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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도자기, 세상을 바꾸다 김군선 민속원 2026년 413쪽 ~07.08 본문
신세계 그룹에서 유통일을 하던 저자가 퇴직하고 공부해서 도자기 전문가가 되었다.
우라 찬양대 임창균 집사님이 신세계 그룹 출신이고 이 분이 책을 주어서 읽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는지 역사적인 분야도 상당히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고려 시대 청자는 아주 훌륭한 당시로는 최고의 신문물 가운데 하나였지만 청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도료가 너무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워서 조선은 백자로 넘어가게 된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도공들을 붙잡아 가서 일본의 도자기를 크게 발전시키고 조선에서 천대받던 도공들을 후대해서 대를 이어 도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 도자기들은 당시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네델란드에 무역상들을 통해 유럽에 알려져 큰 인기를 얻게 되고 일본은 도자기를 판 돈으로 대포를 구입하고 해서 국력을 크게 키운다.
심수관, 이삼평등은 일본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조선은 성리학에 목매고 있어서 화려한 도자기들은 만들 생각도 않았고 사옹원과 분원에서 고급 왕실 도자기를 만드는데만 집중했다.
그리고 도공들에게는 제대로 물건값도 주지 않았고 뇌물만 받아챙기며 협박하기도 했다.
결국 조선은 도자기 산업이 해체되고 만다.
조선시대 달항아리 하나는 지금도 인기를 얻고 있다.
중국 오대산에 문수보살, 인도 보타산에 관세음보살이 머물듯이 우리 금강산에는 법기 보살이 머물고 있다고 전해져 왔다.
금강산 1만 이천 봉이라고 말하는 것도 법기보살의 권속 1만 2000명이 각기 하나의 봉우리에 머물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 중에서도 담무갈봉은 그 자체로 법기 보살이라 여겨 고려말 나옹 화상 등 고승들이 그곳에서 예경을 올렸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팔도를 연결하는 9개의 길이 있었다.
조선 시대 지리학자 신경준의 도로고에서는 경성 서북저 의주로 제일이라 하여 한양에서 북쪽 압록강변 의주까지 1080리(424km)길인 의주대로를 제일로 놓쳤다.
이는 중국을 오가는 사신 일행이 많이 다녔기 때문인데 그래서 연행로 또는 사행로라고도 불렸다.
한양 숭례문에서부터 홍재원~ 고양~ 파주 ~장단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의주대로는 당시 조선의 1번 국도인 셈이다.
2번 도로는 한양에서 회양~ 원산~ 북청 ~경성~ 회령 ~경흥을 거쳐 함경도 서수라까지의 길인 관북로(경흥대로)였다. 신경주는 이 길을 경성동북저 경흥로제2라 하여 의주대로 다음의 길로 치고 있다.
동국문헌비고에서는 두만강 하구에 있는 한반도 최북단 포구 서수라까지 총 길이 2429리 (954km)라 적고 있다.
조선 시대 시문에 능했던 이병성은 1712년 경제와 함께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쓴 순암집에 여정을 기록했다.
여기에는 정선 일행의 금강산 유람 경로가 나오는데 흥인문을 나서 수유리~ 다락원 의정부~ 축석령~ 송우리~안기역~ 만세교~ 운천~ 철원~ 갈말~ 갈현 ~김화를 거쳐 희양~ 철령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의정부에서 김화까지는 지금의 43번 국도와 일치한다.
신덕 왕후가 40살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이성계는 사랑하는 아내이자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던 그녀의 죽음을 무척 슬퍼했다. 신덕 왕후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정신적 물질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이성계는 강 씨 부인을 매우 의지했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큰 상실감에 빠졌다. 비록 조선이 유교를 숭상하는 국가였지만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파격적으로 도성 안에 묘를 만들고 사찰을 건립하는 등 불교 의식을 강행했다.
태조는 왕후의 능침을 경복궁과 가까운 황화방에 조성하고 근처에 강씨의 명복을 기원하는 사찰로서 흥천사의 건립을 지시했다.
건국초 억불 정책이 추진되던 시기였으나 조선 초기에는 여전히 불교가 백성들의 정신세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고 왕실 내에서도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태조는 개인적인 신앙심과 왕비에 대한 애정으로 유교적 기조 속에서도 불교적 요소를 수용했다. 당시 정릉의 위치는 현재 중구 정동의 덕수궁 옆 영국 대사관 자리이며 도성 안에 위치한 처음이자 마지막 능침이었다. 정동이라는 지명은 바로 정릉이 있었던 지역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조는 흥천사의 공사 현장에 거둥해서 인부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흥천사의 건설을 직접 챙겼다. 심지어는 홍천사가 완공되지 않았는데도 신덕 왕후의 기일재와 천도재 등의 법회를 열면서 공사에 정성을 기울였다.
태종 때 영의정 부사 성석린이 건의한 시무 20 조에는 각종 연회나 행사를 줄여 사치 풍토를 다스리고 검소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금은 그릇의 사용 금지령을 주장했다.
