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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자락길 & 인왕산 17-10-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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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자락길 & 인왕산 17-10-21

singingman 2023. 1. 1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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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찬양대 야유회 답사겸 가다.
인왕산은 몇 주 전에 갔다왔는데 자락길만 걷기는 너무 짧아서 좀 더 걸으려고 가다.
가을 기운이 완연하고 덥지도 않고 산행하기 참 좋은 계절이 왔다.
산행 마치고 내려와서는 성수네랑 세종 문화회관에서 Paul Potts 연주회에 갔다 오다.
북한산 자락길은 전철로 갈려면 3호선 홍제역에 내려서 1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
오늘 코스는 홍제역 - 홍은벽산 아파트 옆 등산로 - 데크길 따라 - 상명대 후문 입구 -옥천암 - 홍지문 건너 인왕산 입구 -정상 -사직공원 내려 가는 길 - 인왕산 숲길 - 수성동 - 광화문 - 세종문화회관 이었다.
점심 식사 시간 포함애서 4시간 40분 정도 걸었다.

시온 찬양대원들은 아래 글을 잘 읽고 그대로 따라오면 됩니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정해진 시간에 홍제역 1번 출구로 오면 제가 친절하게 가이드해서 모십니다.

여기 홍제역 1번 출구로 나와서 쭉 직진합니다.

그러면 공중에 날아가고 있는 이 내부 순환도로 아래 건널목을 건넙니다.
건널목 건너면 오른쪽에 아파트 건축 공사를 하고 있고 바닥에는 이 초록색 펠트 천이 깔려 있습니다. 이 펠트 천이 끝나는 지점까지 오시면 됩니다.(혹시 11/4일에 이 펠트 천이 없으면 오른 쪽 아파트 공사 끝나는 지점까지 오시면 됩니다.)

펠트천이 끝나는 지점 오른 쪽에 이 계단이 보입니다. 이 계단을 따라 쭉 올라오세요. 올라오면 차 다니는 길이 나타나고 아래 사진에 보이는 계단이 또 나타납니다. 그러면 계속 올라오세요.

위의 계단 끝나는 지점에 더 이상 직진할 수 없는 산으로 막힌 길이 나옵니다.

이 길을 만나면 우회전 하세요. 그러면 삼거리가 나타납니다. 사진에 찍힌 시간을 보면 이 두 계단을 올라오는데 2분 밖에 안 걸립니다.

삼거리 왼편에 산으로 올라가는 이 계단이 보입니다. 그러면 올라가세요.

왼편 계단을 안 올라가고 직진하면 앞에 보이는 이 아파트로 들어갑니다.

이 계단만 올라가면 오늘 올라가는 길은 끝입니다. 3분만 올라가면 편안한 아래 사진에 보이는 데크길이 보입니다.

이제부터는 룰루랄라~~ 하면서 쭉 갑니다.

이 젊은 부부는 동네 사람인 것 같습니다.

길옆에는 농부들 등골 빠지게 하는 쓸모없는 등골나물이 잔뜩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데크 길이 싫은 사람은 이 위의 흙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이런 편안한 길이 계속 됩니다.

멀리 북한산의 봉우리들이 보입니다. 제일 오른쪽 봉우리는 보현봉이고 그 왼쪽은 문수봉입니다.
보현과 문수는 대웅전에 있는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입니다.
그러니까 문수봉과 보현봉 사이에 있는 대남문 자리가 석가모니불 자리가 되겠지요.
무슨 말인지 관심없는사람은 신경 안 써도 되고 관심있는 분들은 대웅전 불상들을 공부해 보세요.

제일 왼쪽에 있는 봉우리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었던 비봉이고 그 오른편에 있는 작게 보이는 흰 바위가 사모바위 입니다.

데크길과 흙길 중 원하는 길을 골라서 가세요.

이런 흙길도 잠깐 나옵니다.

꽃향유가 힘들게 피어 있습니다. 꽃향유 맞나요?

산국도 예쁘게 피어 있구요.

왼쪽 길로 가면 향로봉 올라가는 등산로 입니다.

소나무가 우거진 길을 걸으면 참 기분이 좋아집니다.

집에서 볼 일을 못 보고 오신 분들은 여기서 해우(解憂 -근심을 해결하다.)할 수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위한 베드민턴 코트도 있구요.

이건 무슨 열매일까요?

