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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문화여행, 최정훈.오주환 저, 북허브, 2013년 357쪽 7/18~7/27 2015-07-27 10:36:48 본문
조선시대 역사문화여행, 최정훈.오주환 저, 북허브, 2013년 357쪽 7/18~7/27 2015-07-27 10:36:48
singingman 2022. 12. 12. 18:03조선사회를 5장으로 나누어서 주제별로 설명한다.
1부 조선의 왕
왕은 탯줄도 무덤으로 만들만큼 대단한 존재다.
왕은 공부를 엄청 많이 해야 한다.
태종의 왕세자인 양녕대군은 공부를 게을리해서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기도 했다.
어릴 때는 경전을 암기하는 공부가 주를 이루었다.
왕비는 두 세살 위의 양가집 규수를 맞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王이라는 말의 어원은 문자가 생기기 전 왕의 상징이었던 도끼날과 도끼자루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설과
천지인을 상징하는 三과 중국 유학자들의 '뚫을 곤ㅣ'의 조합으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왕은 새벽부터 자정까지 격무에 시달렸다.하루에 많아야 5~6시간 정도 잔다.
새벽 5시 전후에 일어나서 자릿조반을 먹고 왕대비전등에 문안인사를 마친 후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해 뜨기 전에는 경연이라 해서 유학의 경서를 교육받고 나서 아침 수라를 들고 조회를 연후 국정현안을
보고받는다.
점심은 국수나 다과로 간단히 먹고 낮공부인 주강에 들어가서 또 공부한다.
오후에는 관리들을 만나 일을 처리하고 대궐을 지키는 호위병들에게 암구호도 정해준다.
잠시 휴식 후 다시 저녁공부인 석강에 들어간다.
저녁공부를 마치고 나면 저녁 수라를 받고 잠시 쉰 후 낮에 처리하지 못한 밀린 업무를 본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대비전등에 저녁 문안인사를 또 한다.
이 때가 되면 대략 밤 9시경이 된다. 이 때부터 자정까지 2~3시간은 조용히 독서하거나 왕비나 후궁의
침소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폭군들은 이런 것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했다.
왕은 하루 두끼(아침, 저녁)의 식사와 세차례의 간식이 있었다.두끼 식사는 12첩 반상이 기본이었다.
왕이 즐긴 취미활동은 사냥과 격구가 주를 이루었다.
조와 종의 구분은 왕의 사후에 붙여졌는데 중국 경서 예기에 따르면 '공이 있는 자는 조가 되고 덕이 있는 자는 종이 된다.'고 했다.
창업한 왕과 나라의 정통성을 다시 회복시킨 왕, 전쟁을 겪으며 공이 많은 왕은 조, 왕위를 정통으로 물려받아 덕이 많고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린 왕은 종이다.
즉위한 군주의 적비의 아들은 대군, 빈의 아들은 군, 궁인의 아들은 원윤으로 봉한다(태종실록).
후궁의 소생은 아들인 경우 군, 딸은 현주라 했다.
왕비가 낳은 딸은 공주, 후궁이 낳은 딸은 옹주라 불렀다.
경복궁은 처음에 태조의 명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경복은 길이 길이 크게 복을 누린다는 뜻이다.
서울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다. 27대 519년의 사직이 이어졌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 조선에서는 2층 이상의 건물은 잘 짓지 않았다.
정전만 2층으로 지었다. 정전은 생활공간이 아니고 의식을 행하는 곳이어서 바닥이 온돌이 아니고 전돌이고
왕의 용상만 있고 신하들은 서있거나 바닥에 앉아야 한다.
근정전은 부지런해야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이고 인정전은 정치하는 사람이 어질어야 한다는 뜻이고
명정전은 옳고 그름을 가려서 정치를 하라는 뜻이다.
편전은 왕이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정전과 같이 궁궐 외전에 속한다.
경복궁의 사정전, 창덕궁의 선정전, 희정당이 대표적이다.
내전은 왕이나 왕비의 침전이 있는 곳으로 사적인 생활이 이루어 진 곳이다.
침전으로는 경복궁의 강녕전,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 창경궁의 통명전, 덕수궁의 함녕전등이 있다.
왕은 사실 침전이 없다.왕비에게 가든지 후궁에게 가면 거기가 침전이 된다.
2부 궁궐과 궁중생활
침전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고 매우틀이라는 이동식 변기를 사용했다.
왕의 똥은 매화라 불러 매우(梅雨)라는 이름이 붙었다.
목욕탕도 따로 없어서 통나무를 파낸 함지박 욕조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왕과 왕비의 합방은 노상궁들이 길일을 정해 주었고 왕과 왕비가 잘 때 바로 옆방에서 야근을 했다.
