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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굿바이클래식 조우석 동아시아 2011년 초판 4쇄 312쪽 ~08.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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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클래식 조우석 동아시아 2011년 초판 4쇄 312쪽 ~08.22

singingman 2025. 8. 22.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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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은 죽은 음악이고 권위적이고 한물 간 음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내 생각은 클래식은 클래식대로 좋고 다른 음악은 또 다른 음악대로 좋다.
지금 클래식에 매달리는 것은 '끝물의 폭탄 돌리기'라는 저자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저자는 한때 클래식 매니아였다고 하며 그후 째즈 음악에 심취했고 지금은 월드뮤직을 좋아하는 것 같다.
취향의 문제인 것 같은데 클래식을 너무 나쁘게 평가하는 것 같아서 읽기 불편한 부분도 있다.
저자는 또 오디오를 통해 듣는 음악에도 심취했던 것 같다.

이런 말도 한다.
" 곱고 예쁜 음악 클래식은 사람 정서의 표피만을 간지럽힐 뿐이며 따라서 음악을 듣는 사람의 몸뚱이 전체를 흔들어 놓을 힘이 없다는 것은 나름대로 간파한 것이다. 물론 예전 한때 통한 것도 사실이다. 그것도 인간 정서의 하나임은 분명하니까 하지만 '곱고 예쁘지만 내용 없는' 외로움의 감정을 반복해 키운다고 해서 어느 순간 큰 음악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이란 평균율 분할로 얻어진 곱고 예쁜 사운드와 그것 사이의 화성에서 빚어지는게 전부가 아니다. '클래식의 죽음'을 전후한 논의 과정에서. 사람들이 그걸 집단적으로 깨우친 것이다."

클래식, 즉 18세기 전후에 가꿔온 모더니즘 음악은 철두철미 서구적 이성, 로고스 중심주의 하늘 아래서 자라난 결과물이다. 정수순화, 두뇌 발달은 커녕 태생적으로 공격적 요소를 깊숙이 숨기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 대단하다는 베토벤의 9 번 교향곡 제 1 악장을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들려줬더니 모두 기겁을 하고 도망쳤다는 문화인류학 보고서도 있다. 낯선 음악이 느닷없이 큰 사운드로 달려와서 겁을 먹었을까? 아니다. 그럴 때 호기심을 보이며 의자를 앞당겨 앉을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도망쳤단 말인가? 아무래도 베토벤 음악을 포함한 클래식 작품의 리듬과 멜로디 화성에 자아내는 폭력적 광기에 본능적으로 질렸다고 봐야 한다. 티끌 하나 묻지 않았고 순수하다는 이성적인 클래식은 뜻밖에도 엄청 살벌하다는 얘기일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추측은 어떻게 할 수 있지?)

모더니즘의 대표적 성향과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과거의 역사와 문화 전통에서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둘째, 완전한 예외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셋째, 그 구조는 다분이 아카데믹한 엘리트 의식에 근거해야 한다.
넷째, 편집증적일 정도로 깊고 어려운 내용을 갖고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련되면서도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예술이 반드시 그래야만 할까.
제 아무리 모더니즘 예술이라고 하지만 예술이라는게 꼭 '완전한 새로움', '아카데믹한 엘리트 의식', '편집증적일 정도로 깊고 어려운 내용'을 가져야만 할까.
즉 예술은 그토록 이성적이라서 콕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아야 할까?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그 뿌리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물 - 존재의 전체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육체 이전의 그 어떤 정신이라는 것, 사물 이전에 그걸 가능케 하는 어떤 실체를 따져야 직성이 풀리는 놀랍도록 강박적인 태도....
(공감할 수 없는 글이다.)

