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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랑한 틱낫한 스님(퍼온 글) 본문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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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랑한 틱낫한 스님 “도착했습니다, 집에 왔습니다”
[인물로 보는 동남아시아]전쟁 참상 속에 참여불교 실천하고, 귀국하지 못한 아픔 넘어 생활명상 가르치다
2022년 향년 95로 입적한 틱낫한은 생전에 ‘살아 있는 부처’로 불리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불교 승려로 꼽혔다. 그는 일상에서의 마음챙김과 내면의 평화·자비·비폭력을 강조했고, 현실 속에서 비폭력 평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불교도 삶에 참여해야 한다는 ‘참여불교’를 이끌었다. 그가 쓴 명상법과 마음챙김에 관한 책들은 30개 이상 언어로 번역돼 전세계에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베트남 시골 마을 출신의 틱낫한은 어떻게 세계인들에게 이토록 큰 영적 스승이 될 수 있었을까.
참여불교로 불교 혁신을 꿈꿨으나
1926년 10월11일 베트남 중부 후에에서 태어난 틱낫한은 16살에 후에의 뜨히에우 사원에서 출가했다. 1949년 봄, 23살 되던 해에 그는 불교를 계속 공부하러 호찌민(당시 사이공)으로 가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곳에서 그는 불교를 쇄신해 당면한 시대적 문제에 불교의 가르침을 적용해 실천하려 노력했고, “모든 불교는 삶에 참여한다”는 취지의 참여불교를 주창했다. 많은 젊은 승려를 길러냈고, 불교 저널을 편집해 출판했으며, 평신도를 위해 일상생활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적용할 방법을 제안했다.
1957년에는 베트남 중부 산악지대에서 오두막 수행처 ‘프엉보이’(‘향기로운 종려나무 잎’이라는 뜻)를 일구기 시작했다. 프엉보이는 농촌의 불교 수행처로서 음악과 시를 벗 삼아 영적 수행과 치유에 전념하는 불교 생활 공동체였다. 전통적인 불교 사원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형태로, 틱낫한이 당시 불교계 활성화를 위해 시도한 실험적 모델이었다.
1956년에는 30살 나이로 베트남 전국불교협회에서 공식 간행하는 저널의 편집장이 됐다. 틱낫한은 베트남 불교의 재도약을 위해 힘썼고, 당시 남북으로 분단된 불교계의 화합과 공생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출판 2년 만인 1958년 간행물을 위한 자금 지원이 중단됐다. 틱낫한의 대담하고도 새로운 시도에 대한 반감과 저항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느꼈고, 크게 좌절했다. 1956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슬픔도 한몫했다.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과 고통 속에 그는 희망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수행법을 연구했다. 틱낫한 하면 떠오르는 마음챙김과 호흡 수련, 느린 걷기 명상법이 이 시기에 구체화했고, 덕분에 그는 깊은 좌절감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베트남에서 참여불교 활동, 반전평화 운동
1961년부터 1963년까지 틱낫한은 미국 유학을 떠나 비교종교학 등을 공부했으나, 그동안 베트남 불교계의 상황이 악화했다. 1963년 봄, 남부 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불교를 탄압했고 많은 승려가 희생됐다. 같은 해 11월 지엠 정권이 몰락함에 따라 틱낫한은 베트남 불교의 갱생과 활성화를 위해 귀국 요청을 받고 호찌민으로 돌아왔다. 이후 1966년까지의 기간은 틱낫한이 젊은 세대와 함께 사회봉사, 교육, 공동체 건설 등 자신의 사회에 대한 비전을 치열하게 실행에 옮긴 시기였다.
이 시기 베트남은 여전히 가난했고 혼란스러웠다. 틱낫한은 승려도 사원 안에서 명상만 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 깊이 참여해 전쟁과 폭격으로 고통받는 주변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여기며 참여불교 운동을 적극적으로 실행했다. 1965년 세운 청년사회봉사학교가 대표적 예다. 학생 자원봉사자 수천 명에게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치고 영적 회복력을 훈련한 뒤, 현장에 투입해 폭격당한 마을의 재건, 학교와 의료센터 설립, 전쟁으로 집을 잃은 이들의 재정착을 돕도록 했다. 1966년 2월에는 전통적인 불교 보살 계율에 기반한 조직인 ‘오더 오브 인터빙’(Order of Interbeing)을 설립했다. ‘인터빙’은 틱낫한이 창안한 말로, 세상 만물과 모든 일이 서로 연관되고 상호 의존해 공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공존 원리를 무시하고, 신념을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에 대한 그의 단호한 답변이었다.
