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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장릉 19-10-23 본문
위키 백과에 의하면
장릉(章陵)은 조선 시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그의 비 인헌왕후 구씨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소재지는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 141-1이다. 문화재청 장릉지구관리소에서 관리·보호 및 관람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2호로 지정되었다.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의 무덤이다.
인조반정(1623)으로 아들 능양군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인조 10년(1633) 원종의 칭호와 함께 그의 무덤을 장릉으로 불렀다.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있는 쌍릉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보호석만 둘렀다. 무덤 아래에는 영조 29년(1753)에 세운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부左)’라고 새긴 비각이 있다.
이 자리는 본래 인조의 어머니 계운궁 연주부부인(啓運宮 連珠府夫人) 구씨(인헌왕후)가 사망하자 그의 묘소인 육경원(毓慶園)으로 조성된 곳이었다. 다른 곳에 있던 정원대원군의 묘소에는 흥경원(興慶園)이란 이름을 올렸는데, 육경원을 조성하고 이듬해 흥경원을 이장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쌍분을 조성하였다.
1632년 정원대원군과 계운궁이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정통성에 시비가 생겼다.
선조의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자 한편에서 적자가 아니라고 시비가 일
었다.
즉 인조는 선조의 손자로 왕위를 계승해야 하며 그 사이가 비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래서 인조는 자기가 왕이 되자 선조의 셋째 아들인 아버지가 대원군이 되고 후에 그를 원종으로 추증하고
정통성을 확립했다.
그래서 선조 - 원종 - 인조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천원지방의 사상에 따라 4각형 연지에 둥근 섬이 있다.
장릉章陵(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위치 :경기 김포시 장릉로 79
능의 형식 :쌍릉
능의 조성 :1626년(인조 4), 1627년(인조 5), 1632년(인조 10)
능의 구성
장릉은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장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원종, 오른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비각 안에는 한 기의 표석이 있는데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세운 표석이다.
비각 옆에는 육경원(毓慶園, 인헌왕후의 추존 전 원의 이름)으로 있을 때 사용한 비석 받침돌이 장릉 근처에서 노출되어 발굴 후 전시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만이 둘러져 있는데, 이는 원종이 왕으로 추존 되기 전 흥경원을 조성할 때의 호석이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는 원종이 왕으로 추존된 이후에 새로 설치한 석물이다.
능의 역사
1619년(광해군 11)에 선조의 왕자 정원군(원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1623년에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원대원군으로 추봉되고, 1626년(인조 4)에 계운궁 연주부부인(인헌왕후)이 세상을 떠나자 김포 성산에 육경원을 조성하였다.
이때 정원대원군의 원의 이름을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이듬해인 1627년에 흥경원을 육경원으로 천장하면서 원의 이름을 흥경원이라 하였다가, 1632년(인조 10)에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이때 능을 왕릉제도에 맞게 새로 조성하였다.
원종(元宗) 이야기
원종(재세 : 1580년 음력 6월 22일 ~ 1619년 음력 12월 29일)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로 1580년(선조 13)에 경복궁 별전에서 태어났다.
1587년(선조 20)에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선조를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원종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 선조를 모시면서 험난한 일을 겪었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음에도 의연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모두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중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전란의 한가운데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원군(원종)을 영변으로 데려가 왜적을 피하도록 하였다.
그 때 정원군이 영변에 이르러 울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온 것은 내가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임금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왜적의 형세가 날로 성하고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죽음과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간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는 이를 전해듣고 가상히 여겨 정원군을 다시 불러왔으며, 그 뒤로 정원군은 선조 곁을 떠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옆에서 모셨다고 한다.
광해군 즉위 후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가 셋째 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로 인하여 커다란 옥사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지에서 자결하였고, 정원군은 그의 화병으로 1619년(광해군 11)에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으로 첫째 아들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사친으로 정원대원군에 추존되었으며,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정통성 문제로 인해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인헌왕후(仁獻王后) 이야기
인헌왕후 구씨(재세 : 1578년 음력 4월 17일 ~ 1626년 음력 1월 14일)는 본관이 능성인 능안부원군 구사맹과 평산부부인 신씨의 딸로 1578년(선조 11)에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에 선조의 아들 정원군(원종)과 가례를 올려 연주군부인에 봉해졌다. 원종 사이에서 3남(인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낳았다.
1623년(인조 1)에 첫째 아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연주부부인에 책봉되고 계운궁(啓運宮)이라는 궁호를 받았다.
이후 1626년(인조 4)에 경덕궁(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1632년(인조 10)에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자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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