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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다산의 축첩(蓄妾) 비교 본문
퇴계 이황(李滉, 1502년 1월 13일 ~ 1571년 1월 13일)과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1836년 4월 7일)은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두 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둘 다 첩을 두었습니다.
오늘날의 도덕 기준으로 보면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사대부가 첩을 두는 것이 그리 허물이 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퇴계의 경우를 살펴보면
퇴계는 21세 (1521년) 때, 학문에만 몰두하는 아들을 걱정한 노모의 성화로 영주의 초곡마을 출신 허씨 부인과 혼인했습니다.
이 허씨 부인에게서 맏아들 이준(李儁)과 둘째 아들 이채(李寀)를 낳았습니다.
결혼한 지 약 6년 만인 27세 (1527년) 무렵, 둘째 아들 이채를 낳은 후 산후조리 후유증으로 부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첫 부인과 사별한 지 3년 후인 30세 (1530년) 무렵, 예안에 유배 와 있던 명망가 권질(權礩)의 딸 권씨 부인과 재혼했습니다. 권씨 부인은 가문의 비극(갑자사화 등)으로 충격을 받아 정신질환(지적 장애)을 앓고 있었습니다. 장인 권질이 상처한 퇴계에게 딸과의 혼인을 간곡히 부탁했고, 퇴계는 상대방에게 부족함이 있어도 예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흔쾌히 승낙했다고 전해집니다.
결혼 후 16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권씨 부인은 종종 정신이 온전치 못한 행동으로 퇴계를 곤란하게 했으나, 퇴계는 그녀를 지극히 아끼고 감싸주었습니다. 퇴계는 손윗사람이나 주변의 핀잔에도 아내를 탓하지 않고 늘 따뜻한 배려로 대했습니다.
첫 부인이 1527년에 죽고 1529년이나 1530년에 둘째 부인을 맞이하기 전에 살림을 도와 줄 첩을 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첩은 퇴계의 가정 살림을 맡아 정성껏 돌봤다고 합니다. 두 번째 부인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첩이 안주인 역할을 대신하여 집안일을 계속 도맡았습니다.
그러니까 퇴계에게는 이 첩실이 실제 생활에 있어서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첩과의 사이에 서자 이적(李寂)을 두었습니다.
퇴계는 첩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로 이적을 자신의 호적에 정식으로 올렸으며, 후손들이 적서 차별을 받을까 염려하여 퇴계 가문의 족보에 적서 구별을 두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퇴계 가문의 족보에는 적서 구분이 없다고 합니다.
그가 45세(1546년)때 두 번째 부인도 죽고 정실 부인이 없는 상태에서 1548년에 단양 관기 두향을 만나게 됩니다.
두향과의 로맨스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이고 그가 풍기군수로 발령이 나면서 이 짧은 로맨스는 끝이 납니다.
이후 두향은 퇴계가 떠난 후 관기 생활을 정리하고, 이황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강선대가 내려다보이는 기슭에 초막을 짓고 평생 수절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퇴계가 죽자 두향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며 단양 말목산 아래 그녀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스토리 텔링 공원을 만들어서 두 사람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스토리 텔링 공원의 퇴계와 거문고를 타는 두향
***
다산은 1800년에 정조가 죽고 다음 해에 강진으로 유배가서 18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 때 자기를 도와주던 여인을 첩으로 들입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정씨 집안 여인으로 진솔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그녀에게서 홍임이란 딸이 태어납니다.
나중에 다산이 유배에서 해배되어 마재로 돌아올 때 이 첩실과 딸 홍임을 집으로 데려오려고 했지만 정실부인(명문가인 홍씨 집안의 혜완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쓴 '남당사'나 '매화 독조도'와 같은 글이나 그림을 보면 이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매화독조도
위의 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웠구나 어디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한 마리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오늘날 우리 기준으로 보면 퇴계에 비해서 다산은 첩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첩을 들이는 것이 큰 허물이 될 것도 없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정실부인의 압력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산은 15세(1776년) 되던 해에 홍혜완과 혼인했습니다.
그리고 강진으로 유배가기 까지는 첩을 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유배지에 있을 때도 부인이 자기가 입던 붉은 명주 치마를 보내기도 하고 다산은 이것을 잘라서 하피첩(霞帔帖)을 만들고 여기에 글을 썼습니다.
이 하피첩이 만들어진 것이 대략 1810년으로 알려져 있고 1808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부터 딸 홍임이 태어난 1813년 이전 사이에 홍임 어미를 소실로 맞이하여 다산초당의 살림과 문하생들의 수발을 들게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산의 둘째 아들 학유도 1808년~1809년 사이에 아버지를 찾아와서 한동안 함께 지냅니다.
이후 꾸준히 홍임 어미의 도움을 받았으니 집안에서도 이 첩실의 존재를 알았으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해배된 후에 다산은 이 첩실을 함께 데려가지 못하고 딸과 함께 다시 강진으로 내려 보낸 것을 보면 가문이나 부인의 힘이 상당히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퇴계는 끝까지 첩실을 책임졌지만 다산은 그러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산은 가문과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천주교 신앙도 배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형 약종은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지만 다산과 그의 형 약전은 배교해서 목숨을 부지하고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다산은 그가 확실히 배교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1794년 금정 찰방으로 지방관이 되었을 때 천주교인들을 색출해 처벌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우리 나라 학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책을 유배 시절에 썼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책들은 혼자 힘으로 다 쓴 것은 아니고 흔히 다산 학단으로 알려진 지인들이나 제자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퇴계와 다산을 비교해보면 두 사람 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 살림을 살아주거나 식사와 자질구레한 일상 생활을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해서 여인을 들이게 되었고 이 여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첩으로 되었습니다.
퇴계는 두 번째 정실부인이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죽을 때 까지 잘 돌보았고 첩의 자식도 차별 받지 않게 잘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두향을 단양에 두고 갔지만 당시 관기를 두고 떠난 것은 비난의 여지가 없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산이 홍임과 그 어미를 버린 것은 그때나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비난받을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뛰어난 훌륭한 인물도 털면 먼지가 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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