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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원기

singingman 2023. 6. 20.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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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의 도화원기는 아래와 같다.
 
진나라 태원 연간에 무릉 사람으로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물길을 따라갔다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도 모를 무렵 홀연히 복숭아꽃 숲이 눈앞에 나타났다.
양쪽 강을 끼고 수백 보의 거리에 온통 복숭아나무뿐이며 다른 잡목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향기로운 풀들이 싱싱하고 아름답게 자랐고 복숭아 꽃잎이 펄펄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있었다.  
어부는 이상하게 여기고 계속 앞으로 나가 복숭아 숲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 했다.
숲은 강상류에서 끝났고 그곳에 산이 있었으며,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고,
그 속으로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어부는 즉시 배에서 내려 동굴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동굴은 처음에는 몹시 좁아 간신히 사람이 통과할 수 있었으나 수십 보를 더 나가자 갑자기 탁 트이고 넓어졌다.
토지가 평평하니 넓고 집들이 정연하게 섰으며 기름진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사방으로 길이 트였고 닭과 개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 마을에서 왔다 갔다 하며 농사를 짓는 남녀의 옷차림은 다른 고장 사람들과 꼭 같았으며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다들 즐거운 둣 안락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어부를 보자 크게 놀라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어부가 자세히 대답하자 그들은 어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내고 닭을 잡아 대접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어부가 왔다는 말을 듣고 와서 저마다 물었다.

집주인이 말하기를 ~~
"우리 선조가 진나라 때의 난을 피해 처자식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 절경으로 와 다시 나가지 않았으므로
결국 바깥 세상과 단절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이 어느 때냐고 묻는 것을 보니, 그는 한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이고 그 뒤로 위나라와 진나라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다고 하였다.
어부가 지난 역사를 하나하나 자세히 이야기해주자 모두들 놀라며 감탄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어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술과 밥을 대접했다.
어부는 며칠을 묵은 후 작별하고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어부는 마을을 벗어나와 배를 얻어타고 돌포아오는 길에 여러군데 표식을 했다.

고을에 이르자 태수를 찾아 그대로 보고했다.
태수는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어부가 표식 한 곳을 찾아가게 했으나, 결국 길을 잃고 도화원으로 통하는 길을 찾지 못 했다.
남양의 유자기는 고상한 선비였다.
그 소리를 듣고 기뻐하며 기꺼이 찾아가보려고 계획했으나 목적을 달성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그 후로는 뱃길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晉太元中 武陵人捕魚爲業  진태원중 무릉인포어위업
緣溪行 忘路之遠近 忽達桃花林  연계행 망로지원근 홀달도화림 

夾岸數百步 中無雜樹  협안수백보 중무잡수 
芳草鮮美 落英繽紛 방초선미 낙영빈분 
漁人甚之 復前行 欲窮其林  어인심지 부전행 욕궁기림
林盡水源便得一山 山有小口  림진수원편득일산 산유소구
髣髴若有光 便舍船從口入 방불약유광 편사선종구입
初極狹 纔通人 復行數十步 豁然開良 초극협 재통인 부행수십보 활연개량  
土地平曠 屋舍儼然 有良田美池桑竹之屬  토지평광 옥사엄연 유량전미지상죽지속
阡陌交通 鷄犬相聞 천맥교통 계견상문
其中往來種作男女衣著 悉如外人  기중왕래종작남여의저 실여외인  
黃髮垂髫 竝怡然自樂 황발수초 병이연자락
見漁人 乃大驚 問所從來  견어인 내대경 문소종래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殺鷄作食  구답지 편요환가 설주살계작식
村中聞有此人 咸來問訊  촌중문유차인 함래문신
自云 자운
先世避秦大亂 率妻子邑人來此絶境不復出焉  선세피진대란 솔처자읍인래차절경불부출언  
遂與外人間隔 // 수여외인간격
問今世何世乃不知有漢 無論魏晉  문금세하세내부지유한 무론위진  
此人一一爲具言 所聞皆歎惋  차일일일위구언 소문개탄완  
餘人各復延至其家 皆出酒食  여인각부연지기가 개출주식  
停數日辭去 此中人語云 不足爲外人道也 정수일사거 차중인어운 부족위외인도야
旣出 得其船 便扶向路 處處誌之  기출 득기선 편부향로 처처지지
及郡下 詣太守 說如此  급군하 예태수 설여차
太守卽遣人隨其往 尋向所誌 遂迷不復得路  태수즉견인수기왕 심향소지 수미불부득로
南陽劉子驥 高尙士也  남양유자기 공상사야
聞之 欣然規往 未果 尋病終 문지 흔연규왕 미과 심병종
後遂無問津者 후수무문진자  
 (위 글은 http://cafe.daum.net/musicgarden/5sqw/8025 에서 복사해 옴)


아래는 안평대군의 도원기이다.

