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중심의 세계사에서 한발 물러나서 세상을 바라보면 르네상스는 서양만의 산물이 아니고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와 중동의 이슬람 지식이 더해져서 이루어 졌다. 저자는 세계를 동서양으로 2분하지 않고 동반구 중반구 서반구로 3분해서 설명한다. 중반구는 지중해 오른쪽에서 중국 서쪽 까지 즉, 지금의 이슬람 지역인 중앙아시아의 ~스탄 땅이고, 유럽이 서반구, 중국과 그 오른쪽 그리고 동남아를 동반구로 분류했다. 그리스 로마의 지식은 중세의 암흑기 동안 서양에서는 거의 사장되어 있었지만 이슬람 세계는 방대한 이 책들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공부하면서 800년에서1,500년 사이에 아랍의 문화나 지식은 세계 최대의 것이 되었다. 중세 기독교는 철학이나 자연 과학이 신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리스의 귀중한 철학이나 자연과학 자료들을 무시해서 유실되거나 심지어는 불태우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 이슬람 세계가 이 책들을 번역해 두었기 때문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었다. 안티오크가 번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븐 시나는 이 번역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쿠란을 통째로 다 외우고 있었다.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은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육.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무슬림은 이슬람 문화를 동서로 퍼뜨렸고 1258년 몽골이 세상을 휩쓸기 전까지 이슬람 학문과 과학이 서반구에 전파되어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 751년 당나라의 침략에 맞선 압바스 군대의 살리히 장군이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 장군의 당나라를 물리쳤다. 11세기에 십자군 전쟁으로 이런 지식이 다시 서방으로 전달된다. 십자군 전쟁은 1096년에서 1270년 까지 7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낙후되고 무질서하던 서반구가 십자군 전쟁으로 중세의 오랜 암흑 시대를 청산하고 근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아랍어로 된 지식들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해서 수입해 갔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톨레도가 중심지였다. 15세기 말 유대인과 무슬림이 스페인에서 추방될 때 이들이 지식을 서반구의 수도원이나 도서관에 전달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다른 나라의 도서관들이 수백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는 것에 비해 세계 최대의 도서관으로 40만권(60만권 설도 있음) 이상의 책을 보유하고 있었다. 13세기 몽골의 서방 침략도 유목민의 지식뿐만 아니라 중국의 정보와 지식을 서방에 전달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개빈 멘지스의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정화 함대는 콜롬부스 이전에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남극과 북극을 방문했다고 보여진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롬부스나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의 해도도 정화 원정대가 남긴 해도를 바탕으로 서양인들이 세계 해도를 만들고 그것으로 항해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모사라베(mozarabe)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아랍어를 배우고 문화를 수용한 가독교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유럽에서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로부터 헬레니즘 문화를 이어받아 라틴 문화를 생성했고, 서아시아 아랍인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해 이슬람 문화를 창조.발전시킨 후 다시 그 혼합문화를 유럽에 이전해 근세 서반구 문화의 부흥을 촉발시켰다.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동방 제국은 헬레니즘 세계를 통해 사상 처음으로 유럽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게 되어 상호교류했다.
흉노가 돌궐족 보다 먼저 있었고 돌궐이 흉노를 계승했다. 페르시아어는 오늘날 이란, 아프가니스탄,타지키스탄에서 사용한다. 소그드족은 기원전 6세기~기원 후10세기 까지 약 1,500년간 존속한 이란계 민족이다. 사마르칸트,부하라 등의 도시를 세웠다. 국제 무역에 종사했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의 비옥한 자라프산 계곡을 거주지로 삼았고 시르다르야와 아무다르야강 사이의 트란스옥시아나에 위치하고 있었다. 호라산에서 중국 본토에 이르는 실크로드상에 식민도시들을 건설해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알렉산더가 소그드 지방 영주인 옥스야르테스의 딸 록산느와 결혼했다. 조로아스터교가 공식 종교였지만 불교도 성행해서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했다. 중국 사료에 강씨 성을 가진 승려들이 대부분 소그드 출신이다. 소그드를 중국에서는 강국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소그드 문자는 위구르족이 사용했고 오늘날 내몽골은 이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당나라의 이태백이 소그드인이라는 설도 있다.
흉노는 중국 북방 초원 지대의 유목민으로 여러 부족들을 망라한 집합체다. 흉노에게 밀려난 월지가 아프가니스탄쪽으로 이동하여 인도를 제압하고 그곳에 쿠샨 왕조를 세웠다.
월지와 동맹을 맺으려고 출발한 장건은 흉노에게 붙잡혀 10년을 보낸 후 탈출하여 월지에 갔지만 월지는 이미 흉노에 대한 원한을 잊었다. 하지만 장건의 풍부한 여행 경험 덕에 한나라는 흉노를 정벌할 수 있었다. 그의 여행길이 후에 실크로드의 일부가 된다. 흉노가 재건한 후 반초가 다시 서쪽으로 가서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실크로드의 재건에 힘썼다.
반초의 부하 감영도 서쪽으로 가서 흑해까지 갔다 왔다. 고구려인 후손인 당나라의 고선지 장군은 파미르 일대를 탐사했다. 파미르 서쪽에 있는 사마르칸트와 타쉬겐트까지 갔다. 탈라스 전투는 751년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접경인 아틀라흐에서 고선지 장군과 카를룩의 7만 대군이 아랍계 압바스 왕조의 3만 대군과 함께한 연합군과 싸웠지만 카를룩의 배신으로 고선지군이 대패했다. 이때 아랍군에게 잡힌 당나라 군사들을 통해 이슬람으로 제지술이 전해졌다. 탈라스 전투는 중국과 이슬람의 대결이고 문화 교류였다. 마르크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의하면 서반구에서는 지폐 사용이 1715년에 시작되었지만 동반구에서는 쿠빌라이 칸 때인 1,200년대에 이미 사용되었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은 제지술,화약,인쇄술,나침반이다. 1304년에 마르코 폴로보다 50년 정도 뒤에 태어난 아프리카 모로코 출신 이븐 바투타도 해양실크로드를 통해 당시의 전 세계를 여행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이븐 주자이가 원문을 약간 윤색했고 원문은 사라졌다.
1253년 프란체스코파 수도사 루브룩 출신의 윌리엄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허락을 얻어 몽골을 방문했고 이때 한국을 카울리(kauli)라는 이름으로 서구에 처음 소개했다. 키타이 카세이는 북방 유목민에게 전해진 중국의 이름이다.
르네상스 유럽 상류층의 중국 취향을 쉬누와즈리(chinoiseries)라 하며 도자기가 중요한 요소다.
서양 문명은 크레타 섬에서 시작하여 그리스 로마를 거쳐 비잔틴 제국의 문명까지 발전하다가 중세 암흑기를 거쳐 이 기간 동안 침체되어 있었지만 이슬람 지역이 그 문명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켜서 다시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쪽으로 보내고 이슬람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할 때 서양의 수도원이나 도서관등으로 지식들이 다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