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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장안문 - 팔달문까지 시계 반대 방향) 20-06-13 본문
혼자 가다.
수원 살 때는 가치를 몰라서 못 갔고 기회를 보다가 드디어 오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가다.
코로나 덕분에 입장료 1,000원과 주차장의 주차비를 받지 않는다.
남문 시장에서 점심 먹은 시간까지 합해서 한 바퀴 도는 데 2시간 50분이 걸렸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1794년에 세운 소위 갑자년 계획에 의해 세워진다.
10년 뒤인 1804년 갑자년에 성인이 되는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70세가 되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으로 내려와 상왕이 되어 거처하기 위해 세운도시의 성곽이다.
그러니 이 성곽은 수원화성 신도시의 보호성벽인 셈이다.
정조의 수원 화성 신도시는 당시로서는 첨단 신도시로 계획되었으며 그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도 설치하고 국영 농장도 마련하고 수리 시설과 저수지와 상점들도 세워서 국제 무역도시로의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나무들도 심고
그가 1800년에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정약용 등이 심혈을 기울여서 거중기와 중국식 표준 벽돌 등을 이용함으로 1794년 정월에 10년 계획으로 시작한 신도시는 600칸 가까이 되는 행궁을 포함해서 34개월 만인 1796년 10월 16일 낙성잔치를 벌임으로 완성된다.
나무 위키에 의하면
화성은 조선시대 정조가 지은 수원의 성곽 건축물로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었으며, 치밀한 사전 계획 하에 만들어진 계획 도시다. 수원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이다.
오늘날의 수원화성은 수 차례의 자연 재해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것을 일부 복원한 상태이다.
원래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축물은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이어야 하는데 수원화성은 이러한 규칙에 맞지 않지만, 조선시대에 수원화성을 계획하면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수원성(水原城), 또는 간단히 화성(華城)이라고도 부르며, 화성시의 '화성'도 바로 여기에서 따온 명칭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화성이 화성시에 없고 수원시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이는 수원시와 화성시의 역사적 행정구역 변천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화성시(화성군)는 원래 수원군에 속했는데,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수원시)로 분리 승격되면서, 수원군의 잔여 지역을 이 화성의 이름을 따 화성군으로 개칭한 것이다. 그때도 수원화성은 수원읍에 있었음에도, 분리 승격될 수원부 지역과 잔여 수원군의 동질성을 부각하기 위해 이름만 따서 이렇게 된 것이다.[5] 또한 수원화성 축조 전까지 수원부(수원도호부)의 원래 읍치(邑治, 고을 소재지)는 현재의 화성시 화산동(안녕동) 일대로, 바로 이 곳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을 조성하면서(현륭원, 현재의 융릉) 기존 읍치를 밀어버리고(...)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읍치를 이전한 것이다. 또한 수원부의 진산(鎭山)인 '화산(花山/華山)'은 수원 고을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를 본따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짓게 된 것이다. 1793년 수원부가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수원부사를 '화성유수(留守, 오늘날의 수원시장)'로, 수원도호부(수원부)를 '화성유수부(화성부)'라 불렀다.[6]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요새로서의 군사적인 기능이 매우 잘 적용되어 있다. 먼 거리에서 성벽의 작은 간이 출입구[7]가 보이지 않게 시각적으로 숨겨져 있는 점과 같은 요새로서의 과학적인 장점을 많이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2중 구조와 계단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입구가 가려져있는데,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간혹 볼 수 있다. 성벽이 가지고 있는 효율적인 망보기를 위한 구조로, 위 사진에서도 보이듯이 성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뚫려있는 구멍이 바로 망보기용 구멍이다. 