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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의 일생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2009년 287쪽 ~3/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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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의 일생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2009년 287쪽 ~3/14

singingman 2023. 4. 1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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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일상에 관한 글들을 여러 사람이 썼다.
왕의 교육, 왕비의 탄생,왕의 평소 일하는 모습, 임금이 시를 짓는 뜻, 제왕학, 궁궐, 왕의 식성, 왕실의 행차, 왕이 공식적으로 술 마시는 날, 왕의 죽음, 종묘등에 관해서 썼다.
 
국왕과 왕비가 침전에서 만나는 것을 합궁이라 한다.
왕비의 침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은 용은 국왕을 상징하는 동물이므로 용(국왕)이 자신의 대를 이을 용(왕자)을 생산하는 신성한 장소를 다른 용(용마루)이 눌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왕자가 최초로 배우는 책은 소학으로 그 내용은 초학자가 오륜을 습득할 수 있게 기본적인 예절교육으로 채워져 있다.
 
왕자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야 했다.
정조는 천부적이라고 할 정도로 활을 잘 쏘았다.
1795년 화성행궁에서 혜경궁 홍씨 회갑연 때 신하들과 시합을 했는데 장수들보다도 월등하게 잘 쏘아서 찬사가 줄을 잇자 활쏘기는 우리 집안의 내림이라고 했다.
국왕은 시인이어야 했다.뿐만 아니라 서예와 그림과 음악에도 일정한 수련을 쌓아야 했다.
정조는 음악이론서인 '악통'을 썼고 선조, 효종, 숙종, 영조는 서예 솜씨가 예술에 가까웠다.
 
왕세자는 15세 전후에 대략 혼인을 했다.
실제로는 9살부터 11살 사이에도 많이 했다.
왕세자빈도 비슷한 나이에서 골랐다.
경우에 따라서는 연상도 종종 있었다.
계비를 맞을 때도 왕의 나이와 상관없이 15세 전후의 왕비를 간택하다 보니 선조는 51세에 19세의 인목왕후를 맞았고  영조는 66세에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았다.
 
의궤는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글이나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이다.
의궤라는 말은 의식과 궤범을 합한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전통 시대에는 국가에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전왕 때의 사례를 참고해서 거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행사관련 기록을 의궤로 정리해둠으로서써 후대에 시행착오를 최소화 했다.
때로는 의궤를 미리 작성해서 이 의궤대로 예행연습을 하기도 했다.
왕실 혼례식은 '가례도감의궤'라는 제목으로 정리되어 있다.
 
왕실의 신부 후보는 3차의 과정을 거치지만 실제로는 미리 찍어둔 여자가 있고 형식상 3간택을 했다.
1차에 6~10명, 
2차에 3명
3차에 1명을 선발한다.
이 기간동안 전국에 혼인이 금지되었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 절차
1. 납채: 간택한 왕비에게 혼인의 징표인 교명문을 보내고 왕비가 이를 받아들이는 의식 (6/13일)
2. 납징(납폐): 혼인 성립의 징표로 폐물을 보내는 의식(6/17일)
3. 고기: 혼인 날짜를 잡는 의식(6/19일)
4. 책비(책빈): 왕비 또는 세자빈을 책봉하는 의식. 왕비가 혼례복인 적의를 입고 책명을 받는 자리로 나간다.(6/20일)
5. 친영: 국왕이 별궁에 있는 왕비를 직접 맞이하러 가는 의식(6/22일)
6. 동뢰: 국왕이 왕비를 대궐에 모셔와 함께 절하고 술을 주고받는 의식(6/22일)
 
규장각의 규는 서방의 별자리 이름으로 그 형상이 문자와 유사하여 문장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규장은 임금의 시문을 일컫는 말이나 규장각은 임금의 시문을 보관하는 집이다.
규장각은 정조가 건립했다.
임금이 지은 글을 어제라하고 세자의 글을 예제, 신하가 왕명에 의하여 짓는 글을 응제, 임금과 신하가 시를 주고받는 것을 갱재라 한다.
 
연산군은 음악에 뛰어나면서 미모가 으뜸가는 기생을 뽑아 궁중의 악대로 편성해 그 이름을 운평이라 했고 운평 가운데 왕의 사랑을 받으면 흥청이라 했다.
흥청망청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 책을 읽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천천히 오르면서 골짜기와 언덕의 아름다움등을 다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왕비들이 출산을 많이 하지 못한 이유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그에 비해 첩들은 이런 스트레스가 덜해서 출산을 오히려 많이 했다.
 
