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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서울 문묘) 21-07-13 본문
성균관 스캔들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문묘는 유교권 나라들에는 여러 곳에 있지만 우리 나라에는 조선 시대 국립대학 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에 있는 것이 가장 규모도 크고 역사성도 깊을 것 같아서 가게 되었다.
혜화역에서 내려서 성균관 대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문묘가 있다.
신삼문은 잠겨 있어서 담장을 따라 안으로 더 들어가니 명륜당 들어가는 옆문이 열려 있다.
지방의 향교나 서원에 비해서 조선의 국립대학답게 규모가 아주 크다.
성균관은 현위치에 1398년에 건립되었다.
강명관의 '노비와 쇠고기'란 책에 의하면 성균관은 반촌에 사는 반인들 즉 노비들의 희생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물론 국가가 일정부분 보조해 주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 국가나 성균관이나 다 노비들을 착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도 살기 위해서는 때로는 성균관의 유생들과 결탁하기도 하고 그들의 주요 직업이었던 소를 도축하는 일로 생계를 꾸리기도 하고 간혹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1946년에 유림들이 성균관 대학을 설립하고 1953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래서 성균관 대학은 은근슬쩍(?) 역사가 600년이 넘어버렸다.
성균은 '음악의 가락을 맞춘다'는 뜻으로 어그러짐을 바로잡아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성균관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이 1298년(충렬왕 24)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1308년(충선왕 즉위)에 성균관으로 바뀌었다.
1356년(공민왕 5)에 국자감으로 바뀌었고 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고쳤고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또한 태학(太學)·반궁(泮宮)·현관(賢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태조대에 새 도읍인 한양을 건설하면서 1398년(태조 7)에 숭교방(崇敎坊 : 지금의 서울 명륜동)에 성균관의 건물을 세웠다.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봄·가을로 석전(釋奠)을 행하는 문묘(文廟), 강의 장소인 명륜당(明倫堂),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서재(東西齋)가 이때 세워졌고, 그후 성종대에 도서를 보관하는 존경각(尊經閣)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선조대와 그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성균관의 직제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으나,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겸관(兼官)으로 정2품 지사(知事) 1명과 종2품 동지사(同知事) 2명이 있으며, 실제 교수직은 정3품 대사성(大司成) 1명, 종3품 사성(司成) 2명, 정4품 사예(司藝) 3명, 종4품 직강(直講) 4명, 정6품 전적(典籍) 13명, 정7품 박사(博士) 3명, 정8품 학정(學正) 3명, 정9품 학록(學錄) 3명, 종9품 학유(學諭) 3명으로 구성되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초기에는 200명이었으나 말기에는 100명으로 줄었다. 입학자격은 소과 급제자인 생원·진사에 한했으나 결원이 있을 경우 사학(四學) 생도나 문음자제(門蔭子第)들이 승보시(升補試)를 통해 입학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 신분의 학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고 승보시 출신은 하재생(下齋生) 또는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여 구별했다.
그러나 이들 하재생도 출석 점수인 원점(圓點)이 300에 달하면 문과 초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교과과정은 경사(經史)의 강의와 과문(科文)의 제술로 이루어졌으며, 사서오경은 주자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여 가르쳤다. 1466년(세조 12)에는 구재(九齋)를 설치하여 사서오경을 차례에 따라 가르치도록 했으나 이 구재법이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학생들의 수업 성적은 강경(講經)과 제술을 통해 평가했으며,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문과 초시를 면제하고 바로 회시를 볼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의 관내 생활은 유교적 의례에 따르도록 했으며, 그들의 생활은 대부분 자치적으로 질서를 잡도록 이루어져 있었다.
학생들의 자치기구로는 재회(齋會)가 있는데, 그 임원으로는 장의(掌議)·색장(色掌)·조사(曹司)·당장(堂長) 등이 있었다. 또 유생들은 국정에 관해 유소(儒疏)를 올리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성균관을 떠나버리는 권당(捲堂)을 행하기도 했다.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학전의 수조(收租)와 성균관의 외거노비 신공으로 충당했으며, 그 전곡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했다.
조선시대의 위정자들은 성균관을 가리켜 인륜을 밝히고 인재를 기르는 곳이라고 했다. 실제 성균관은 학문연구와 교육을 통해 지배이념을 보급하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함으로써 왕조체제의 유지에 기여했다. 성균관의 이러한 기능은 성균관과 과거제를 밀접하게 연결시킨 데 바탕을 두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문과의 경우 소과와 대과의 2단계가 있었다. 예비시험으로서의 소과는 내용적으로 성균관의 입학자격자를 뽑는 것이었다. 여기서 선발된 이들에게는 성균관 과정의 교육을 거친 다음에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는 성균관이 대과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선 말기에 갑오개혁을 통해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성균관의 성격에도 변화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성균관에 경학과(經學科)가 신설되고 역사·지리·세계사·세계지리·수학 등을 교육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성균관은 변화하는 사회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일합병에 의해 성균관의 교육은 중단되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바뀌게 되었다.
재생(齋生)들의 학습장소 또는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親臨)하여 과거를 시행할 때 시험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규모는 명륜당(明倫堂)과 같이 남향으로, 중앙에 정청(正廳)이 있고,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는데 모두 25칸이다.
명륜당 앞 은행나무 - 향교들에는 은행나무들이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행단[杏壇]이란 말이 생겼다.
중국 한자에서는 행(杏)이 살구나무를 뜻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은행나무다.
아산에 있는 맹사성의 맹씨행단이 생각난다.
느티나무인지 회화나무인지 모르겠지만 회화나무는 학자수로도 불린다고...
명륜당 안에는 엄청 많은 편액들이 있다.
뜻을 알 수 없지만 누군가는 알아보라고 여기에 다 올린다.
북을 한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고
두번 치면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는다.
세번 치면 진사 식당에 모여 식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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