궁궐과 국가에서 쓰는 것을 제외하고 일체 사용을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면서 대체품으로 사기나 칠기를 쓰도록 했는데 이러한 시책은 도자기의 생산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불교의 화려한 채색 문화에 반하여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백자를 택한 것은 백색이 유교적 청렴과 결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종은 태조와 태종, 소헌 왕후의 위패를 봉안한 전각에서 사용하는 은그릇을 백자로 바꾸기도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세조는 중궁전이나 동궁과 같은 궁내에서도 금잔 대신 자기를 쓰게 했다.
술잔의 일반적 명칭으로는 배, 잔, 주발 등이 있고 국가 의례나 제사에서는 술잔은 작이라 하여 세 개의 다리가 있는 작은 잔이다.
종은 작보다 크며 주로 연회나 일상적인 음주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술잔을 다루는 방식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중국인들이 잔을 맞대고 마시는 대작을 즐기고 일본인들이 자기 잔에 스스로 따라 마시는 자작을 선호했다면 우리 조상들은 잔을 주고받는 수작의 달인들이었다.
여기서 수는 갚을 수, 보답할 수라는 뜻이며 작은 술따를 작이라는 것이다.
월급을 보수라고도 쓰는데 이때 수는 일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의미다.
수작이란 서로 술을 따라주고 받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수작의 본뜻은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춰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다는 상호적 관계의 미덕을 뜻한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 좋지 않은 일을 꾀하거나 엉큼한 속셈을 갖고 하는 말이나 행동을 뜻하는 부정적 의미로 변했다.
속된 표현으로 '수작 부리지 말라'는 이상한 생각이나 행동 음흉한 심보가 빤히 드러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평소 불교를 숭상하던 세조가 불경 간행을 논하자 술에 취한 정인지가 왕의 면전에서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연회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화가 난 세조가 다음 날 맨정신의 정인지를 질책했음에도 정인지는 사죄는 커녕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버텼다.
백미는 그해 가을에 버려진 양로연 사건이다. 환갑이 넘은 대신들과의 술자리에서 만취한 정인지는 급기야 임금의 면전에서 세조를 향해 너라고 부르며 모욕을 주었다.
조선사회에서 왕에게 너라 칭하는 것은 곧 반역이나 다름없는 대역죄였다.
조정은 정인지를 극형에 처하라는 상소로 들끓었다.
그러나 세조는 단호했다. 취중에 본심이 드러난 것이지만 훈구 공신이니 가벼이 죄를 물을 수 없다며 이를 일축했다.
사극 속 수양대군이 비정한 권력자의 상징이라면 실록속 세조는 지독하게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술잔을 통해 신하들의 마음을 읽으려 했던 고뇌하는 인간적 군주였다
성종이 총애했던 손순효는 병술을 마시던 애주가로 임금 앞에서 여러 차례 취중실수를 저질렀다.
대신들의 탄핵과 경질 요청이 있었고 본인도 간곡히 사직을 청했으나 그때마다 성종은 관대하게 그를 감쌌다.
성종은 술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손순효에게 은잔을 하사며 이 잔으로 하루에 세 잔만 마시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도 손순효는 술에 취해 있는 날이 많았다.
성종은 처음에는 손순효가 어명을 거역한 줄 알고 노하였으나 알고 보니 그는 임금이 내린 은술잔을 얇게 펴서 사발 크기의 커다란 잔으로 만들어 술을 마셨던 것이다.
성종은 그의 재치에 크게 웃으며 나중에 내 소견이 좁아지거든 이 사발만큼 깊게 펴주기 바라오라 하며 더 이상 질책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대 대표적인 주당으로 윤회를 꼽을 수 있다. 학문적 소양이 뛰어나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대표적 문신이었는데 그와 관련해 전해지는 야사가 있다. 명나라에 보내야 할 중요 문서를 작성해야 할 사람으로 윤회를 급히 찾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간신히 그를 찾았지만 이미 만취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잘 썼기 때문에 세종이 크게 감탄하면서 그의 재능을 아꼈다.
윤회가 하도 술을 좋아하자 그의 건강을 걱정한 세종이 하루에 딱 세 잔만 마시도록 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런데 얼마 후 윤회가 만취하여 집현전 경연에 불참하는 일이 생기자 화가 난 세종이 윤회를 불러 어찌된 일인지 캐물었다. 윤회는 어명을 거역하지 않으면서도 술을 잔뜩 마시기 위해 평범한 술잔 대신 놋자배기 (항아리만한 놋그릇)에 술을 담아 석 잔만 마셨다는 것이다. 어명은 지켰지만 경연에 불참했으므로 벌을 받아야 했다. 만취 상태에서도 세종의 질문에 고사를 줄줄 외면서 정확하게 답하자 결국 세종도 웃으면서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대 도자기 생산지로 중국의 장시성 징더전 (강서성 경덕진)을 꼽는다.
