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저자 두 사람은 단국대 동문이다. 사료가 부족한 가야사를 연결하느라 고생이 많았고 두 사람이 쓰다 보니 썼던 글이 또 나오고 한다. 가야는 전후기로 나눌 수 있다. 42년에 건국해서 562년에 금관가야가 마지막으로 멸망함으로 끝난다. 백제와 신라의 사이에서 중앙집권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연맹국가로 고생을 한 것 치고는 참 오랜 기간 존속했다. 지금의 고령에서 낙동강 하구 김해까지 주로 낙동강 주변과 섬진강 주변을 근거로 해서 형성된 부족 국가로 보는 것이 좋겠다. 가야는 철 생산량이 많았던 후기의 대가야는 고령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무역과 외교를 잘 해서 존속했던 전기의 김해를 중심으로 했던 구야국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역사 시간에 배운 삼한 즉 마한 진한 변한 가운데 가야는 변한에 속하고 백제는 마한, 신라는 진한으로 이 책은 구분하는 것 같다. 가야와 백제는 왜와 교역을 많이 했고 신라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신라와 백제가 연합해서 고구려를 치기도 하고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치기도 한다. 동쪽의 신라와 서쪽의 백제 그리고 북쪽의 고구려 사이에 낀 가야는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았겠다. 그래서 가야은 신라의 눈치도 보고 백제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상황에 따라 백제에 붙었다 신라에 붙었다 하기도 해야했다. 가야 말년에 우륵이 신라로 귀화하면서 가야금곡 12곡을 가져간 것은 음악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고 말한다. 김수로가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왕이 되는 과정은 그 전에 이미 가야 땅에 존재했던 9간의 세력이나 문화보다 김수로의 영향력이 더 컸던 것을 말해준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설은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인도에서 바로 올 수는 없고 다른 나라를 거쳐서 왔을 수는 있겠다. 전설이 말하는 것은 일정한 상황은 알 수 있기 때문에 허왕후가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집단이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쌍어문은 메소포타미아 우르크 4기의 문화라고 한다. 이것이 채도(彩陶)와 함께 동쪽으로는 중국 인도로 서쪽으로는 이스라엘과 이집트로 전파되었다. 그래서 쌍어문은 전세계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우리 무덤이나 경주에서 발견되는 쌍어문이 김수로와 허왕후 시대의 것인지는 분명하지도 않다. 불교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중국으로부터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가야의 건국 설화와 관련해서 불교 관련 기사가 많은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임나일본부설이 가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저자는 가야에 일본 관리들이 머물던 관이 있어서 이것이 임나일본부로 와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 같다. 가야 멸망후 김유신은 김춘추와의 결속으로 3대만에 신라의 중요한 인물이 되지만 그 후손들은 신라의 견제와 골품체계 때문에 다시는 높은 직위에 오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