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9~1922년까지의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편년체로 설명한 책. 오스만 제국의 뿌리는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던 튀르크(돌궐)부족이었다. 이들이 흑해와 아나톨리아반도로 와서 정착하고 셀주크 튀르크 제국을 세웠다. 이들은 중동을 지배했고 이들의 힘이 유럽쪽으로 뻗어가자 기독교 국가에서 십자군을 조직해서 대항하기도 했다. 13세기에는 몽골의 강력한 군대에 정복당하기도 하고 이때 호라즘 왕조는 튀르크족 노예 맘루크 출신이 시조가 되기도 했다. 콘스탄티노플 정복 전쟁 때 메흐메드 2 세는 골든 혼 진수작전에서 배를 산 위로 끌고 올라가서 성을 점령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후에 콘스탄티노플에 남아 있던 그리스 철학가와 예술가들이 그리스 로마 고전문헌을 들고 이탈리아로 빠져나갔다. 이 학자들로 인해 이탈리아에서는 문학과 예술을 바탕으로 한 인간 중심의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유럽에서는 금속활자 인쇄술과 종이를 만드는 제지술의 도입으로 책의 출판이 늘고 지식이 확산하여 유럽 사회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십자군 원정으로 지중해의 상업과 교육이 활발해지자 서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문호가 개방되고 부유한 이탈리아에서는 예술이 발달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 홍해 항로를 독점하게 되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새로운 항로 개척이 일어났다. 유럽의 르네상스와 항로 개척으로 근대 유럽이 열리게 되었다. 15세기와 16세기에 이르러 유럽은 르네상스, 새로운 항로 개척과 종교개혁 등으로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티마르 제도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와 경제제도의 중추였다. 중앙조정으로부터 일정한 토지를 받은 지방의 토지 소유주가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전시에는 일정 수의 기병을 제공했다.
데뷔쉬르메는 정복지 청소년들을 오스만 제국의 충직한 병사나 행정가로 양성하는 제도로 무라드 1 세 때인 1362년 펜치크 법령이 그 기원이었다. 데브쉬르메로 선발된 8 ~ 18세의 장정은 신병 예비부대 (아재미 올란)에서 교육을 받았고 교육을 마치면 예니체리 예하 부대에 배치되었다. 보병인 예니체리 병사들은 울루페라는 봉급을 3개월마다 받았고 40대까지 결혼이 금지되었으며 군 복무 외 다른 일에는 종사할 수 없었다. 데브쉬르메에 의해 만들어진 중앙상비군은 술탄의 친위대인 보병 예니체리부대와 궁전을 수비하는 보스탄즈 부대가 근간이었다. 데브쉬르메로 선발된 인력 중 두뇌가 명석하고 판단력이 빠른 자원은 오스만 제국 궁전에 있는 엔데룬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엔데룬 학교에서 교육받고 능력을 인정받은 자들은 오스만 조정의 고위 관리로 임명되었고 나머지 인력은 예니체리부대로 배치되거나 지방 총독등으로 임명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법치'로 국가 관료 중심의 중앙 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오스만 제국에서 법률의 근원은 이슬람율법(샤리아)이었지만 영역과 인구가 확대해 구성원간 이해가 충돌되는 현실을 맞아 신의 계시법인 샤리아 외에도 재산, 결혼, 이혼, 상속 등 개인의 민사 문제에 관한 세속적 법률도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법치를 중요시한 국가였다. 술탄이 초월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판관의 법률적인 판결 없이는 누구도 시민의 자유나 권리를 탄압할 수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밀레트'라는 비무슬림 종교 공동체에 대한 관용 정책을 실시해서 다른 종교들도 신앙의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카눈나메이 알리 오스만' 법령 중 가장 관심을 끄는 조항은 형제 살해에 관한 조항이다. 형제 중에서 어느 누가 술탄이 될 경우 세계 질서를 위해 형제를 죽일 수 있다. 울레마도 승인하였으므로 명백한 범법행위가 없어도 사전에 형제를 죽일 수 있었다.
쉴레이만 1세는 알렉산더 같은 세계적인 군주가 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항상 지적인 소양을 갈고닦았다. 어렸을 때부터 톱카프 궁전학교 (엔데룬 학교)에서 역사, 문학, 신학, 군사학 등을 공부했다. 세르비아어, 차가타이 튀르크어, 페르시아어와 우르두어 등을 익히고 고전 문헌들을 읽으면서 국제적인 감각과 안목을 키웠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세르비아어로는 대화가 가능했다. 유럽의 역사적인 현장에서는 언제나 그가 주인공이었다. 슐레이만 1세의 등장은 오스만 제국과 유럽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에 오스만 제국의 탁월한 문인이자 군사 전략가였고 능숙한 외교관이자 정치가였다. 슐레이만 1세 시대 톱카프 공전은 세계 문화의 중심이었다. 오스만 궁전의 품위와 격식 있는 예법은 오스만 제국의 우월함을 보여주었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진행되는 궁전의 의전 행사는 외교사절의 눈을 사로잡았다. 페르시아어와 아랍어를 섞어터키어를 격식 있게 구사하는 궁정 언어의 품위는 오스만 제국이 고도의 문화 흡수력과 문화 권력을 갖춘 부유한 국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휘렘은 노예 출신에서 궁녀로, 다시 궁녀에서 황후로 신분이 급상승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미모와 영특함도 있지만 노래도 잘 불러 슐레이만 1 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녀는 후궁 중에서 서열이 제일 높은 하세키 칭호를 받아 궁중에서 입지가 단단해졌다. 1521년 쉴레이만과의 사이에서 첫아들 메흐메드를 얻었고 이때부터 황후로서 궁전 하렘에서의 공식적인 역할을 시작하였다.
