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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한명기 푸른 역사 2009년 544/583쪽 ~7/2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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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한명기 푸른 역사 2009년 544/583쪽 ~7/26

singingman 2023. 6. 1.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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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으나 호란 이후 청에 대한 적개심이 강해졌다.
하지만 명나라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해진 후금에 대항할 힘이 인조 정권에는 없었다.
재조지은을 상용구로 읊지만 결국 청에게 항복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도륙되고 수만에서 50만에 이르는 포로를 청나라로 보내야 했다.
한편 왜와 협력해서 청을 견제하려는 생각도 일부 있었지만 청의 감시 때문에 이것 역시 쉽지 않다.
정묘호란은 조약을 맺음으로 어느 정도 피해갔지만 조약을 성실히 지키지 않다가 병자호란에서 된통 당하고 인조는 삼배구고두례까자 행하는 항복의식을 치른다.
부산에 와 있는 왜관은 조선의 정보를 일본으로 보내고 기회를 봐서 경제적인 실리를 챙기려 한다.
쓰시마가 왜의 정책이나 입장을 대신 전달하기도 한다.
가도에 있던 모문룡은 명의 장군이지만 사욕만 채우다가 원숭환에게 죽고 원숭환도 환관들의 모함으로 죽는다.
가도의 모문룡이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는데 한 구실이 되기도 했다.
가도는 평안북도 철산군 철산반도 아래 있는 섬이다.
강홍립은 명을 도와 청을 치라고 보냈지만 청에 투항하고 만다.
청에 포로로 잡혀간 피로인의 소환문제와 탈출한 사람들을 잡아서 돌려보내라는 청의 요구는 조선 조정을 어렵게 만들었고 되돌아온 부녀들은 정절을 잃었다고 이혼을 당하기도 했다.
포로 송환은 결국 국가가 못하고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서 돈 있는 사람들은 돌아오기도 했다.
호란 당시 조선은 명에 대하여는 부자관계, 청에 대해서는 형제 관계를 설정해서 명에 대해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청을 오랑캐로 보면서도 힘에서 밀리니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이 청에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든지 인조를 청으로 소환하겠다든지 하는 식으로 협박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신하면 다른 방비를 안 해도 왕은 안전할 줄로 생각했지만 이미 청은 이때 믕에서 귀순한 이신들을 통해 홍이포와 수군을 가지게 되어서 방비도 없는 강화도를 함락시키는 것은 아주 쉬웠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해 있을 때 다른 왕족들은 강화도로 피해 있었는데 당시 강화도 수비를 책임진 김경징은 아무 준비없이 청이 강화도를 정복할 수 없다는 근거없는 자신감만 가지고 있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해서 인조가 보위에 오르고 다음 해인 1624년에 이괄의 난이 있어서 위태했지만 다행히 진압하고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난다.
후금도 명과 가도에 있는 모문룡 때문에 깊숙이 쳐들어오지 못하고 화약을 맺어 다행히 지나가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가 자신감이 생겨서 남한산성에 피해있는 인조를 공격해서 인조가 항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