음악이라는 큰 우주, 큰 종교의 집안에서 많은 신의 하나로 클래식의 성격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는 셈이다. 3위일체 중 다리 하나가 휘청거리는 통에 급작스레 무너지고 있는 대상이 바로 성부( 위대한 작곡가들)와 성자(정전지위의 불멸의 작품들)라는 개념이다. 이 두 가지가 과연 여지껏 안녕하신가는 다음 글에서 짚어볼 사안이지만 어찌 됐던 클래식 음악의 가장 커다란 특징인 작곡가 중심 주의와 악보 중심주의는 지구촌 동서고금에 유별난 것이다.
그동안 세상의 모든 음악은 작곡가에 앞서 연주자가 중심이 돼 움직였다는 것이고 음악의 그림자인 악보에 매달리기 이전에 즉흥음악을 포함해 현장에서 행위가 먼저였다. 그게 음악의 상식이다. 즉흥무대는 일단 자유롭고 흥겨웠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생산성도 뛰어났다. "악보는 연주에서 늘 중심적이었던 것은 아니며 오늘날과 같이 신성하고 변경할 수 없는 최종적인 텍스트로 여겨진 것도 아니다. 17세기에 오페라가 처음 폭발적 인기를 끌던 당시 즉흥 연주를 하는 관현악단에는 각 파트의 연주자들이 각자 무엇을 연주해야 할지 정확히 보여주는 총보조차 없었다. 단지 악곡의 뼈대만 있어 연주자와 가수들은 자기 파트를 적당히 창작해야 했다. - 크리스토퍼 스몰 뮤지킹 음악하기 242쪽
(이렇게 하는 것이 비효율적이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악보중심주의로 변했다고 생각한다.)

스몰에 따르면 18, 19세기 오페라에서 연주자들이 악보를 수정하고 삭제하거나 심지어 한 장면 전체를 끼워넣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장에서 밥 먹듯이 일어났다. 어느 정도였을까? 유명 가수들은 원래의 아리아 대신 자신이 가져온 새 아리아를 부를 수도 있었다.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이 있다. 20세기 초반까지도 연주회장의 연주자들은 악보 앞에서 꽤나 그드름을 피웠다. 그것은 당시 연주자들의 기질이나 오만한 태도를 말하는 것 훨씬 이상의 의미를 함축한다. 그들은 오랜 습관대로 연주자 먼저 악보 나중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자신들이 음악 행위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실제로 20세기 중반 이전 연주자들의 오래된 음반을 조금이라도 들어보면 연주 자체가 인간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물론 장식적 요소 역시 풍부함을 알 수 있다. 트릴이나 장식음을 넣고 옥타브 음정과 3도 음정의 겹음을 덧붙일 뿐 아니라 몇 마디 정도는 임의로 바꾸거나 카덴차를 슬쩍 끼워넣기도 했을 정도다. 클래식 초기의 연주자들의 전통을 알게 모르게 이어받아 자유자재로 놀았다.(이렇게 하는 것이 좋았으면 지금도 그렇게 하겠지만 좋지 않아서 현재처럼 변했다.)

모차르트는 1815년에 쓴 편지글에서 "거의 완성된 형태로 내 마음 속에 악상의 멜로디가 서 있어서 나는 회화나 조각상을 보듯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고 종이에 옮겨 적었다"고 털어놓았다. 그것이 천재성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며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려 왔다.
모차르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물증은 베토벤이 남겼다는 닮은 꼴의 말이다. 베토벤의 후배 작곡가 루이 슐뢰서의 글에 담긴 대목이 문제의 증언이다.
"나는 오랫동안 악상을 오선지에 적지 않은 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마음에 담아둔 멜로디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그렇게 해서 완전한 모습을 갖춘 멜로디를 마치 주형이라도 뜨듯이 종이에 옮겼다 금새였다."
경이로웠다. 모차르트만이 아니라 베토벤도 그랬다면서 모름지기 모든 천재 작곡가들은 그러하다면서 무시무시한 천재성 앞에 사람들은 경건한 태도로 무릎을 꿇었다.
(이런 면도 일부 있었겠지만 베토벤은 악보를 무수히 고친 대표적인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는 곡이 마음에 안 들어 고치고 고치고 하다가 악보를  넘겨주기로 한 날짜를 어기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파블로 카잘스가 13 살이었던 1889년에 200년 동안 잠자던 악보뭉치(무반주 첼로모음곡)를 건져 올렸음을 보여주는 이 회고는 첼로 연주자 파블로 카잘스의 "로또 당첨" 소식을 들려준다.
보통은 카잘스란 첼로 연주 거장을 찬탄하지만 바흐 악보 발견이라는 공적까지 그에게 더해진다. 누구나 그를 현대 첼로 주법의 완성자, 독주악기로서 첼로가 갖는 위치를 확립한 인물로 평가한다.