영조는 정성왕후를 맞이한 첫날밤에 왕후에게 손이 참 예쁘다고 했더니 왕후가 귀하게 자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영조는 자기가 부왕 숙종과 각심이(궁녀를 돕는 여종)최씨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를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첫날밤부터 왕후가 소박을 맞았다고 한다.
 
기이재상담이라는 음담소화집에 전하는 내용이다.
선조의 부마인 신익성이 정숙옹주와 첫날밤을 맞았는데 잠자리에 들자 옹주가 부마를 아래에 눕게 했다. 신익성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으나 옹주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신익성은 침전의 지붕에 올라가 수키와와 암키와의 위치를 바꾸어 수키와를 암키와의 아래에 놓았다.
왕비가 까닭을 물으니 이것은 간밤에 옹주가 가르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옹주가 다시는 남편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영조의 딸인 화완 옹주는 질투가 심했다.
정조가 장인 김시묵의 죽음을 슬퍼하자 장인의 죽음을 계기로 정조가 세자빈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할까봐 '그게 무슨 큰 일이라고 이처럼 슬퍼하시오?' 라는 망언을 했다고 한다.
혜경궁이 화완옹주의 이 말을 꾸짖자 옹주는 바로 잘못을 시인하며 이 말로 인하여 내 아들은 살지 못하고 며느리와 손녀는 다 노비가 되고 나는 귀양을 가서 가시울타리 둘린 집에 살 것이다. 그래도 이 죄를 용서받지 못하리라고 했는데 과연 그 말처럼 되었다.
 
궁녀의 계급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궁녀는 항아 궁비는 무수리라고 한다.
궁녀는 지존을 섬기는 사람이고 궁비는 궁녀를 따르는 사람이다. 궁녀와 궁비가 엄격히 나뉜다.
궁비는 궁중으로 출퇴근을 하기도 한다. 무수리, 각심이, 손님, 방자등으로 불렸다.
궁녀 자체에도 계급이 있다.
내인에서 시작하여 시녀 그리고 상궁이 있다.
상궁은 재상집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위세가 있었다. 지존에 가장 가까이 있으니 그 권력을 무시할 수 없었따.
영조는 이상궁과 정을 통하기도 했다.
사도세자가 상궁을 꾸짖자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한 말 가운데
너 내 앞에서 상궁을 꾸짖으니, 어른 앞에서는 견마도 꾸짖지 못하는데 그리하는가라고 했다.
 
유학자들은 몸에 병이 들었다는 것은 한 사람의 도덕적 완전함을 훼손하는 증거로 생각했다.
 
술과 음식을 함께 먹으며 기쁨을 나누는 자리인 연향은 인간관계를 화목하게 만들어 유대를 강화시켜주는 요소다.
궁중 연향은 화합의 자리이자 춤과 음악이 공연되는 문화공간이었다.
 
경복궁 긍정전과 창덕궁 인정전이 북쪽에서 남향으로 지어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은 항상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신하는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따라서 북향한다는 것은 신하의 신분임을 자처하는 것이다.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마주 보는 것은 손님과 주인의 관계를 표시한다. 중국 사신을 맞을 때는 이렇게 했다.
 
집안에서 상을 당했을 때 그 대상이 여성이면 내상이라 하고 부녀가 외간 남자의 얼굴을 바로 대하지 않고 피하는 것을 내외한다고 한다. 내는 여성 외는 남성을 가리켰다.
 
천자의 죽음은 붕, 제후의 죽음은 훙, 대부는 졸, 사는 불록, 서민은 사라고 표현한다.
국왕이 죽으면 내시가 평소 국왕이 입던 옷을 가지고 궁궐 지붕에 올라가 세 번 상위복(上位復)이라고 외친다.
이것은 임금님의 혼이여 돌아오소서 라는 뜻이다.
왕비의 경우는 중궁복이라 한다.
유교의 예법에서 떠난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간은 대상에 따라 다르다.
천자는 7일, 제후는 5일, 일반인은 3일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은 5일을 기다려 살아나지 않으면 입관을 했다.
이 5일간 장례를 준비했다.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입히는 습, 옷과 이불로 시체를 감싸는 소렴과 대렴, 대렴이 끝나면 시신을 관에 넣는다. 국왕의 관을 재궁(梓宮)이라 했다. 국장에서는 재궁은 찬궁(欑宮)이라는 큰 상자를 만들어 그곳에 재궁을 모셨다.
 
궁궐에서 건물명을 붙일 때 전은 건물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고 구보다 한 단계 낮은 건물은 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