간격과 구멍이 뚫린 각도가 다양해 다양한 거리의 접근을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그 구멍을 통해 성벽에 가까이 붙은 적도 관찰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성벽 위에서는 시야 확보가 되지만, 성벽 아래에서는 그 구멍을 올려다보아도 절대 관찰자를 볼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벽에 뚫려 있으므로, 실제 방문시 유심히 볼 것을 추천하다. 진짜 신기하다. 또한 보기에는 안 그래보이지만, 대포에 대한 대비도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성형 요새로 대표되는 서양식 요새가 성벽을 경사지게 하고 별모양으로 각지게 설계해 포탄을 빗겨나가게 설계했다면, 화성은 성벽 뒤쪽에 성벽과 거의 같은 높이의 흙동산을 쌓아올려 포탄이 성벽을 관통해도 뒤의 동산이 지탱해주어 성벽 자체가 붕괴되는 일이 없도록 했다. 하지만 서양의 근대 보방식 요새 설계에 비견될만큼 포격에 대비한 설계라는건 형식적인 칭찬에 가깝다. 내탁외축 방식은 오래 전부터 내려온 전통 축성 방식으로 한국 성 중에 이렇게 안 지은 성을 찾기가 더 힘들다. 고대부터 이런 방식이 투석기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므로 포격을 대비한건 사실이지만, 화성에 새롭게 들어간 기술은 아니라는 것. 성벽 높이도 삼국시대 주요 요새의 거대한 성벽에 비교해서 낮을 뿐이지, 조선시대 읍성치곤 상당히 높은 편이다. 어쨌든 실제로 이러한 요새적 측면은 건축 당시의 동북아시아의 요새 건축의 표본으로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띠며,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다.
특이점으로,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정문이 아니다. 정문은 북문인 장안문. 일반적으로 동북아에서는 남문이 정문이지만, 수원화성에서는 정조가 한성에서 수원화성으로 올 때 북쪽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임금이 들어오는 문을 정문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장안문은 팔달문보다 크다.
간혹 팔달문을 화성으로 아는 사람이 있는데, 팔달문은 화성의 일부분일 뿐이다. 한양도성의 숭례문/남대문과 마찬가지로 교통을 이유로 좌우의 성벽이 헐린 상태라서 독립적인 건축으로 보일 뿐이다. 사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임에도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좀 안습이다.
2011년 이후 팔달문 좌우 및 남수문 일대를 제외한 성곽 전 노선이 연결되어 팔달문을 기/종점으로 삼아 화성 일주가 가능하다. 화성 일주는 성인 기준으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팔달문과 같은 이유로 성벽 좌우측이 절단된 장안문 및 성벽 일부가 헐린 창룡문의 경우 육교로 연결되어 있는데[8], 팔달문 인근이 이렇게 연결이 어려운 것은 이미 못골시장, 영동시장 등을 비롯한 재래시장 및 상가들이 밀집한 상태라, 이걸 다 헐어내고 성곽을 연결시킨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
2012년 6월 9일, 1922년 대홍수 때 파괴된 남수문의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수원천 복개구간 철거 공사와 맞물려 이루어진 공사인데, 상부의 여장은 화성성역의궤에 근거하여 복원되었으나, 하부의 수문은 9개의 수문은 유지하되 홍수 대비를 위해 세부는 상당히 다르게 복원되었다. 원래의 수문은 오각형 기둥이 이중으로 배열되고, 전/후열의 기둥 사이가 비어있었으나, 복원된 남수문은 일자형 기둥으로 건설되었다. 이는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진행되었지만, 향후 학계에서 논란의 소지는 남아있다. 여하튼 현재는 팔달문 좌우의 성벽을 제외한 전 성벽이 연결된 상태.
걸어서 관람도 가능하고, 성벽을 따라 산책로가 매우 잘 조성되어 있고, 길을 따라 걸으면서 보이는 경치나 소소한 볼거리도 훌륭한 편이다.[9] 특히 화서문 - 장안문 - 화홍문 - 방화수류정 - 활터까지 이르는 성벽길은 조명도 꽤 괜찮게 해놓아서, 해진 저녁에 연인과 분위기를 잡고 싶다면 추천하는 코스다. 화홍문 옆의 호수인 용연 옆 언덕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수원에서 숨겨진 데이트 핫 플레이스. 방화수류정에서 보이는 화성 전체의 경관도 좋고, 용연에 조성된 공원에서 올려다보는 방화수류정도 아름답다. 관광 열차[10]를 사용하여 관람도 가능하다. 화성 관람 시 관람료는 성인 기준 1,000원이며 중간중간 매표소에서 직원이 표를 검사하는 방식이다. 수원시민은 주소가 기재된 신분증을 제시하면 관람료가 면제된다. 또한 '2016년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맞아 창룡문 밖 주차장에 수원화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열기구가 생겼다. 다만 좀 비싸다.[11]
화성 성곽 내부에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가 화성을 세운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하고 실천하였으며, 정교한 석축술을 보여준 것이 이 화성이다.