베트남전쟁은 좀처럼 끝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1965년 군대가 남베트남 정부를 장악하고 미국이 대규모 전투부대를 파견하면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틱낫한과 주요 지식인들은 서구의 유명한 인도주의적 인사들에게 베트남인은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신으로 알렸다. 1966년 틱낫한은 직접 미국에 가서 폭력 중단을 촉구하기로 하고 5월 베트남에서 출발했다. 짧은 여행 계획이었으나, 그가 다시 베트남 땅을 밟기까지 39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틱낫한은 1966년 5월31일 마틴 루서 킹 목사와 함께 미국의 베트남 폭격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 여러 나라를 돌며 베트남전쟁의 즉각적인 휴전과 미군 철수 등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강력한 평화 요구는 베트남 남부와 북부 양쪽에서 모두 환영받지 못했다. 민족반역자로 비난받았고 그의 평화운동은 반국가행위로 규정됐다. 그리고 틱낫한의 베트남 귀국이 금지됐다.
반전평화 운동 외에 틱낫한은 베트남 구호 활동을 지원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폭력으로 고아가 된 어린이 수천 명을 후원했고, 일명 ‘보트피플’로 불리던 베트남 난민을 위해 구제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전세계에 평화와 형제애의 메시지를 전했다.
프랑스 망명, ‘지금 여기’의 생활명상
베트남 정권의 탄압으로 귀국길이 막힌 틱낫한은 1973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젊은 시절 베트남에서의 전쟁과 상실, 가난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그는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챙김과 평화를 위한 수행을 전파하고자 생활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1950년대 베트남 중부 고원에 세운 프엉보이가 그 좋은 예였다.
프엉보이를 모델 삼아 그는 프랑스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 마음챙김 수련센터를 설립했다. 1982년 창설한 ‘플럼빌리지’(Plum Village)는 프랑스 시골의 작은 공동체로 시작해, 서양에서 가장 크고 활발한 활동을 하는 불교 사원으로 성장했다. 틱낫한은 이후 미국에도 ‘그린마운틴 수행원’과 ‘디어파크 수도원’ 등을 세우며 서양 문명의 물질 숭배에 지친 서구인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위로를 줬다.
틱낫한이 세운 수행센터가 서구인에게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그의 가르침이 여느 불교의 명상법과 달랐기 때문이다. 틱낫한은 불교 심리학과 서양 문화의 이해에 대한 탄탄한 기초를 바탕으로, 편안하고 자비로운 소통과 화해를 위한 독특한 불교 수행법을 개발했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야외를 걸으며 하는 걷기 명상, 친밀하고 편안한 환경에서의 식사 명상, 누운 자세에서 휴식하며 하는 명상 등 삶의 매 순간 명상이 가능했다. 틱낫한이 개발한 이 모든 수행법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대중화된 마음챙김 수련에 새롭고 강력한 모범이 됐다.
특히 틱낫한 개인의 아픈 체험이 그가 제시한 여러 수행법에 녹아 있다. 대표적으로 그가 자기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설명한 “도착했습니다, 집에 왔습니다”라는 문구는 그가 고국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고통을 직시하고 수행하며 스스로 치유하면서 만들어졌다. 그는 수행 덕분에 ‘지금’ ‘여기’에서, ‘진정한 집’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을 인용해본다.
“마음챙김 수행은 항상 도착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도착하는 것. (…) 우린 항상 뭔가를 찾고 구하고 갈망하지만 찾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달린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더 많이 달려야 찾을 수 있을지 우리는 모른다. (…) 삶과 그 경이로움은 오직 현재의 순간에만 우리 곁에 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직 현재의 순간만 있다. 그래서 마음챙김 수행은 지금, 여기로 돌아오게 하고, 삶을 더 깊이 사는 법을 가르쳐준다.”
마침내 베트남 돌아와 입적하다
베트남 공산당 정부는 2005년에야 틱낫한이 베트남에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했다. 베트남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신청을 한 해였다. 200명이 넘는 승려와 불자로 구성된 대규모 대표단과 함께 귀국한 틱낫한은 베트남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하노이·후에·호찌민 등 베트남 여러 지역을 다니며 강연했고, 많은 출가·재가 신도들이 그를 따랐다. 그가 젊은 시절에 세웠던 프엉보이와 가까운 곳에 밧냐(Bát Nhã) 사원이 설립됐고, 틱낫한의 영향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베트남 공산당 정부는 이 수도원의 급속한 성장에 위협을 느껴 폐쇄 조치를 내렸다. 여전히 그에게 위협을 느꼈던 당시 베트남 공산당 정부의 분위기를 추측할 수 있다.
베트남 정부의 귀국 금지 조치가 풀린 뒤에도 국외에서 포교를 펼치던 틱낫한은 2014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신체의 오른쪽 대부분이 마비됐고 말할 수 없었다. 요양을 계속하던 그는 자신이 출가했던 후에 부근의 뜨히에우 사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2018년 베트남으로 영구 귀국했다. 그리고 2022년 1월22일 95살의 나이로 입적했다.
쉽고 간결한 말로 풀어 설명한 그의 가르침은 빠르게 변화하는 삶을 사는 현대인들을 감화시키며 오래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의 말들은 공허하지 않다. 그의 언어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가 젊은 시절 몸소 겪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 피어났기 때문이다.
하정민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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