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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사계절. 2021년 초판 12쇄 266/308쪽 ~08.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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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사계절. 2021년 초판 12쇄 266/308쪽 ~08.16

singingman 2025. 8. 16.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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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진보적인 사람인 것 같고 우리 사회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글들이 몇 군데 있다.

소비는 도취의 힘을 갖고 있다. 소비는 매혹적이다. 한편의 잘 만들어진 상업 영화를 소비할 때 우리는 잠시나마 세상의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맛있는 음식은 미각세포를 즉각적으로 흥분시키고 마음에 드는 옷 한 벌은 피부의 세포들을 자극해 황홀경으로 이끈다. 하지만 소비는 풍요를 약속하는 듯해도 또 다른 소비로 이어지는 채워지지 않는 밑빠진 독과도 같다.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욕망이다. 한다 욕망은 채울 수 있다는 기대로 포장된 유혹이다. 욕망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혹은 채워질 것 같은 그 순간 또 다른 욕망으로 치환되기 때문에 욕망에 저당잡힌 인생의 행로는 끝이 없다. 욕망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는 소비 주의에도 세속적 성공에도 없다.

진보주의가 가르치는 말투를 유지하는 한 상식을 이용하되 상식의 잘못된 점은 문제 삼지 않는 대중문화와의 싸움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다.
상업주의와 보수주의자들이 대중의 상식을 기막히게 이용하는 능력들을 갖추었다면 지식인과 진보주의는 상식을 대체할 양식을 훈계의 어투로 늘어놓는 능력만 갖고 있을 뿐이다.
말투의 차이로 인한 설득력 때문에 올바른 내용일수록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지독한 역설이 벌어진다.

대중의 상식과는 유리된 지식인들은 양식이라는 선한 앎이 냉철한 이성과 풍속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여긴다.
그래서 양식을 전달하는 필독서의 어투는 냉정하고 분석적이며 중립적이지만 정서적이지는 않다. 필독 리스트에 올라있는 대부분의 책들은 훈련받은 전문적인 학자나 읽을 수 있는 어투를 구사한다. 앎은 지식과 이해와 느낌의 결합체이다. 이해되지 않는 지식, 느낌을 전달하지 못하는 어투로 말하는 지식은 지식 그자체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양식을 말하는 진보주의와 지식인이 이런 태도를 유지하는 한 정당한 말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외면받는다.
"우익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에게 말하고 있고 좌파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물에게 말하고 있다."

놀이는 노동과는 목적이 다른 행위다. 놀이의 최종 목적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다. 놀이는 현실 도피를 꾀하지도 않는다.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말 그대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의 자발적 행동인 놀이는 자기만족 지향적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자발의 특징 하나만으로도  놀이는 자연의 과정과는 구별된다. 놀이하는 인간인 호모 루덴스는 이득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걸고 명예를 얻기 위해 놀이한다. 상금을 따려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프로 선수와 달리 고대 올림픽의 우승자는 경쟁 놀이에서 승리하면 부상으로 고작 월계관을 받았지만 그 월계관은 상금으로 환산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월계관은 우승자라는 명예로운 표식이기 때문이다.

강제에 의해 억지로 해야 하는 행위를 하며 신바람이 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누구나 억지로 하는 일은 하는 시늉만 내지 자신이 하는 활동에 대한 애착도 긍지도 몰입도 없다.
하지만 자신이 원해서 행하는 일을 할 때 사람은 돌변한다.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할 때 동작이 굼떴던 사람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며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던 사람도 하룻밤 쯤은 거뜬히 지새울 수 있다. 그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자발성이다. 본래 취미는 귀족의 놀음이다. 취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특권 세력이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취미는 귀족적 활동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취미 인간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19세기 취미 인간이 댄디나 보헤미안의 이미지였다면 디지털 시대의 취미인간은 때로는 긱스(Geeks)나 오타쿠로 또는 폐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귀족적 풍모를 지닌 취미 인간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들이 디지털 시대의 취미 인간임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21세기의 취미 인간이 20세기의 취미인간과 동일한 외양을 지니기를 기대한다면 그건 어리석다. 시대가 바뀌면 취미 인간의 모습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씨의 사망 사건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분신정국이 시작되었다. 전남대생 박승희(4월 29일), 안동대생 김영균(5월 1일), 경원대생 천 세용(5월 3일)의 분신에 이어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선(5월 8일), 노동자 윤용하(5월 10일), 시민 이정순(5월 18일), 노동자 정상순(5월 22일)의 분신이 뒤를 이었다.
하나의 자살에만 집중하면 우리는 자살의 원인을 알기 위해 그들이 남긴 유서를 살펴야 한다. 하지만 개개의 자살을 이어 하나의 별자리를 그리기 위해서는 한 개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로 눈을 돌려야 한다.




항상 젊을 수는 없다. 영원히 살 수도 없다. 나이듦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는 살면서 매우 짧은 시간만 젊음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인생에선 젊지 않은 시간이 더 길다. 그렇기에 젊음의 사멸을 유예하려는 애달픈 시도보다 원숙한 노년에 대한 준비가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인생의 젊은 날들과 이별한다. 그리고 과거라는 이름의 지나온 날에 비해 미래라는 다가올 날의 길이가 짧아지는 순간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인생의 추분점에 도달했지만 인생의 하지만을 그리워하며 지난 세월을 되돌리려는 노스탤지어의 가련한 몸짓은 허무함만을 남긴다. 모든 노인이 추하지는 않다. 나이 듦의 가능성을 알지 못하고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돈과 지위 자랑질에 몸을 내맡긴 노인은 추하다. 하지만 어떤 노인은 아름답다. 얼굴의 주름이 아니라 지혜가 먼저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삶의 리얼리티와 용감하게 대면하며 좋은 삶을 위한 공격과 방어의 기술을 익혔기 때문일 것이다. 원숙한 노인의 얼굴은 인생의 동지에서도 달빛 아래 오히려 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