또한,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죽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12]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지었으며, 정약용에게 궁중 비서인 '기기도설'을 하사하여 거중기를 제작하게 하여 정약용이 거중기를 사용하여 만들었다.[13] 또한,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북쪽(평양, 개성), 서쪽(강화), 동쪽(광주)와 더불어 남쪽에 군사권을 마련하여 왕권 강화에 힘쓰고자 하였다.[14]
일설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말년에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혜경궁 홍씨와 같이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했다고 하는데, 병으로 정조가 일찍 사망해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여하튼 왕릉[15]을 옮기고,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이 곳에 두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성 하나 공들여 쌓았다고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평지에 있는 교통의 요지인 수원에 굳이 성을 쌓았다는 점에서는, 상인들의 유통을 활발하게 하려는 정조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세간에서 흔히 회자되는 천도설은 말 그대로 썰에 불과하다. 수도인 한양에 비하면 화성은 1/16 수준에 불과하며[16] 행궁의 규모는 말할 것도 없다. 즉 수원이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화성을 내성으로 삼아 행궁을 확장한 후 별도의 외성을 추가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정도의 구상이 있었다면 화성성역의궤를 비롯해 어딘가에 사료로서 논의가 남아야 하지만, 현재까지 딱히 발견된 근거가 없다. 게다가 지형적 제약으로 인해 수운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이, 한강이라는 거대한 내륙 수로를 버리고 수원으로 수도를 옮겨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자체가 지극히 적다.[17]
성벽 자체가 외벽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벽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하여 만든 점을 들어 동양 성곽 건축의 백미를 보여준다고 한다. 하단은 돌로 쌓고 상단을 벽돌[18]로 쌓았으며, 망루 간의 간격이 화포의 사거리 이내로 서로 엄호가 가능하며, 이전 조선의 성들과는 다르게 망루가 성 내부에 있다. 이전에 지어진 성에는 외부에 독립된 형식으로 있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남한산성에서 독립된 망루를 점령하고 홍이포를 배치하여 쏘는 등 부작용이 있었다. 또한 화공을 위한 장치와 화재를 방어하기 위한 방책도 마련되어 있으며, 약식이나마 대포에 대한 대비도 되어있는 등, 방어에 상당히 신경을 쓴 형태다.
읍성(邑城)이 행정적 형식에 그쳐, 방어 시 읍성을 포기하고 산성에서 농성해야 했던 조선의 성들을 고려한다면, 수원화성은 이전 읍성의 방어 시 문제점을 상당히 극복한 형태다. 이런 형태는 수원화성이 축조된 지 20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양권에서 보기 힘든 형태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록된 것이다.
화성성역의궤가 온전히 남아있어, 성이 완전히 무너져도 다시 복원할 수 있다. 현재 화성은 복원물이나, 철저히 기록에 의거하여 복원했기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21] 즉 이론상으로는 완전 복원이 가능한 성. 일제강점기에 거의 반 해체된 상태였고, 한국전쟁 당시에 미군, 북한군 등의 공습으로 파괴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거의 복원됐다.
그러나 복원 이후 현대에도 은근히 수난을 겪고 있다.
