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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행복하게 삽시다 2015-10-27 18:50:18 본문

동문회 홈피에 올렸던 글들

행복하게 삽시다 2015-10-27 18:50:18

singingman 2022. 12. 16.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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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2014.03.09에 동문회 홐페이지에 올렸던 글이다.)

 

오늘 설교중에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미 다들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겠지만 다시 한번 인용한다.

미련한 사람은 아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아는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知之者 不如好之者(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이다.)

 

내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내 후배 목사님 중에는 축구를 엄청 좋아하는 목사님이 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한 때는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노는 데만 너무 정신이 팔린 것이 아닌가

오해한 적도 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서 아주 효율적인 목회와 선교를 하고 있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축구를 하는데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에게 아주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논다.

중국이나 동남아등지로 가서 그곳에서 축구시합도 하고 축구용품도 나눠주면서 복음도 나눠주고 사랑도

나눠 준다.

특히 그의 말에 의하면 중국 같은 곳에서는 이런 모임이 선교정책에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하면서 복음도 전하고 선교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게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또한 목회도 특이하다면 좀 이상할 지 몰라도 다른 목사님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한다.

많은 목회자들은 수천명 모이는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꿈과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잘못 된 것도 아니고  해서는 안 될 일도 아니다.

목회를 잘해서 교인들이 몰려 오는데 못오게 할 수 없지 않는가?

하지만 이 후배 목사는 교인이 어느 정도 늘어나면 그 아까운 교인들을 떼어서 새로운 교회를 근처에 하나

더 세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미 그런 교회의 숫자가 상당히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라고 해서 어려움이 왜 없고 욕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래서 그는 내 눈에는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또 내 친구중에는 중학교 교장이면서 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나는 흉내도 낼 수 없게 바쁘게 산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행복한 모습이다.

30수년간 친구로 지내오면서 미국 여행을 두 집이 같이 하자고 말은 했는데 아직도 이 친구가 너무 바빠서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정년퇴직하면 가능할까?

 

그런데 이 친구는 남의 일 도와주는 것을 아주 즐기면서 한다.

마당발이어서 아는 지인들도 엄청나게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의 경조사를 다 챙긴다.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자기 돈 써가면서 도와준다.

그러면서도 허허 웃고 다닌다.

대학 작곡과 후배들 가운데 작품을 쓰는 후배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이 후배들이 작곡으로 입신할 수

있을까 도와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자기 학교로 불러서 밥사주고 곡 사주고 하면서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늘상 싱글벙글한다.

이런 바쁜 가운데도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서 방학때 한번 쯤은 꼭 같이 하려고 한다.

지난 겨울에는 경상도 청도에서 개척 목회하는 친구를 찾아가서 근처에 사는 친구들을 다 불러들여서

2박 3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 친구는 대학 다닐 때 메시야 연주회를 할 때 준비위원장을 했는데 일을 얼마나 잘 했는지 모른다.

이런 연주회에는 많은 비용이 드는데 학교에서 주는 돈은 언제나 모자라기 마련이다.

그는 직접 교회들이나 스폰서들을 찾아다니면서 모금을 했고 얼마나 열심히 했든지 연주회가 끝난 후에는

돈이 남아서 그 돈으로 합창단원 전체에게 리셉션 파티를 열어주고 학교 사무실에는 소파를 사 줄 정도였다.

일을 즐기니까 이런 엄청난 효율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일을 즐기는모습을 지금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해 보인다.

 

 

또 한 친구는 케냐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그 후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오래 하였다.

지금 그는 시골에서 교인 한 가정으로 개척목회를 시작했다.

지난 겨울에 그를 만났는데 그의 얼굴은 걱정보다 안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같이 믿음 약하고 여린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이미 시작했다.

그라고 내가 모르는 염려가 없겠는가? 

이 친구가 케냐 선교사 시절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도 바울이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을 농담처럼 했지만 그 말이 그의 생활에서 얼마나 실천에 옮겨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빌립보 4장 12절 말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
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나는 위의 말을 도저히 실천에 옮길 수 없다.

조금만 배 고파도 걱정하고, 궁핍하면 정신을 못 차린다.

그는 케냐나 미국 이민 목회에서 위의 말씀을 철저히 적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위의 사람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나도 저런 경지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같이 미련한 사람도 희망이 없지는 않다.

미련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을 이길 수는 없지만 미련한 사람도 일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자기 일을 할 수는

있는 것 같다.

나는 산 올라가는 것을 즐긴다.

축구 즐기고 남 도와주는 것을 즐기고 어려운 가운데도 목회하듯이 말이다.