정묘년(1447) 4월 20일 밤, 내가 막 잠이 들려고 할 즈음, 정신이 갑자기 아련해지면서 깊은 잠에 빠지고 이내 꿈을 꾸게 되었다. 홀연히 인수(仁叟, 박팽년)와 더불어 어느 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봉우리가 우뚝 솟았고 골짜기가 깊어 산세가 험준하고 그윽하였다.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있고, 그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는데 숲 가장자리에 이르러 갈림길이 되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던 터에 마침 산관야복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나에게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에 이르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인수와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갔는데, 절벽은 깎아지른 듯 우뚝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으며, 시냇물은 굽이쳐 흐르고, 길은 구불구불 백 번이나 꺾이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골짜기에 들어서니 동천이 탁 트여 넓이가 2,3리 정도 되어 보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자욱히 서려 있고, 멀고 가까운 곳 복숭아나무 숲에는 햇빛이 비쳐 연기 같은 노을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대나무 숲 속에는 띠풀집이 있는데,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흙으로 만든 섬돌은 거의 다 부스러졌으며, 닭이나 개, 소, 말 등은 없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내에는 오직 조각배 한 척이 물결 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이어서 그 쓸쓸한 경정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인 듯 싶었다.
이에 한참을 머뭇거리면서 바라보다가 인수에게 말하기를 “암벽에 기둥을 엮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짓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정녕 이곳이 도원동이로다.”라 하였다. 마침 옆에 몇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정부(貞父, 최항), 범옹(泛翁, 신숙주) 등이 운을 맞춰 함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윽고 신발을 가다듬고 더불어 함께 걸어 내려오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즐기다가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오호라, 큰 도회지는 실로 번화하여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노니는 곳이요, 절벽이 깎아지른 깊숙한 골짜기는 조용히 숨어사는 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런 까닭에 오색 찬란한 의복을 몸에 걸친 자는 발걸음이 산 속 숲에 이르지 못하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을 보며 마음을 닦는 자는 또 꿈에도 솟을대문과 고대광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길을 달리하는 까닭이니 필연의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옛 사람이 “낮에 행한 바를 밤에 꿈을 꾼다.”고 하였다. 나는 궁궐에 몸을 기탁하여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터에 어찌하여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었던 말인가? 그리고 또 어떻게 도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거늘, 도원에 노닒에 있어서 나를 따른 사람이 하필 이 몇 사람이었는가?
생각건대 본디 그윽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며 마음에 전부터 산수 자연을 즐기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아울러 이들 몇 사람과 교분이 특별히 두터웠던 까닭에 함께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가도(可度, 안견)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옛날부터 일컬어지는 도원이 진정 이와 같았을까? 뒷날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옛날 그림을 구하여 나의 꿈과 비교하게 되면 무슨 말이 있을 것이다. 꿈을 꾼 지 사흘째에 그림이 다 되었는지라 비해당의 매죽헌에서 이 글을 쓰노라.

歲丁卯四月二十日夜, 余方就枕, 精神蘧栩, 睡之熟也, 夢亦至焉, 忽與仁叟, 至一山下, 層巒深壑, 崷崒窈窅. 有桃花數十株, 微徑抵林表而分岐.
徊徨竚立, 莫適所之, 遇一人山冠野服. 長揖而謂余曰. "從此徑以北,入谷則桃源也." 余與仁叟, 策馬尋之. 崖磴卓犖, 林莽薈鬱, 溪回路轉, 蓋百折而欲迷.
入其谷則洞中曠豁, 可二三里. 四山壁立, 雲霧掩靄, 遠近桃林, 照暎蒸霞. 又有竹林茅宇, 柴扃半開, 土砌已沈, 無鷄犬牛馬, 前川唯有扁舟, 隨浪游移, 情境蕭條, 若仙府然.
於是踟躕瞻眺者久之. 謂仁叟曰. "架巖鑿谷, 開家室, 豈不是與! 實桃源洞也." 傍有數人在後, 乃貞父, 泛翁等, 同撰韻者也.
相與整履陟降, 顧盻自適, 忽覺焉. 嗚呼通都大邑, 固繁華, 名宦之所遊, 窮谷斷崖, 乃幽潛隱者之所處.
是故紆身靑紫者, 迹不到山林, 陶情泉石者, 夢不想巖廊. 蓋靜殊途, 理之必然也.
古人有言曰, "晝之所爲,夜之所夢." 余托身禁掖, 夙夜從事, 何其夢之到於山林也耶. 又何到而至於桃源耶. 余之相好者多矣,何必遊桃源而從是數子乎.
意其性好幽僻, 素有泉石之懷, 而與數子者交道尤厚, 故致此也. 於是令可度作圖. 但未知古之所謂桃源者, 亦若是乎. 後之觀者, 求古圖, 較我夢必有言也. 夢後三日, 圖旣成, 書于匪懈堂之梅竹軒.

 (https://newmoun.tistory.com/m/804에서 복사해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