담쟁이 넝쿨이 나무를 감고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이 나무는 죽거나, 살아도 엄청 고생합니다.
우리도 작은 잘못들을 그냥 용인하다 보면 결국은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지요.

이 길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숲 속 데크길이 아주 아름다워 보이죠?

지금은 팥배나무가 제 철입니다.

뱀딸기가 여쁘게 열렸네요.

이건 찔레나무 열매지요?

https://youtu.be/tjSZTZqf0m4


어떤 나무도 소나무의 품위를 따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화촌 방향의 서울시내 모습입니다.

향로봉 올라가는 등산로 입니다.
북한산 등산로가 도중에 곳곳에 있어서 언제든지 둘레길이 심심하면 등산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소나무를 보면 자꾸 찍고 싶어집니다.

https://youtu.be/6iFbhute5m0


데크길을 만들면서도 나무를 자르지 않고 살려 주어서 참 감사합니다.

도중에 이런 쉼터도 있고 등산로도 왼쪽에 있습니다.

담쟁이 샐깔이 참 곱지요?

여기는 참나무 숲입니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네요.

벚나무와 느티나무가 단풍이 듭니다.

이 사진은 주일 아침에 교회 가면서 차 안에서 찍은 우리 동네 가로수 모습입니다.

싸리나무도 단풍이 노랗게 들었습니다.
군에 갔다 온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면 월동 준비 하느라 싸리비 만들던 생각이 난다고 오늘 점심 먹으면서
이지원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6.25때 전사한 분 같은데 여기 위령비가 있네요.

안내판이 이렇게 친절하게 곳곳에 있어서 길 잃은 일은 전혀 없습니다.

중간에 이런 정자도 있어서 가다가 간식 먹고 가도 됩니다.

이제 여기서 데크길은 끝나고 하산할 일만 남았습니다

여기까지 사진 찍으면서 놀멍 쉬멍 와도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위가 상명대학 입니다.
우리는 이 길로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갑니다.

오늘 산행 중 산 위에서 유일하게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여기만 올라가면 더 이상 올라가고 싶어도 오늘은 올라가는 길이 없습니다.
좀 빡세게 올라가고 싶은 분들에게는 이 길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갑니다.

이 길은 향로봉에서 내려오는 등산로 입니다. 이 돌담은 탕춘대 성벽입니다.

상명대학교 후문 안내판이 보이지요?
우리는 대학으로 안 들어가고 오른쪽 옥천암이라는 암자 쪽으로 내려갑니다.

가다보면 이런 바위도 보입니다.


산 속에 있는 동네가 참 평화스러워 보이지요?

상명대학교 입니다.

나팔꽃이 예쁘게 피었습니다.

나팔꽃도 색깔이 다르지요? 메꽃과 어떻게 구분하나요?

이건 옻나무인지 붉나무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풍이 곱게 들어 있길래...

싸리나무가 참 아름답게 물들었습니다.

이제 내려가는 길입니다. 봄에 오면 개나리 터널을 지나가겠습니다.

드디어 다 내려왔습니다. 이제 이 데크길을 따라가면 홍제천이 나오고 오늘 산행은 끝이 납니다.


내부 순환도로가 보이네요.

홍지문 터널입니다.여기는 차가 언제나 막힙니다.

옥천암이 보입니다.

홍제천에 오리인지 원앙인지 놀고 있습니다.

옥천암에 있는 절집입니다.

북한산 아래는 절이 엄청 많습니다.

자세히 보면 이 불상 아래 사람들이 앉아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애불에 색칠을 했습니다.

조선 시대 윤덕삼이라는 노총각이 기도 후 나무장사를 면하고 장가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출처 뉴스렙(http://www.newsrep.co.kr) 옛날 이 마애불의 모습입니다.

종각에 사물이 다 있습니다.

여기 보이는 목어는 몸통은 물고기이고 머리는 용머리지요 그래서 龍頭漁身이라 표현하고 초창기에는 목어가
단순한 물고기 형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화려하게 변했다고 합니다.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뜨고
자기 때문에 스님들이 졸지 말고 정진하라는 의미로 불가에서는 물고기를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목어는 뱃속이 비어 있어서 저 뱃속을 스님이 예불시간을 알리거나 할 때 나무 막대기 두개로 두드립니다.
이 목어를 사용하기 쉽게 작게 만든 것이 목탁이라고...