왕이 왕비의 방보다 후궁의 방을 더 찾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방사를 할 때 상궁들이 다 듣게 된다는
것이다.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 소속의 건물이었다.
우리 정원은 자연을 그대로 살리는 것을 중시했다.
창덕궁 후원은 북악산 줄기인 매봉을 등지고 연못을 파고 누각과 정자를 조성했다.
왕이 승하하면 후궁은 여승이 되어 여생을 쓸쓸히 보내야 했다. 왕의 여자를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었으니,
정업원이 후궁들이 기거하던 절이다.
무수리는 궁중에서청소, 물긷기, 불때기등의 잡일을 하는 궁녀로 궁녀로 보지 않았다.
궁중에 기거하는 궁녀와는 다른 신분이었다.
3부 양반과 서민 생활
성균관 유생들은 기숙사 생활하면서 매일 시험을 치러야 했다.
과거에 합격해야 출세할 수 있는 사회였으니 공부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지방에 현고학생부군신위라는 글에도 학생이 들어가는 이유가 과거 합격의 염원을 담은 것이다.
관료의 꽃은 당상관이다.
정3품 이상은 아침 조회시 의자에 앉는 당상관이고 그 이하는 당하관이다.
당하관은 6품 이상을 참상관, 7품 이하를 참하관이라 했다.
과거 급제해서 발령을 받고 가면 신참의 신고식이 있었는데 이게 부담가는 접대문화였다.
고위 관리들도 하루 12시간 가까이 근무하는 정말 고된 일이었다.
출근도장을 소속부서에 찍어야 하는데 출근시간이 여름에는 묘시인 오전 5~7시 사이였고 퇴근도 유시인
오후 5~7시 사이였다.
온돌은 15세기 전후에 궁궐에 설치되었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18~19세기가 되어서야 보급되었다.
그 전에는 지푸라기나 나무판을 깔고 땅바닥에서 지냈다.
흥청망청이라는 말은 원래 흥청이라는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에서 출발했는데 연산군이 기녀를 선발하면서 가장 예쁜 기녀를 흥청이라 불렀다. 이 흥청을 잔치나 야유회에 동원하면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니 흥청이 망청이 되어서 흥청망청이 되었다.
4부 정치.외교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은 25대 왕 472년간(1392~1863년)의 일기처럼 쓴 편년체로 기록된 된 역사서다.
사관들은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력을 가져야 했고 사관이 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사대사고는 서울 춘추관, 충주,성주, 전주 네 곳에 두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세 곳은 불타고 전주사고만 남은 것을 임란 이후 다시 부본을 만들어서 춘추관, 강화 마니산, 무주 적상산, 태백산,오대산등 다섯 곳에 보관했다. 현재 이 중의 한 본이 일본으로 갔다가 지금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관리들에게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경서나 다른 책을 읽을 독서기간을 주었다.
독서당길의 이름이 그래서 생겼다.
1426년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집에서 책을 읽고 일년간 독서 휴가를 주었다.
그런데 집에서 책 읽고 있으니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책을 짊어지고 진관사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집현전은 성종때 홍문관으로 부활했다.
조선 최고의 효자는 김득인과 전한로가 있다.
열녀로는 순조 때 중병을 앓는 남편에게 자신의 팔을 베어 피를 먹인 박씨가 대표적이고 이 여자는 남편이
죽자 스스로 자결했다.
성종때 완성된 경국대전은 중국이 보면 자기들 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뭐라 할꺼니까 사신이 오면 숨기고 했다.
당시에는 전쟁에 말이 픽수적이었는데 말이 없어서 임란 때 싸울 수 없었다.
중국어 회화책 노걸대는 생활 중국어 교본이고 시험용으로도 유용했다.
사형수는 삼심을 거쳤다.
5부 사회.문화 이야기
도성주변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건축을 규제했다.
강원도 태백산맥과 경북 북부지방에서 나는 금강송은 춘양목이라 해서 최고의 목재로 여겨졌다.
청계천은 비만 오면 홍수를 일으키는 애물단지였다.
태종 때 개천도감을 설치해서 준설작업을 하고 제방을 만들었다.
그 후 300년간 홍수를 줄이고 했지만 토사가 쌓이면서 다시 영조 36년(1760년)에 다시 공사를 했다.
그래도 생활폐기물을 버려서 지저분한 것을 1961년에 복개를 했다가 이명박 대통령때 복개한 것을 걷어내고 지금의 청계천이 되었다.
귀족취향의 고려청자에서 서민적인 조선시대의 백자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