예전에 화성 서장대에서 20대 청년이 술을 마시고 서장대 안에서 자다가 술김에 추워서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서 불을 질러 태워먹었다. 이 바람에 정조가 친히 쓴 글씨였던 서장대 현판까지 전부 다 불타버렸다. 지금 있는 서장대는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미 불타버린 서장대도 1990년대에 복원한 것이었다. 숭례문 방화 사건 이후 누군가가 불을 지르려 시도하질 않나,[22] 성벽에다 불을 지르질 않나. 참고로 불을 지른 용의자는 중학생이라고 한다. 용의자 주장에 따르면 핸드폰을 찾으려고 했다고. 엄밀히 말해 성벽 자체에 불을 지른 것이 아닌 성벽 주변 억새밭에다 불을 질렀다. 솔직히 말해서 핸드폰 찾겠다고 억새밭에 불 지르면 그 안에 핸드폰도 통구이 될 거 뻔히 알 텐데 정신줄 놓고 불 지르진 않았을 테고, 억새밭 속에 짱 박혀서 담배를 피우다가 실수로 불냈다는 설이 더 설득력 있다.
- 사실 화성 건설이 완전히 정조의 기획만은 아니었고, 정조보다 100년도 훨씬 전에 실학자로 익히 알려진 유형원이 철저한 계산 하에 현재 화성 부지에 성을 건설하면 적절할 것이라는 안을 낸 바 있었다. 이 안건의 적절성이 후에 정조와 당시 노론 대신들 사이에서 검토, 수용되고, 실제로도 그에 걸맞은 성과를 거두게 되자, 화성 건설 시에 유형원은 죽은 뒤에나마 이조참판을 제수받는 등 크게 찬탄받았다. 실제로 실록에 유형원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때가 바로 정조 때인데, 유형원의 생애(1622년 ~ 1673년)와는 100년이 넘는 간극이 있다. 유형원이 처음 정계에 언급된 것도 죽은 뒤인 숙종 때인데 말 그대로 무시당했고, 영조 대에 들어서야 겨우 '반계수록'의 종합적 시각이 주목받으면서 일종의 고전과 같이 주목받게 된다. 그것이 절정에 달했던 것이 정조 때. 근래 학계에서는 '실학'의 실체에 대한 회의가 많이 일고 있지만, 유형원의 삶은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실학'의 언급과 빼닮아 있다. 물론 자세히 살펴보면 실학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면도 많지만, '뛰어난 저술 → 그러나 생전에는 무시당함 → 영조·정조 시기 발굴되어 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러하다.
- 화성에서 보이는 시설 중 하나인 포루(砲樓) 역시 정조나 정약용의 독창적인 기획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포루를 기획한 사람은 서애 류성룡으로, <징비록>에 따르면 1592년 중양절(음력 9월 9일) 포루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것과 구조를 적고 있는데, 수원화성의 포루와 비슷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대에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징비록>에 따르면 1596년 모형을 만들다 중단하였으며, 지인 김사순에게 편지를 통해 설계를 보내자 김사순이 포루 설치를 시도하였으나, 지역 주민들이 '전에는 이런 거 없어도 적을 잘 막았는데 왜 이런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가'하며 반발했고, 김사순은 강행하였으나, 병으로 눕자 작업이 중단되어 버렸다. 그리고 터진 게 제2차 진주성 전투... 이외에도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훗날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나 같은 사람의 말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한번 활용해보라'고 하거나, <설책지법>[23]에서 총포를 설치하는 형태의 목책도나 성을 고안하는 등 총포로 아군을 방어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유형원처럼 정조 대에 재조명받거나 하진 못했지만.
- 정조는 측근들에게 화성을 이름 그대로 아름답게 지으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성이 완공된 뒤 정조가 친히 와서 여기저기 구경하는데, 대동했던 신하들 중 한 사람이 정조에게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드는 성을 굳이 아름답게 만들 필요가 있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정조의 대답, "아름다움이 적을 이기느니라!" 실제 정조가 한 주장은, 성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만들면 보는 사람의 기를 꺾으므로, 성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정도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7년(1793년) 12월 8일(정묘) 1번째 기사. 확실히, 수원화성은 유달리 미적인 측면에도 많은 신경을 쓴 건축물인 것은 사실이다.
