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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기차통학

singingman 2023. 3. 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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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산시 하양에 있는 무학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상고로 진학을 했습니다.
우리 집은 하양역에서도 30분은 족히 걸어야 갈 수 있는 진량면 상림동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침마다 등교하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새벽밥을 먹고 하양역까지 와서 통근 기차를 1시간 가까이 타고 가서 대구역에 내린 후 또 다시 학교까지 30여분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빨라도 학교 가는데 2시간은 족히 걸렸습니다.
당시에는 다들 이렇게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경주가 가까운 건천에서 통학하는 친구도 있었으니 그 친구는 3시간 이상 걸려서 등하교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집에서 좀 늦게 나오다 보면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뛰어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기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금호역 쪽에서 오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부터 하양역까지 숨이 턱에 차도록 뛰었습니다.
그래도 기차를 놓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긴 시간을 기차 안에서 보내니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습니다.
당시는 학교가 일류 이류등으로 나눠지던 시절이었습니다.
소위 3류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 가운데는 싸움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간혹 패싸움이 벌어지면 기찻칸은 활극 무대가 되곤 했습니다.
영화 '야인 시대'에 나오는 장면처럼 날아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기억이 희미하긴 하지만 통학역별로 세력권이 있어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싸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찻칸은 이들의 왕국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차 안에서 술을 마시거나 남녀 학생들끼리 민망한 추태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살벌한 풍경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학교 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다니다 보니 남녀 학생들 간에 야릇한 미소가 오가기도 했습니다.
서로 다른 역에서 타는 남녀 학생 사이에 묘한 감정이 싹트면 서로가 무언 중에 어느 칸에 탈지를 알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괜히 그 칸만 아침마다 지나가게 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신기하게도 주변 학생들이 누가 누구를 찾아왔는지 알게 됩니다.
감기와 사랑은 감출 수 없다고 하는 말이 맞습니다.
한마디 말도 안했지만 다들 알게 됩니다.


같은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하던 내 친구 중에는 머리가 아주 좋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시험기간이 되면 나같은 사람은 밤을 세워 공부해도 성적이 시원치 않은데 그 친구는 공부하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등교하는 기차 안에서 그날 시험 볼 내용들을 교과서로만 공부하고 시험을 봐도 전교 최상위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졸업하고 이 친구는 학교 추천으로 좋은 은행에 무시험 합격했습니다.
당시에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하면 굉장한 출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학교에 도착하면 수업 전 이른 시간이어서 기차 노선별로 야구 시합을 하기도 했습니다.
경주에서 올라오는 기차와 부산에서 올라오는 기차 그리고 김천에서 내려오는 기차가 다 대구역을 통과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친했던 친구로는 청도 에서 오는 김준*이 있습니다.
현재 대구에서 아주 유명한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지요.
우리는 함께 탁구를 무던히도 많이 쳤습니다.
이 3개 노선의 학생들이 학교에 일찍 등교하니까 운동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대구 상고는 야구를 아주 잘 하는 학교였습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기억하고 있겠지만 지금은 고인이 된 장효조가 내 고등학교 1년 후배입니다.
이 후배는 정말 열심히 연습한 연습벌레였습니다.
우리가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이 후배는 다른 친구들이 다 하교한 후에도 혼자 남아서 배팅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우리 나라 최고의 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대구상고와 경북 고등학교가 당시에는 전국적으로도 최대의 라이벌이었습니다.
아직 프로 야구가 없던 시절이어서 고등학교 야구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학교가 황금사자기등  전국 대회 3관왕을 했고 그 전 해에는 경북고가 전국 대회 4관왕을 했습니다.(내 기억에 오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72~73년 무렵에 대구의 두 고등 학교가 전국을 제패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나는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불었습니다.
우리 학교가 우승하면 시가 프레이드를 하다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북고 정문 앞에 가서 한참동안 연주를 하고 응원가를 부르고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경북고가 우승하면 당연히 반대 현상이 일어났지요.


당시 우리 학교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제일 여상도 실업계 학교로서는 가장 좋은 여자 고등학교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와 이 학교 학생들 사이에 간혹 로맨스도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와 대구역 사이에 중앙통과 동성로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여기가 대구에서는  가장 번화한 거리였습니다.
이곳에는 대구 백화점도 있었고 극장도 있었고 고급 양복점들도 줄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기억 가운데 하나는 이 길에 고급 제과점이 있었습니다.
당시 내 사정으로는 그런 비싼 가게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빵집 앞을 그렇게 오래 지나다녔지만 결국 한번도 이 집 빵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특별한 사람들만 가는 곳으로 생각하며 지나다녔습니다.


지금은 우리 나라가 이만큼 살게 되어서 빵정도는 많은 사람들이 큰 어려움없이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참 감사한 일입니다.



졸업 후에 갈 길들이 달라서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거의 연락이 끊어졌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활기차고 자신감 넘쳤던 시절이 바로 이 때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