산꼭대기에서 아무도 부르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숨을 헐떡이면서 미련스럽게 올라간다.

정상에 이르면 성취감을 느끼고, 일망무제 (一望無際) 그 시원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거의 매주 가는 북한산이나 처음 가는 산에서 다 같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처음 가는 호젓한 높은 산에서 받는 느낌은 새로운 도전정신과 호기심, 편안함등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선불교에서는 선방에 앉아서 참선하는 방법을 권하는데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걸으면서 생각할 것을

권한다.

산을 올라보면 힘든 가운데도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힘들고 높은 산은 더 그런 것 같다.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와는 달리 불교도들은 먼 길을 걸어서 히말라야에 있는 카일라스 산을 순례한다.

차를 타기도 하지만 워낙 험한 산이다 보니 걷는 길이 많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들은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실패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아마

이 말은 단순히 남을 위한다기보다 남의 눈치보고 산다는 말이 아닐까?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면 진정으로 남을 위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 일도 행복하게 해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서화가이며 문장가였던 유한준은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볼 수 있게 된다고 했는데 행복하게

즐기면서 일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나

그 일을 사랑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 때로는 큰 일을 추스리는 것보다 더 힘들 때가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고 보면 한 때의 일이다.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이 뭐꼬?"를 생각해보라.

마음에서 많은 문제가 생기고 또 해결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성경은 말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믿음은 행동에 옯겨져야 진짜 믿음인데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실제 행동으로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면 믿음대로 사는 것이 좀 더 쉬워질까?

 

 

오늘 설교중에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미 다들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겠지만 다시 한번 인용한다.

미련한 사람은 아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아는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知之者 不如好之者(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이다.)

 

 

내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내 후배 목사님 중에는 축구를 엄청 좋아하는 목사님이 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한 때는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노는 데만 너무 정신이 팔린 것이 아닌가

오해한 적도 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서 아주 효율적인 목회와 선교를 하고 있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축구를 하는데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에게 아주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논다.

중국이나 동남아등지로 가서 그곳에서 축구시합도 하고 축구용품도 나눠주면서 복음도 나눠주고 사랑도

나눠 준다.

특히 그의 말에 의하면 중국 같은 곳에서는 이런 모임이 선교정책에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하면서 복음도 전하고 선교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게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또한 목회도 특이하다면 좀 이상할 지 몰라도 다른 목사님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한다.

많은 목회자들은 수천명 모이는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꿈과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잘못 된 것도 아니고  해서는 안 될 일도 아니다.

목회를 잘해서 교인들이 몰려 오는데 못오게 할 수 없지 않는가?

하지만 이 후배 목사는 교인이 어느 정도 늘어나면 그 아까운 교인들을 떼어서 새로운 교회를 근처에 하나

더 세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미 그런 교회의 숫자가 상당히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라고 해서 어려움이 왜 없고 욕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래서 그는 내 눈에는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또 내 친구중에는 중학교 교장이면서 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나는 흉내도 낼 수 없게 바쁘게 산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행복한 모습이다.

30수년간 친구로 지내오면서 미국 여행을 두 집이 같이 하자고 말은 했는데 아직도 이 친구가 너무 바빠서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정년퇴직하면 가능할까?

 

 

그런데 이 친구는 남의 일 도와주는 것을 아주 즐기면서 한다.

마당발이어서 아는 지인들도 엄청나게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의 경조사를 다 챙긴다.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자기 돈 써가면서 도와준다.

그러면서도 허허 웃고 다닌다.

대학 작곡과 후배들 가운데 작품을 쓰는 후배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이 후배들이 작곡으로 입신할 수

있을까 도와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자기 학교로 불러서 밥사주고 곡 사주고 하면서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늘상 싱글벙글한다.

이런 바쁜 가운데도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서 방학때 한번 쯤은 꼭 같이 하려고 한다.

지난 겨울에는 경상도 청도에서 개척 목회하는 친구를 찾아가서 근처에 사는 친구들을 다 불러들여서

2박 3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 친구는 대학 다닐 때 메시야 연주회를 할 때 준비위원장을 했는데 일을 얼마나 잘 했는지 모른다.

이런 연주회에는 많은 비용이 드는데 학교에서 주는 돈은 언제나 모자라기 마련이다.

그는 직접 교회들이나 스폰서들을 찾아다니면서 모금을 했고 얼마나 열심히 했든지 연주회가 끝난 후에는

돈이 남아서 그 돈으로 합창단원 전체에게 리셉션 파티를 열어주고 학교 사무실에는 소파를 사 줄 정도였다.

