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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한경직 한숭홍저 북 코리아 2007 228쪽 ~12.24 본문

독서

한경직 한숭홍저 북 코리아 2007 228쪽 ~12.24

singingman 2023. 3.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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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목사님의 일대기.

한목사님은 평안도 간리라는 시골에서 가난한 집안 아들로 태어났지만 복음을 받아들여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이 되셨다.

선교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 당시에 이미 미국 유학을 했고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있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이 책을 읽기 전 군에 있을 때 영락 교회 교인에게서 한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얘기들이 다 사실이었고 진심으로 존경할만한 분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유학 당시 폐병으로 죽을 줄 알고 조국을 위해서 3년만이라도 봉사하고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 은혜로 완치되고 평생을 건강하게 목회하셨다.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분이었지만 목회현장에서 그 능력과 달란트를 유감없이 발휘한 분이다.

6살에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12살에 3살 위의 김찬빈이라는 이웃 마을 여인과 결혼했다.

총명해서 소학교를 한 학녀 월반해서 마치고 정주 오산 중학교에 입학해서 여기서도 성적이 좋아서 바로 2학년으로 입학했다.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에서는 엠포리아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폐병으로 죽을 줄 알았지만 고국에 돌아와서 신의주 제 2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고 일제 시대에는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과 고문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신은 신사참배한 죄인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공산당을 피해 월남했고 영락교회의 전신인 베다니 교회로 목회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활동은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전도와 봉사와 교육에 힘을 쏟는다.

숭실대학과 영락중고등의 교육기관과 전쟁 고아들과 미망인들을 돌보는 기관도 설립한다.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대표적인 목사로 알려지면서 뚜렷한 업적들을 남긴다.

하지만 그의 검소함과 청빈함은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영락교회는 그의 신학과 삶이 만들어낸 교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