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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책, 신앙 2021-04-11 본문
교사 생활을 마치고 정년 퇴임식에서 함께 20여년을 지낸 교장 선생님께서 내게 한 말 가운데 기억나는 말이 있습니다.
"성철훈 선생님을 생각하면 책과 산과 신앙이 생각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어떤 점이 이런 인상을 불러왔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과 산은 내가 항상 가까이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게서 신앙을 떠올린다는 말은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내가 설교를 한 것도 아니고 같은 교회에 다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앙 간증을 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학교에서 기도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전도나 신앙교육을 특별히 열심히 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 생활을 잘 못 했다는 뜻인지 생각해 보았더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 말과 행동에서 나도 모르게 아마도 신앙에 관해 생각하게 하는 어떤 것이 있었나 봅니다.
책에 관해서는 우리 학교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대출해 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복도나 식당에서도 종종 책을 들고 다니는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30대 까지만 해도 책 읽는 것은 내게는 너무 힘들고 지루한 일이어서 한 달에 한 권도 읽기가 어려웠습니다.
40대 중반 무렵이 되면서 책을 읽는 일이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면서 따로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두권은 읽겠다고 마음먹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독후감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년말에 일년간 읽은 책들을 조사해보니 일주일에 한 권 이상은 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을 때는 그래도 일주일에 한 권 이상 읽었는데 퇴직하고 시간이 많아지니 노는데 바빠서 오히려 그때만큼 못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작년에는 년말에 조사해보니 일주일에 한 권도 채 읽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많다고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한다는 말도 사실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나는 군에 있을 때 일년에 절반 가량은 산 위 OP에서 생활했습니다.
한 OP에 6~7명의 분대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신병 시절에는 이 분대원들의 식사를 내가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러니 하루의 일과가 아주 빡빡했습니다.
다른 선임들이 다 잠든 새벽에 혼자 일어나서 아침밥을 짓습니다.
그리고 다들 일어나면 아침밥을 먹이고 설거지를 한 후에 나무를 하러 바로 산으로 갑니다.
나무를 하고 돌아오면 여러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또 점심을 준비 합니다.
당시에는 산에서 모든 음식은 불을 때서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과 나무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점심 먹고 설거지하고 나면 또 산 아래 마을로 부식차가 오는 시간에 늦지 않게 내려가서 부식을 수령해 옵니다.
이때 산을 내려갔다 오는 시간이 하루 중 내가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간을 줄여서 책을 읽었습니다.
성경도 읽고 영어 공부도 했습니다.
OP에서는 선임들의 눈이 있어서 신병이 책을 읽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올라오면 또 저녁하고 밥 먹이고 설거지하고 저녁 업무를 처리합니다.
이렇게 바쁠 때도 일년에 한번은 성경을 꼭 완독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그때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이 많지만 일년에 한번도 성경을 읽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분량이 그때보다 적은 것 같습니다.
어떤 책을 내가 즐겨 읽었는지 살펴보니 역사와 동양 고전을 주로 읽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책들을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행기나 불교 관련 서적도 읽었고 기독교 신앙 서적도 종종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기독교인이었던 내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나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의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닮아가려고 부족하지만 노력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지식은 다른 종교에서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스님들의 구도를 향한 열심과 집념은 감탄을 넘어서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사색과 명상을 통해 얻은 가르침은 내 삶을 더 풍성하게 해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훌륭한 목사님들에게서 받은 감동을 이런 스님들에게서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등산을 좋아하다보니 전국의 유명한 사찰들을 찾아다니게 되었고 불교 미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불상이나 탑등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문화재나 미술품으로서의 아름다움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교 문화나 스님들의 일상 생활도 내가 평소 어떻게 생활해야 할 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번뇌나 고통들이 기독교에서는 우리의 죄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탐진치(貪瞋癡)를 말합니다.
욕심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이 번뇌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또 화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도 말합니다.
구약 성경 잠언은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말로 가득합니다.
불교가 내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는 잘 알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공맹이나 노장도 역시 우리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 지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노자가 말하는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내 삶에서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 가운데 하나가 조금 알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내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를 조금 알게 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내 주위에 나와 같은 전공을 한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을 나만 안다고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고수를 만나면 정말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이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산에 관해서는 젊을 때부터 산을 좋아했습니다.
내가 대학 들어갔을 때 많은 동아리들 가운데 산악부에 들었던 것도 산을 좋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30대 까지만 해도 산을 좋아는 해도 자주 가지는 않았는데 40대 중반이 되면서부터 거의 매주 빠지지 않고 산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냥 산을 가는 것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많은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젊고 초보 산꾼이었을 때는 험하고 높은 많은 산을 빠른 속도로 올라가 정상을 정복한 것이 자랑이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앞에 점점 겸손하게 되고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산의 꽃이나 나무, 동식물등 많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여유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 나라 옛 선비들은 등산이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고 유산(遊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산록이나 유산기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등산(登山)은 말 그대로 산을 오르는 것이고 유산은 산을 즐기고 산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니 산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등산을 스포츠에 가깝게 생각하지만 옛 선비들은 유산을 심신 수련의 일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틈만 나면 금강산같은 경치가 수려한 산들을 찾았습니다.