극락전에 있는 아미타불

극락전은 안양전 혹은 무량수전으로도 불리는데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입니다.
경기도 안양시는 바로 극락시입니다. 그러니 안양중앙 교회는 극락중앙교회가 됩니다.ㅎㅎ
무량수전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 생각나지요?
한 때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졌었지요.
지금은 그 옆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에 그 지위를 넘겨주었지만, 이 무량수전 안에 있는 아미타불은
특이하게도 석가모니불의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이 아미타불을 만드는 사람이 잘 몰랐거나 착각을 했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했는지 몰라도
이런 경우는 많지는 않습니다.
불교 사찰을 신앙의 대상이 아닌 문화재로 공부해 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5층 석탑입니다. 탑은 대체로 층수가 홀수로 되어 있습니다.

애기똥풀이 아직도 피어 있습니다. - 줄기를 꺾어보면 애기똥처럼 노란액체가 나옵니다.

인왕산 기차 바위 입니다. 여기서 보아야 왜 이 바위 이름이 기차 바위인지 알 수 있습니다.

홍지문입니다.

홍지문 천정에 있는 구름무늬입니다.

뒤돌아 본 홍지문 모습입니다.


어느 집 담장에 담쟁이 넝쿨이 꽃처럼 아름답게 물들어 있습니다.

철 늦은 장미도 피어 있구요. - 역시 꽃은 장미입니다.

세검정 입니다.

겸재 정선 '세검정도'
<세검정의 유래>
자하문고개를 넘어 신영동 168­6번지에는 정자 세검정(洗劒亭)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일대를 세검정동이라 하였으며,  세검정동은 다시 세검동으로 약칭되어 온다.
따라서 세검동은 현재 법정동명도 행정동명도 아니지만 신영동은 물론 자하문고개를 넘어서부터 홍지문안 북한산과 백악 뒤의 여러 골짜기 일대가 대개 세검동으로 불리어 왔다.
 이러한 깊고 넓은 계곡, 그 중에서도 수석과 좌우 산림풍경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은 것이 세검정이었다.

예전 세검정 주위는 동령폭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바위 위로 소리내어 흘러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더구나 여름 장마철이 되면 많은 물이 모여서 부근 계곡에 넘쳐 흘러 일대 장관을 이루기 때문에 도성안 사람들이 많이 나가 넘쳐 흐르는 물결을 구경하였는데 이를 연중행사로 삼았다 한다.
또 정자 앞에는 넓은 바위들이 깔려 있고 그 바위들은 물에 갈려서 깨끗하고 매끄럽기가 비단폭 같았으므로
평상시에는 근처의 학동들이 붓과 먹을 들고 나가 글씨를 연습하여 먹물 흔적이 가실 날이 없었다 한다.
세검정의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먼저 인조반정 때의 이야기로서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이괄을 비롯한 이귀·김자점·김유 등이 자하문 밖 이 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논하고서 칼을 씻었다 하여 정자의 이름을 세검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숙종 45년(1719)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고 평창(平倉) 등 시설을 그 부근에 두었으며,
영조 때에는 군문(軍門)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설치하고 종래 북한산성의 업무를 관장하던 경리청(經理廳)도 총융청과 합하니 이 곳은 국방의 요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때는 또 탕춘대의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고치고 왕이 때때로 거둥하여 장병들의 무예를 시험하기도 했으며, 300여간의 연융대 청사를 새로 지었다.
 신영동(新營洞)의 동명은 새 군영(軍營)이 들어섰다 하여 붙여졌다.
이렇게 군사시설이 증대되면서 연융대 앞 시냇물이 흐르는 바위 위에 정자를 지으니 장병과 관민들이 수시로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정자 이름을 세검(洗劒)이라 한 것은 장소가 군영 앞이요, 또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공하였던 사실을 기념하면서  ‘칼을 씻어 칼집에 거둔다.’ 곧 평화를 구가한다는 뜻이었다 한다.