매흐메드 2세 이후 슐레이만 1 세는 메드레세의 순위를 12단계로 더 세분화하여 배움의 깊이와 넓이가 상승하는 메드레세간 위계질서를 유지했다. 그가 세운 '쉴레이마니에 메드레세'는 최고 수준의 기숙학교로 먹고 자면서 독학하는 130여 개의 방도 운영했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에 메드레세는 교수자와 학습자 모두 배움 중심의 수업을 하는 학습 공동체였다. 현재의 고교 대학 수준인 매드레세에서 수학하기 전에는 마을의 모스크에 속한 스브얀 맥테비(초등학교)를 다녔다. 고아나 형편이 안되는 아동은 차선기관인 와크프(재단)로부터 옷과 비용 등을 지원받았다. 초등학교에서는 읽기, 쓰기, 쿠란, 계산하기 등 기초교육을 하였다. 매드레세에 진학하려면 스브얀멕테비를 졸업해야 한다. 매드레세의 교육과목에는 아랍어 (형태론, 구문론), 쿠란, 하디스, 이슬람 법학, 논리학, 응변술, 설교, 수사학, 철학, 신학 등이 포함되었다. 메드레세는 수업연한이 정해져 있는 학년제 교육과정이 아니라 수강과목을 모두 합격해야 졸업을 했다. 졸업 시 획득한 성적으로 차상위단계의 매드레세에 입학할 수 있었다.
메드레세는 고전기(1300년 ~ 1600년)라 할 수 있는 건국 초기부터 16세기 말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인재를 양성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중앙조정의 공직이 데브쉬르메(청년 징병제)로 선발되고 궁정학교(엔데룬 학교)에서 교육받은 인재들을 채용하면서 매드레세는 차츰 밀려나게 되었다.
바예지드 2세 시대인 15세기 말부터 쉴레이만 1세 시대인 16세기 말까지의 기간은 오스만 제국 건축의 고전기였다. 고전은 최고 수준을 의미한다. 고전기 건축의 전성기는 슐레이만 1세 때였다. 고전기에는 이슬람 종교 시설인 모스크를 중심으로 메드레세, 병원, 공중목욕탕, 빈민급식소, 도서관, 한(숙소), 시장, 영묘등 사회 공익시설이 함께 들어서는 복합 단지 형태의 퀼리예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퀼리예를 구성하는 시설들은 사회, 문화, 종교, 교육의 기능을 수행 하였고 대형 클리예가 도심과 도심 외곽에 들어서자 마을과 마을이 연결되면서 도시도 지속해서 확장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7대 술탄인 메흐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이어 10대 술탄 쉴레이만 대제에 이르러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메흐메드 2세의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그는 유럽의 맹주가 되었다.
정복시기에는 예니체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나라의 기둥이 되었지만 이들의 힘이 점점 세어지면서 봉급 인상을 요구하고 과거에는 예니체리가 국가를 위해 존재했지만 예니체리를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7세기 들어 정부는 예니체리를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6세기에 유럽은 신대륙에서 은을 가져오고 대항해 시대를 열었지만 나라 자체가 부유했던 오스만 제국은 밖의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발전이 더뎠다.
18세기 오스만 제국에는 중앙통치권의 약화로 생긴 지방분권 시대였다. 중앙 집중통치 체제가 와해되고 지방분권에서 행하게 된 환경을 만든 것은 말리카네 제도였다. 말리카네 제도가 시행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권력구조 농촌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16세기 말부터 티마르 제도가 붕괴하면서 지방(농촌)에는 농지를 사들인 아얀이 생기게 되었다. 아얀은 지방에서 큰 농지를 가진 토호로 같은 시기 유럽에서 자본과 계급으로 부상한 부르주아 같은 사람들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삼국 연합 함대와 1827년 10월 20일 나바리노 해전을 치렀다. 결과는 참패였다. 해전개시 세 시간 반 만에 57척의 오스만 함선이 침몰하였고 8000명에 이르는 병사가 희생되었다. 이 패배로 오스만 제국은 함선과 해병 등 해군력을 거의 잃어버렸다. 나바리노 해전은 이후 1830년 그리스 독립으로 이어졌다.
발칸 전쟁과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군장교 출신인 무스타파 케말이 열강들의 오스만 점령에 항거하고 새로운 독립 국가를 세울 국민저항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현재 튀르크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무스타파 캐말 아타튀르크가 되었다. 아타튀르크는 '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튀르크인들이 그에게 붙여준 명예로운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