-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달리, 정약용은 다른 업무들이 많아 수원화성 건설을 직접 지휘하지 못했다. 그는 수원화성 공사가 끝난 이후에야 수원성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성이 지어지지 않았음에 한탄했다. 하지만 만일 정약용의 주장대로 성을 지었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 당시 정약용은 수원화성 전체를 중국식 벽돌성으로 지을 것을 주장했지만, 정조와 다른 대신들은 당시 조선이 벽돌 제작 및 건축 기술이 부족하고,[24] 근처에 석재 광산이 발견[25]되었으니, 기존 방식대로 쌓기로 결정하고 진행했다. 그러다 수원화성 공사 후반부부터 벽돌 건축 노하우가 쌓이면서 옹성이나 포루, 공심돈 등 부가적인 구조물에 한해 벽돌 위주로 지은 구조물들이 나타났는데, 이렇게 지은 곳들은 횡력에 약한 벽돌의 특성상 후대에 무너져서 다시 쌓은 기록이 심심찮게 실록에 나온다.
- 수원화성을 소개하는 곳에 보면, 성문의 화공을 막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소화전인 오성지(五星池)를 비중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실제 중국의 오성지를 살펴봤던 정약용이 건설에 참여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적당히 만들다 보니, 실제 오성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26] 벽돌 사용과는 반대되는 케이스.
- 수원화성 이후에 축성된 성은 덕진진이나 초지진같은 강화도에 있는 돈대 정도인데 훼손 정도가 심해서 성곽사 연구에 화성이 결국 그 끝을 장식하고 있다. 조선시대 산성[27]에선 남한산성, 북한산성에 이은 완성형으로 보아 비교 연구하거나, 성곽 축조 양식의 마지막 단계로 연구하고 있다.
- 팔달문은 1975년 복원을 했는데, 이 때 공사가 잘못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책임을 맡은 대목장 신응수의 말로는, 기둥의 굵기가 미묘하게 가늘어 문화재청 측에 계속해서 두께를 두껍게 해야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결국 복원 중에 화성성역의궤가 발견되고 기둥의 치수를 확인하니 대목장의 말이 옳았다고. 결국 후손들에게 '나는 능력이 이것밖에 안되니 너희가 지혜롭게 해결해 달라.'고 기둥에 먹칼로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문화재청 정밀 진단조사 결과, 들보 등에 심한 균열과 뒤틀림이 생겨, 2011년부터 완전 해체 보수공사를 시작해서 원래대로 복원 공사를 해, 2013년 초에 완공되었다.
- 현재도 계속 화성 복원 공사는 이뤄지고 있는 중이다. 한국전쟁 이후 화성은 대부분 완파되고, 성곽 주위로 많은 이들이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 화성이 본격적인 복원 공사가 이뤄지면서 제모습으로 복원이 이뤄지게 된거다. 지금도 꾸준히 문화재 구역 안의 사유 주택들을 매입해서 허물고 문화재 구역으로 바꾸는 공사가 계속 진행 중이다. 이 때문에 화성 인근지역은 건축 규제가 심한 편으로, 많은 주민들의 불만사항이기도 하다. 현재는 남공심돈으로 대표되는 팔달문 주변 일부만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복원되지 못했다.[28]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한 곳은 원래 효종의 묫자리가 될 예정이었지만, 당시에는 민가(즉, 옛 수원 시가지) 철거 문제 때문에 취소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민가들을 모두 허물고(이에 대한 대책이 바로 수원화성 건설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신도시를 건설해 개발구역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킨 것), 현륭원 조성을 추진하게 되었다.
장안동 공영 주차장은 하루 종일 세워도 4,000원이다.
주차하고 이리로 올라가다.
성벽을 따라 한바퀴 돌 수 있게 되어 있다. 돌로 된 석성 뒤에 토성이 받치고 있는 셈이다.
이 구멍으로 성벽에 다가온 적에게 뜨거운 물을 부을 수 있다.
팔달문은 남문이다.
수원 화성의 정문은 다른 성문과는 달리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이는 정조가 서울에서 내려올 때 이 곳을 먼저 통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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