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노래하는 사람

옹정제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차혜원 역 이산 2001년 232쪽 9/19~9/22 2015-09-22 12:14:06 본문

독서

옹정제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차혜원 역 이산 2001년 232쪽 9/19~9/22 2015-09-22 12:14:06

singingman 2022. 12. 14. 20:50
728x90

13년간 청 왕조를 다스린 강희제의 아들 옹정제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다스린 덕분에 늦은 나이에 다스리게 된다.

그것도 아들들 사이에서 주의깊게 관찰하고 관망하다가 강희제가 죽으면서 4 아거를 지명해서 황제가 되었다.

강희제는 14아거를 보내 준가르부의 반란을 평정했지만 황제 자리는 4 아거가  차지한다.

2 아거가 황태자로 지명되었었지만 그의 포악함과 부패와 방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만들었다.

옹정제는 중국 한족의 전통을 따라 적은 만주인들을 데리고 독재정치를 펼친다.

하지만 선정을 베풀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한민족화 내지는 한족의 문화를 배우고 익히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강희 제때부터 그리스도교가 이미 궁중에 들어와 있었고 예수회 선교사들이 궁중에도  이미 들어와 있었다.

그들로부터 서양의 발달한 신문화를 접하고 있었다.

황족 중에 수누라는 노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공식적으로 기독교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 일가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서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자손들 중에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정직하고 신실하게 신앙을 포기하지 않아서 오히려 황제로부터 신임을 받기도 한다.

이때에도 정식 관료들을 통한 정치 외에 스파이를 통한 정치가 상당히 만연해 있었다. 

중국 사회에서 관료가 되는 것은 명성과 부를 얻는 가장 확실하고 어쩌면 유일한 길이었다.

관료는 부자들과 사귀면서 뇌물을 받을 수 있었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막대한 이권을 취할 수도 있었다.

또한 파당을 형성하면서 그 파당 안에서 권력과 부가 창출되기도 하였다.

공식적인 관료의 급료는 너무 적었기 때문에 지방세에서 일정량을 관료가 자의적으로 징수했는데 이것이 대단한 양이다.

본봉의 몇 백배내지 몇 천배가 되기도 하였다. 

총독과 순무를 통해서 정치를 하였고 옹정 제때 유명한 총독으로 톈원징과 리웨이 그리고 오르타이가 있는데 이들 중 톈원징은

한군 출신으로 백성들을 잘 구휼해서 황제의 눈에 들었고 그 후 지방관들의 부정부패를 상당히 없앴다.

리웨이는 도적을 잘 잡아서 황제에게 신임을 받았으며 소금 암거래 등을 막기도 하였다.

오르타이는 먀오족의 반란을 진압하여 신임을 얻었고 나중에 조정에 불러서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내각 대학사로 임명하였다.

스페인의 사상가 고에스가 옹정제에 관해 쓴 글에는

"선교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중국 황제는 대단한 절약가라고 한다. 홍수 등의 천재에서 희생자를 구할 때 말고는 조금도

재화를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축하의 뜻을 표하기 위해 열리는 연회도 거부한다. 또 그는 자신에 대한

송사를 새긴 기념비를 세우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보다 솔선해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한다. 그가 원하는 바는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각자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반면 이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전도를 금지하였다. 이것이 유감스러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종교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하였다고 해서 그의 인자함과 검소함을 칭송하는 것을 꺼리면

안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당시 유럽인들 중에는 유교 정치철학을 현인 정치의 모범이라고 칭찬하기도 하고 중국을 일종의 유토피아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