세검정은 1941년 부근의 종이공장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주초석(柱礎石)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5월에 복원하였다.
 복원된 정자는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정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암반 위에 4각 장초석(長礎石)을
세우고 마루를 꾸몄으며 5평 반 가량의 규모로 기둥머리에는 익공계(翼工系) 양식의 간결한 수법으로 결구(結構)하였으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세검동 일대는 산이 높고 물이 맑아 경치는 좋으나 논밭이 없고 다른 생산이 없어서 주민들이 생활고를 못이겨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한성시전(漢城市廛)에서 매매되는 포목의 마전(麻廛)과 각 관청에서 쓰는 메주와 종이 제조의 권리를 이 곳 사람들에게 주어서 생활을 유지하게 하였다.
그제야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면서 이 곳에 알맞는 여러 과목(果木)을 심어서 능금·자두밭으로 개발하여 생활의 자립을 확립하였다 한다.
세검동 일대는 봄에는 온갖 꽃의 아름다운 빛,   여름에는 싱싱한 과실, 가을에는 불타는 듯한 단풍,   다듬은 듯한 반석(盤石),   옥같이 맑은 시냇물이 온 골짜기를 장식하였다.
특히 세검동 일대는 능금과 자두의 명산지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사초도 여기서 씼었다고 하지요.
 



정자 아래 바위에 글을 새겨두었다.

고마리가 세검정 아래 예쁘게 피어 있습니다.

홍제천 모습입니다.

이 중국집에서 짜장밥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짜장밥이 7,000원이고 오리지날 중국집입니다.
오늘 우리 모임은 여기까지 입니다.

거리가 너무 짧아서 아쉬운 분들은 여기서 인왕산으로 올라갈 겁니다.
미리 등산 준비해서 오세요. 인왕산은 약1시간 반 내지 2시간 정도 걸을 예정입니다.



상명대학 아래 찻 길에서 건너편 자하문 쪽으로 보면 이 높은음자리표가 보입니다.
여기로 건너가서 오른쪽 홍지문 쪽으로 몇 걸음만 걸어가면 인왕산 올라가는 등산로가 나옵니다.







여기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다 내려다 보면 홍지문이 이렇게 보입니다.

탕춘대 성벽을 아랫쪽은 이렇게 복원했습니다.

이런 편안한 데크길도 잠깐 나옵니다.


아까 북한산 자락길에서 보았던 봉우리들이 여기서도 잘 보이죠?

계단길도 있고...

산 윗 부분에는 성벽이 허물어진 채로 옛날 모습 그대로 입니다.

산부추꽃이 피어 있습니다.

구절초가 참 기품있죠?

여기서도 내부 순환로가 보입니다.

여기서도 상명대학교가 잘 보입니다.

상명대 뒤 왼쪽 바위 봉우리는 족두리봉이고 오른쪽 높은 봉우리는 향로봉입니다.


군인들이 만든 방공호가 보입니다.

누리장 나무는 꽃보다 씨방을 받치고 있는 꽃받침이 더 아름답습니다.


청운동 방향입니다.

어기도 소나무가 참 좋지요?

이런 바위길도 올라갑니다. 인왕산은 큰 산이 아니어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습니다.

멋진 소나무가 보여서리...

이 바위는 왜 이렇게 상처가 많이 났을까요?

이 산을 올라갑니다.

여기가 인왕산의 명물인 기차바위입니다. 아까 아래서 봤지요?

여기서는 기차 모양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런 바위도 있습니다.


성벽을 잘 보수했습니다.

지금은 팥배나무가 아주 화려합니다.

올라온 길을 뒤돌아 봅니다.

치마바위 입니다.

(인왕산치마바위에얽힌전설)
중종반정후
중종을 왕위에 앉힌 자들은 자신들이 살해한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의 보복이 두려워서 중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경왕후를 폐위시켰다.
왕후는 인왕산 아래에 있는 옛 거처로 쫓겨났다. 단경왕후는 궁을 나오면서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왕산 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어두겠다는 약속을 중종에게 남겼고,
이를 죽을 때까지 지켰다. 아침이면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널어놓고 저녁이면 걷는 일을 51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중종 또한 부인을 잊지 못해 경회루에 올라 부인이 있는 인왕산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전해지는 슬프고도 애잔한 전설은 단순히 큰 바위로만 보일 수 있는
치마바위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멀리서 보면 모양이 치마처럼 보여서 치마바위라고 합니다.(전설일뿐입니다만... )

구절초일까요? 쑥부쟁이일까요?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시인 안도현으로 부터 '무식한 놈'이라고 욕 먹을 수도 있습니다.

무식한 놈
안 도 현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絶交다!"

정상부근에 성벽을 따라 길이 잘 나 있습니다.

이런 철계단길도 있구요.