현재까지도 이 바흐 열풍이 식을 줄 모른다. 연주회장 뿐만 아니라 음악 교육, 미학적 문제, 일반 사람들의 교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이든부터 시작해서 모차르트, 브람스, 브루크너, 레거, 본 윌리엄스, 포레  드보르작, 베르디까지 모두 적건 많건 바흐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고음악의 재발굴, 음악사 연구, 원전악기의 재현등도 바흐 재발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음악사 상식대로 그를 발굴해 낸 것은 낭만주의 작곡가 멘델스존이었다. 익명 상태의 바흐를 끄집어내 우리 시대에 등극시켰던 일등 공신이다. 사실 1800년경 바흐의 음악은 아주 일부만이 알려져 있었다. 생전에 출판된 것은 주로 클라비어와 오르간 곡들이었고 이마저도 절판된지 오래였다. 몇몇 필사본들이 교육용으로 사용되었고 연주를 위한 연주라고는 전무했다. 교회에서 주로 사용된 그의 음악 전체가 연주되지도 않은 채 잊혀져 왔을 뿐이다. 그러던 중 멘델스존이 1829년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듣도 보도 못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물론 애호가들에게 바흐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하지만 눈썰미 있는 이들은 꽉 짜인듯한 수난곡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이 대단하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때는 시골 출신 바흐가 죽은 지 벌써 8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을 때였다.

유럽 최초의 전문적인 직업 오케스트라가 탄생한 것은 1842년 빈 필하모닉이다. 빈필 창립 몇 달 뒤에 신대륙 미국에서 뉴욕 필하모닉이 창단됐다..

공개 연주와 함께 입장료를 챙기는 방식의 상업주의적 연주 공간으로 처음 생긴 것은 콘서트홀에 앞서 오페라 하우스였다. 볼거리로 더욱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163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개관한 오페라 하우스가 원조다. 제한된 관객들을 모아 귀족들의 음악회와 구분하여 자기들끼리의 음악 행위를 시도한 서구 콘서트홀 문화의 첫발이었다.

"나 예술이거든" 하는 "음악 공주병" 혹은 헛바람이 들기 이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춤곡에만 충실했던 스윙 시대의 재즈, 따라서 이후발달한 비밥 재즈에 비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친근하던 재즈의 초기에 대한 증언이 놀라운 것은 이 대목에서다. 시끌벅적한 무도회장 연주가 이후 콘서트홀에서 정장 차림으로 듣던 연주보다 더 생생한 것은 물론이고 연주 수준 역시 뛰어났다는 지적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재즈에서 원작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완성시켜주는 것은 뮤지션이다. 재즈의 생명은 연주에 있다는 것이 그들의 음악적 태도다. 원작은 원작이고 그 위에 보다 다양한 연주행위를 가미하면서 다양성을 확보하는 유연한 전략이기도 하다. 아니 '음악의 그림자'인 악보만을 보면서 음악을 익힐 경우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서 경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주 먼저, 작곡 나중의 보편적 질서가 재즈의 경우 음악을 배울 때 악보에 의존하기보다는 차라리 레 코드를 듣는 것이 연주의 뉘앙스를 포착하고 익히기 좋다고 여길 정도다. 물론 연주회 현장이 더 좋겠지만....

오디오시스템에서 스피커, 앰프와 주변 기기를 합한 시스템에 수억원을 호가하는 모델이 꽤 된다. 앵간하다 싶으면 하이엔드급 단품하나에 1000만원이 훌쩍 넘는다. 요즘 인기 브랜드가 오디오 리서치인데 이 회사 파워 앰프 중 최고 모델은 소비자 가격이 6000만원대 프랑스 JM 랩 스피커의 톱 모델 그랜드 유토피아는 7000만원 대다. 내 꺼벙한  서재 겸용 리스닝룸에도 시가 1억원을 훌쩍 넘기는 몸값을 자랑하는 '에지'의 프리 파워 앰프가 들어왔던 일이 있다.

조르디 사발이란 유명한 정격 음악(authentic music) 영화 감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