심신 수련의 또 다른 방법으로는 여행이 있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행은 지식과 경험을 쌓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17세기에 귀족이나 상류층 자제들이 대학을 갈 나이가 될 무렵 바로 대학을 가지 않고 유럽을 여행하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Grand Tour라고 해서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는 하인도 동행하게 해서 시중을 들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여행에 관한 글들을 남겼습니다.
여행이 대학에서 배우는 것 못지않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고 해서 생겨난 일이겠지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여행을 하고 기록을 많이 남겼습니다.
일찌기 신라 스님 혜초는 인도를 다녀와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습니다.
우리 조선의 선비들도 청나라를 방문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연암 박지원이고 그의 '열하일기'는 세계적인 여행기이기도 하지요.
마르코 폴로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도 훌륭하지만 그 보다 더 뒷 시대 사람이고 실학자이기도 한 연암의 여행기는 훨씬 사실적이고 문학적인 가치도 뛰어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여행기를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원해서 한 여행은 아니지만 아버지 상을 당해서 제주도에서 육지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 절강성으로 표류해 갔다가 북경을 거쳐 우리 나라로 다시 돌아온 여행기인 '표해록'을 남긴 조선 선비 최부도 있지요.
조선 왕조 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와 같은 세계 최고의 기록물을 가진 나라의 선비답지요.
적자생존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요즘은 이 말이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고 합니다.
옛 선비들은 산을 즐기는 방법도 지금 우리처럼 땀 흘리며 꼭 정상을 오르는데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고 산 여기 저기를 유람하며 다녔습니다.
여유있는 선비들은 말을 타거나 하인들이나 절에 있는 스님들을 시켜서 가마를 타고 산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퇴계 선생님이 외직인 풍기군수로 나갔을 때 소백산을 올랐습니다.
고 최인호의 소설 '유림'에 나오는 두향과의 Love story도 이 무렵의 일인 것 같습니다.
충주호 주변의 구담봉이나 옥순봉, 제비봉등을 가 보면 지금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때 쓴 '유소백산록'을 보면 정상인 비로봉은 오르지도 않고 그 옆에 있는 국망봉을 오르면서 말을 타기도 하고 능선에서는 가마를 타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라는 말을 선비들은 자주 사용했습니다.
<퇴계집>에 수록된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라는 시입니다.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
책 읽기는 산을 노니는 것과 같다고 말들 하는데 讀書人說遊山似
이제 보니 산을 노니는 것이야말로 책 읽기와 같네 今見遊山似讀書
온 힘을 쏟은 다음에 스스로 내려오는 것이 그러하고 工力盡時元自下
얕고 깊은 곳을 모두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그러하네 淺深得處摠油渠
가만히 앉아 피어오르는 구름 보면 묘미를 알게 되고 坐看雲起因知妙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원초를 깨닫네 行到源頭始覺初
그대들 절정에 이르기에 힘쓸지니 絶頂高尋免公等
늙어 중도에서 그친 나를 깊이 부끄러워할 따름이네 老衰中輟愧深余
우리 선비들의 산을 즐기는 모습을 이 시에서 자세히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요즘의 등산 행태를 살펴보면 판이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블랙**라는 등산용품 회사가 선정한 100대 명산이 있어서 이 명산들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이 100대 명산을 다 오르면 이 회사의 물건을 살 때 뭔가 메리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등산 패턴을 잘 살펴보면 가장 짧고 빠른 길로 정상을 올라서 인증샷을 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산을 어떻게 오르고 즐기느냐는 개인의 취향이니까 이러쿵 저러쿵 할 일은 전혀 아니지만 이렇게만 산을 오르면 산이 주는 풍부한 즐거움을 너무 일부분만 맛보고 올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 말하는 종주 산행을 하면 그 산의 많은 부분을 즐길 수 있는데 비해서 정상만 최단코스로 올라갔다가 다시 그 길로 내려오는 산행은 아무래도 산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기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등산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기도 하지요.
"산꾼이 올라간 길로 다시 내려오는 일은 미해병대가 전투중 후퇴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만큼 올라간 길로 다시 내려오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산을 오르는 행위는 힘든 일이 틀림없습니다.
높은 산이든 낮은 산이든 산을 오르는 자체는 힘이 들지만 그만큼 희열이 있습니다.
걷는 행위는 아주 단순한 동작이지만 걷는 동안에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선방에 앉아서 참선을 하는 것 못지 않게 걸으면서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걸으면서 수행하는 방법은 지금은 프랑스 플럼빌리지에 있는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지요.
아마도 걷는 것이 우리의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가 봅니다.
독서가 우리의 건강한 정신을 위해서 필요한 만큼 산도 그런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문득 책과 산과 신앙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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