남산이 잘 보이네요.

정상입니다. 청와대가 가까워서인지 아니면 김신조 이후 그런지 경찰들이 항상 지키고 있습니다.

측지점입니다.


담장 위 옛 덮개돌을 하나 기념으로 둔 것 같습니다.

정상에서 독립문 방향으로 바라보면 이런 아름다운 경관이 보입니다. 만리 장성도 이렇게 성벽 위를 걸을 수 있게 해 두었지요. 하지만 이 성벽 윗길은 군인들만 다니는 길입니다.

한양도성 성벽입니다.

만리장성은 아니지만 우리 성벽도 참 아름답지요?

이런 성벽을 쌓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을까요?


서울 시가지 풍경


내려오다 뒤돌아보니 이렇습니다.

여기는 범바위 입니다.

경복궁이 한 눈에 들어오지요?

청와대도 보이구요.

인왕산 모습입니다.

치마바위에 주름이 이렇게 많이 잡힌 이유는 일제가 여기에 글들을 많이 써서 그것을 지운 흔적이라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치마바위에는 이런 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쁜노무시키들. 자세한 내용를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 글을 참고하십시오.


인왕산 치마바위 슬픈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사직공원쪽으로 내려오다 오른쪽으로 보면 이 '선바위'가 보입니다.
선바위는 바위가 우뚝 서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參禪하는 스님 모습같아서 붙인 이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 사진에서 처럼 무당이나 무속인들이 여기서 기도하는 행렬이 하루 종일 끊이지 않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단풍이 곱게 들었습니다.




내 사진이 어떻게 이렇게 찍힐 수 있을까요? 알아맞춰 보세요.

노랑 코스모스도 피어 있습니다.

인왕산 숲길을 다시 또 걷습니다.


이 길은 인왕산 둘레길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분꽃도 예쁘게 피었네요.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138.2㎝ * 79.2㎝이다. 국보 제216호. 삼성미술관 리움

인왕산을 수성동 계곡쪽에서 바라보면 이런 모양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림 아랫부분은 위에서 내려다 본 각도이며 그림 윗 부분은 올려다 본 각도다.
수성동 계곡에서는 이 각도가 나올 수 있는 지점이 없다.

위 그림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조정육 교수의 강의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 그림은 아마도 1751년 윤 5월 하순(어쩌면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날씨를 근거로 25일로 추측함) 비온
뒤 맑게 갠 인왕산을 그린 것으로 추측한다. 이 때 정선의 나이는 76세였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의 이야기를 추측해 보면 그와 막역지우였던 시인 사천 이병연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사천은 겸재와 함께 인왕산 근처에 살았으며 당시 많이 아팠다.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1751년 윤 5월 1-18일까지는 날씨가 변화무쌍하였고 19-24일까지는 계속 비가 왔으며 25일 아침까지 비가 오다가 저녁에 비가 개었다고 한다.
그리고 28일 아침에 잠깐 흐리고 이후는 계속 맑았다고 한다.

만약 이 그림이 25일에 그려졌다면 당시 아프고 있던 사천의 쾌유를 빌었을 것이고 29일 이후에 그려졌다면
사천이 29일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명복을 비는 그림이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천은 시인이고 겸재는 화가였으므로 서로 시와 그림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정선의 또 다른 인왕산도도 있다.

겸재 정선 필(筆), 인왕산도 18세기, 종이에 엷은 채색, 62 cm, 104cm, 개인 소장

이 그림은 인왕제색도보다 훨씬 뒤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한다. 그런데 산 이름이 仁王山이 아니고 仁旺山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정선의 그림이냐는 데 대해서 논란이 있다. 일제는 조선 왕실을 누르기 위해서 산 이름도 바꾸었다.
수성동을 그린 정선의 또 다른 그림 중 수성구지가 있다.


정선, 수성구지 종이에 수묵, 52.9 cm * 87.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선의 '수성동'보다 좀 더 먼 곳에서 수성동을 바라본 그림이다.
인왕산을 그린 또 다른 정선의 그림도 있다.

(좌) 정선, 청풍계, 1730년, 종이에 채색, 96.2cm 36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우) 정선, 청풍계, 1739년, 종이에 엷은 채색, 153.6cm, 59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http://www.ssgblog.com/3414 [신세계그룹 공식 블로그]

오른쪽 간송 미술관 소장본은 겸재의 장동팔경 그림 가운데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큰 작품입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인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은 어느 글에서 이 그림에 대한 감회를
다음과 같이 써 놓았습니다.

