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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선사(地空禪師)와 달마선사(達磨禪師) 2021-04-19 본문

살아가는 이야기

지공선사(地空禪師)와 달마선사(達磨禪師) 2021-04-19

singingman 2023. 4. 2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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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 지공 선사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일은 열심히 해도 될까 말까한 일도 있고 어떤 일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공선사가 되는 일이지요.

지공선사라는 이름이 멋지지요?

하지만 마냥 멋진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65세가 되면 누구나 지공선사가 됩니다. 

그 순간부터 이제는 사회적으로 대우도 받지만 보호받아야 할 신분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직 능력이 있어도 사회적으로는 전철비도 아껴야 할 나이로 생각해서 공짜로 타게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전철 좌석에도 경로석이 있어서 젊은이들은 앉기 불편한 지공선사들만의 자리까지 있습니다.

박물관이나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는 여러 장소들을 방문할 때도 할인을 해 줍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이런 대접을 받으면 뭔가를 우리도 내놔야 합니다.

Give & Take입니다.

말이나 행동에 품위가 있어야 하고 좀 억울하거나 손해보는 일을 당해도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눈꼴사나운 젊은이들이 업신여겨도 화내지 않는 노련한 여유와 대처법도 가져야 합니다.

그동안 살아온 경륜으로 지나치지 않은 충고와  도움까지 줄 수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처음으로  지공선사 (地空禪師)라는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떤 유명한 스님을 이르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지공선사(指空禪師)라는 인도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문을 쓰면 다르긴 하지만 이런 분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회암사에 가면 이 스님의 승탑과 석등이 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함께 활약했던 무학대사의 스승이 나옹선사이고 이 나옹선사의 스승이 바로 지공선사였습니다. 

 

지공선사 말이 나온 김에 스님들에 관해 좀 알아보았더니 우리가 사용하는 이판 사판이라는 말도 스님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더군요.

어떤 일이 막다른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을 비유하는 말로 조선 시대의 숭유억불정책과 연관이 있습니다.

 

고사성어 대사전에 의하면

"이판과 사판은 불교 용어로서 조선 시대에 생성된 말이다.

조선은 건국이념으로 억불숭유(抑佛崇儒)를 표방하였다.

불교는 하루아침에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승려는 천민 계급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승려들은 활로를 모색했는데 그 하나는 사찰을 존속시키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불법(佛法)의 맥을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 승려들은 폐사(廢寺)를 막기 위해 기름이나 종이, 신발을 만드는 제반 잡역에 종사하면서 사원을 유지시켰는데, 이들을 사판승이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은둔하여 참선 등을 통한 수행으로 불법을 잇는 승려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이판승이라 했다.

그런데 이 ‘이판사판’의 뜻이 전이되어 막다른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을 비유하는 부정적 의미로 쓰이게 된 데에는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승려가 최하 계층의 신분으로 전락했으며 도성 출입 자체가 금지되었다.

자연히 당시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막다른 인생의 마지막 선택으로 인식되었으므로, 이판이나 사판은 그 자체로 ‘끝장’을 의미하는 말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스님들 가운데 다음 백과에 의하면 이판승들은 주로 참선, 경전 공부, 포교 등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들이고 사판승들은 절의 산림(山林)을 맡아 하는 스님을 뜻합니다. 산림이란 절의 재산 관리를 뜻하는 말로, 산림(産林)이라고 쓰기도 한다. ‘살림을 한다’의 살림이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스님들은 또 학승, 선승, 율승, 염불승, 포교승등으로 세분할 수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훌륭한 선(禪)의 스승이 되는 스님을 일러서 禪師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는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달마는 520년경 중국에 와서 선종 1조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바닷길로 광동성 광주(廣州)에 이르고, 남경(南京)에 가서 양(梁)의 무제(武帝)를 뵙고 문답한 후, 양자강을 건너 북위(北魏)의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에 가서 9년 동안 면벽수도했다고 합니다.

이 스님은 워낙 훌륭해서 전설같은 설화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Fact와 Fiction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 중 몇가지만 알아보면

이 스님이 선수행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9년간 동굴에서 벽을 바라보면서 수행한 이야기나 그림들에 나타나는 그의 눈이 큰 이유도 참선을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참선할 때 졸음을 쫓기 위해서 윗눈꺼풀을 잘라내어서 눈이 크게 보인다고 합니다.

달마도를 자세히 보면 눈썹 바로 아래 눈꺼풀이 없고 바로 눈동자가 보입니다.

 

또 양무제가 달마를 죽이려고 군사를 보냈을 때 양자강을 갈대를 꺾어 타고 건넜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입니다.

 

 

달마대사를 그린 그림 가운데
총령도중 수휴척리도(葱嶺途中 手携隻履圖)라는 그림도 있습니다.

파미르 고원(총령,葱嶺)을 넘어 짚신 한짝만을 지팡이에 달고 서천으로 가 버렸다는 내용의 그림입니다.
달마스님이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하고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양무제가 죽였다는 설도 있고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 독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 몇 해 후 송운(宋雲) 이라는 사신이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총령 고개마루에서 달마대사를 만났습니다.

달마 대사가 송운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떠날 때 있던 황제가 죽고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는 지팡이에 짚신 한짝만을 달고 가버렸습니다.

자기 나라에 돌아와서 황제에게 이 사실을 고했더니 달마스님 돌아가신지 벌써 3 년이 지났는데 총령에서 달마스님을 만났다는 말을 믿을 수 없어서 달마의 무덤을 파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관은 비어 있고 짚신이 한 짝만 남아 있었습니다.

해남에 있는 달마산이라는 이름도 그 때 달마 대사가 인도로 돌아간 것이 아니고 이 산으로 왔다는 설화도 있습니다. 

 

 

달마대사의 뒤를 이어 훌륭한 선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혜가스님은 중국 낙양 무뢰 사람으로 어릴 때의 이름은 신광(神光)입니다.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으나 아무도 제자로 받아주지를 않았습니다. 

폭설이 내리는 어느날 밤에 제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밤새 서 있었습니다. 

날이 밝아 쌓인 눈이 허리를 넘을 때까지 돌장승처럼 서 있었습니다.
달마대사는 그때서야 눈 속에 서있는 신광을 보고 뭘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제자로 받아주실 것을 원한다고 했더니 거절합니다.
이 말을 들은 신광은 칼을 들어 자기의 오른 팔을 잘랐습니다.

헤가의 진심을 알아 본 달마는 혜가를 받아들입니다. 

지금도 소림사 승려들이 한쪽 손만으로 합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라고 합니다.

이런 분들이라야 제대로 된 禪師라고 할 수 있겠는데 오늘날 禪師가 너무 많아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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