중국 창난 일대에서 생산한 도자기는 내륙 운하를 통해 광저우와 같은 남부 항구로 운송하여 서양으로 수출하였다. 서양 사람들은 창난의 도자기에 열광하였고 그들에게 창난은 차이나로 들렸다. 서양의 상인들은 이곳에서 도자기를 구매하면서 창난에서 온 물건이란 의미로 차이 나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차이나는 도자기를 일컫는 보통 명사가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중국이 오랫동안 전 세계 최고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해 왔기 때문이다. 과거 서양에서는 중국을 통해 도자기를 접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도자기 자체를 생산국인 중국의 이름을 따서 차이나로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정교하고 아름다운 백자나 청자 같은 중국 도자기는 유럽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고가의 사치품으로 여겼다. 서양에서는 중국 도자기와 견줄 만한 수준의 도자기를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자기는 중국 제품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고 이는 곧 중국의 이름을 따 차이나가 도자기를 지칭하는 보통 명사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달 항아리의 가장 큰 매력은 순백의 아름다움이다.
조선의 17세기는 조선의 흑역사에 해당하는 시기다.
17세기 전반은 왜란과 호란의 양대 전란을 난을 겪으며 전국토가 유린당하고 왕조가 절멸의 위기를 가까스로 딛고 일어선 시기이다. 이후 17세기 후반은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가져온 경신 대기근과 을병 대기근이 덮쳐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생지옥과도 같은 암흑기였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이 힘겨웠으며 도자기를 만들 여력이 없던 때였다.
1697년 조선의 도자기 역사상 최악의 사건인 분원 사기장 39명이 굶주려 사망한 참극이 일어났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1931년 조선도자명고를 탈고한 뒤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조선식 장례로 조선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에는 한국의 산과 만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가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라는 글귀가 새겨진 묘비가 있다.
1995년 7월 관음원에 도둑이 들어 이 항아리를 들고 달아났다. 경비원들이 뒤쫓아가자 도둑은 항아리를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도주했다. 달 항아리는 산산조각이 났고 셀 수 있는 도자기 파편만 300여 조각이었다. 관음원은 고고학자의 도움을 받아 깨진 파편을 작은 가루까지 쓸어담아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그대로 기증했다. 미술관 측은 고심 끝에 2년간 파편 조각을 맞춰본 다음 가능한 형태만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복원을 결정했다. 복원기술자가 일차 작업을 마친 것이라며 조각조각 이어붙인 항아리를 보여주었는데 거짓말처럼 완벽한 복원에 모두들 놀라워 했다. 손때가 묻었던 자국까지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그러면서 복원기술자가 말하기를 복원한 흔적까지 완전히 없앨 수도 있고 혹은 자세히 보아야 복원한 흔적을 알 수 있게 할 수도 있다.
두 가지 방법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 미술 관측은 주저하지 않고 복원 사실을 알 수 있게 흔적을 그대로 남겨놓기로 결정했다. 달항아리가 겪은 고통의 역사까지도 유물의 일부로 인정한 것이다. 상처를 숨기지 않은 이 넉넉한 풍채는 복원의 기적이라는 명성과 함께 더욱 빛나는 전설이 되었다.
우리말의 에비, 어비, 에비야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에게 무서운 존재를 뜻하거나 '계속 울면 에비 온다'. '에비, 이런 것 만지면 안돼' 등과 같은 용례는 바로 이비야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은 귀, 코, 사람이 합쳐진 말로 귀나 코를 베어가는 무시 무시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코무덤 바로 옆에 미미즈카 공원이라는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오래전에 소학교가 있던 곳이 놀이터로 바뀌었다.(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우리 나라 사람의 코와 귀를 베어가서 묻어 둔 코무덤과 관련된 말이다.)
충남 당진에 있는 당진이라는 지명은 삼국 시대 때 당나라와 교역을 하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당진, 가라쓰도 대륙과 한반도의 문물이 본국에 들어오는 문명의 교류 창구였다.
도자기의 제조는 기술적으로 고려청자보다 조선 백자가 앞선다고 하지만 기형의 다양성과 섬세하고 다채로움은 오히려 고려 시대 청자만 못하다.
일본에서 도자기를 수출할 때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종이로 감쌌는데. 마침 그 포장지가 우키요에가 인쇄된 재고 용지였다. 다소 과장되고 화려한 우키요에는 이국적인 스타일의 화풍으로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클레드 모네는 도자기 포장지로 사용한 우키요에를 수집했고 빈센트 반 고흐는 우키요에의 포장지를 직접 모사하며 자신의 작품 속에 우키요의 모티브를 그렸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일본어 표현 중에 무대뽀란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대책없이 함부로 덤비는 사람이나 그러한 태도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막무가내식으로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본래 뜻은 대뽀(철포)도 없이 싸움에 나서는 것이 무모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일본이 철포를 활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 때 조선의 군사들은 우리가 조총이라 알고 있는 이 대포로 풍비박산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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