온 폭에 거의 하늘의 공간을 남기지 않은 대담한 화면 포치법과
스산스러우면서도 어딘가 호연한 시심이 넘나드는 독특한 분위기가
뭉클한 감명을 안겨 주는 것은 아마도 정을 다해서 길들인
우리 산하의 실감에서 오는 감상인지도 모른다.

출처: http://www.ssgblog.com/3414 [신세계그룹 공식 블로그]


꽃놀이 장소로 유명한 인왕산 남쪽 아래 필운대 그림도 있다.

(좌) 정선, 필운대상춘, 1740~1750, 비단에 엷은 채색, 27.5 cm 33.5cm, 개인 소장 (우) 정선, 필운대, 1751년경, 종이에 엷은 채색, 29.5cm 33.7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http://www.ssgblog.com/3414 [신세계그룹 공식 블로그]


겸재와는 옆집에 살았던 강희언의 인왕산 그림도 있다.
묵직한 정선의 그림에 비해서 아주 세밀하고 생동감이 있는 그림이다.

인왕산도 강희언 18세기 종이에 담채 24.6cm x 42.6cm 서울 개인 소장

이 그림 오른쪽 위에 暮春登桃花洞望仁王山(모춘등도화동망인왕산)이라고 적혀 있다. '늦은 봄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수성동 계곡에 원추리가 철늦게 피어 있습니다.


왕거미가 먹이를 잔뜩 달아두고 있습니다.

이건 산사나무 열매입니다.

아줌마들이 사모정에 앉아서 정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돌다리가 그 유명한 다리입니다.

이 근처에 안평대군의 비해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돌 두개가 그림에 나와서 유명해졌습니다. 아래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 이 돌다리가 보이죠? 기린교라는 이름의 이 돌다리를 복원했다고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이 골짜기에 물도 많이 흘렀던 것 같습니다. 아래는 봄에 찍은 다른 사람의 사진을 가지고 왔습니다.

http://munchon.tistory.com/699에서 복사해 옴.


(좌) 정선, 수성동, 1751년, 비단에 엷은 채 색, 33.7cm 29.5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http://www.ssgblog.com/3414 [신세계그룹 공식 블로그]


위의 그림 한 장 때문에 2009년 7/1~2012년 6/30일까지 총예산 1,060억원을 들여서 원래 지형.지세를 복원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문화재인 돌다리와 청계천의 원류지를 보전하고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지는 문화 공간 속에 한양의 역사성을 되살리는 내용이다.
당시에는 여기에 옥인 시범 아파트가 있었다. 이 아파트를 철거하고 수성동 계곡에는 자연스런 형태의 돌담을 쌓고 정자 사모정은 경관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계곡 북측에 설치하고 옥인 아파트는 방문하거나 이용하는 이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일부 구조물을 남겨놓도록 했다.
(겸재 정선 이석우 저 81쪽을 참고 했음.)

아마도 이 아파트가 헐리고 원상복구가 된 모양입니다.(위 책 같은 페이지를 복사함.)

정선이 살았던 집은 현재 옥인동에 있는 군인 아파트 자리정도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http://munchon.tistory.com/699에서 복사해 옴.


아래 그림이 자기가 살던 집을 그린 것이 아닐까?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겸재일 것이고

겸재 정선(謙齋 鄭敾),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 종이에 담채, 27.4cm x 27.4cm, 60대 중반, 간송미술관소장

위의 집에서 훌륭한 선비이며 문인화가였던 그는 책을 읽다가 아래 그림과 같이 쉬기도 하며 지내지 않았을까요?

독서 여가 정선 비단에 채색 16.8 ㎝ 간송미술관 소장.


여기는 석굴암이래요.

설악초


옥인동 어느 집 정원에 감이 아주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서는 저녁에 세종문화회관에 Paul Potts 연주회를 갔습니다. 지난번 인왕산 왔을 때는 내려와서 예당에서 국립합창단의 엘리야 들었는데 인왕산과 음악회가 무슨 연관이 있나?






세종문화회관에 뒤돌아 서있는 여자의 손을 내가 잡았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왜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의 '행복한 눈물'이 생각나죠?


아래는 다른 분이 찍어서 보내 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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