리 과정이다.

2. 지능이 의식에서 분리되고 있다.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들이 곧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과정은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당신이 이 책을 덮은 뒤에도 이 질문들이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