일을 즐기니까 이런 엄청난 효율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일을 즐기는모습을 지금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해 보인다.

 

 

또 한 친구는 케냐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그 후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오래 하였다.

지금 그는 시골에서 교인 한 가정으로 개척목회를 시작했다.

지난 겨울에 그를 만났는데 그의 얼굴은 걱정보다 안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같이 믿음 약하고 여린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이미 시작했다.

그라고 내가 모르는 염려가 없겠는가? 

이 친구가 케냐 선교사 시절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도 바울이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을 농담처럼 했지만 그 말이 그의 생활에서 얼마나 실천에 옮겨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빌립보 4장 12절 말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
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나는 위의 말을 도저히 실천에 옮길 수 없다.

조금만 배 고파도 걱정하고, 궁핍하면 정신을 못 차린다.

그는 케냐나 미국 이민 목회에서 위의 말씀을 철저히 적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위의 사람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나도 저런 경지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같이 미련한 사람도 희망이 없지는 않다.

미련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을 이길 수는 없지만 미련한 사람도 일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자기 일을 할 수는

있는 것 같다.

나는 산 올라가는 것을 즐긴다.

축구 즐기고 남 도와주는 것을 즐기고 어려운 가운데도 목회하듯이 말이다.

산꼭대기에서 아무도 부르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숨을 헐떡이면서 미련스럽게 올라간다.

정상에 이르면 성취감을 느끼고, 일망무제 (一望無際) 그 시원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거의 매주 가는 북한산이나 처음 가는 산에서 다 같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처음 가는 호젓한 높은 산에서 받는 느낌은 새로운 도전정신과 호기심, 편안함등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선불교에서는 선방에 앉아서 참선하는 방법을 권하는데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걸으면서 생각할 것을

권한다.

산을 올라보면 힘든 가운데도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힘들고 높은 산은 더 그런 것 같다.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와는 달리 불교도들은 먼 길을 걸어서 히말라야에 있는 카일라스 산을 순례한다.

차를 타기도 하지만 워낙 험한 산이다 보니 걷는 길이 많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들은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실패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아마

이 말은 단순히 남을 위한다기보다 남의 눈치보고 산다는 말이 아닐까?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면 진정으로 남을 위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 일도 행복하게 해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서화가이며 문장가였던 유한준은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볼 수 있게 된다고 했는데 행복하게

즐기면서 일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나

그 일을 사랑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 때로는 큰 일을 추스리는 것보다 더 힘들 때가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고 보면 한 때의 일이다.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이 뭐꼬?"를 생각해보라.

마음에서 많은 문제가 생기고 또 해결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성경은 말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믿음은 행동에 옯겨져야 진짜 믿음인데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실제 행동으로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면 믿음대로 사는 것이 좀 더 쉬워질까?

 

 

오늘 설교중에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미 다들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겠지만 다시 한번 인용한다.

미련한 사람은 아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아는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知之者 不如好之者(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이다.)

 

 

내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내 후배 목사님 중에는 축구를 엄청 좋아하는 목사님이 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한 때는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노는 데만 너무 정신이 팔린 것이 아닌가

오해한 적도 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서 아주 효율적인 목회와 선교를 하고 있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축구를 하는데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에게 아주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논다.

중국이나 동남아등지로 가서 그곳에서 축구시합도 하고 축구용품도 나눠주면서 복음도 나눠주고 사랑도

나눠 준다.

특히 그의 말에 의하면 중국 같은 곳에서는 이런 모임이 선교정책에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하면서 복음도 전하고 선교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게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또한 목회도 특이하다면 좀 이상할 지 몰라도 다른 목사님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한다.

많은 목회자들은 수천명 모이는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꿈과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잘못 된 것도 아니고  해서는 안 될 일도 아니다.

목회를 잘해서 교인들이 몰려 오는데 못오게 할 수 없지 않는가?

하지만 이 후배 목사는 교인이 어느 정도 늘어나면 그 아까운 교인들을 떼어서 새로운 교회를 근처에 하나

더 세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미 그런 교회의 숫자가 상당히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라고 해서 어려움이 왜 없고 욕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래서 그는 내 눈에는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또 내 친구중에는 중학교 교장이면서 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나는 흉내도 낼 수 없게 바쁘게 산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행복한 모습이다.

30수년간 친구로 지내오면서 미국 여행을 두 집이 같이 하자고 말은 했는데 아직도 이 친구가 너무 바빠서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정년퇴직하면 가능할까?

 

 

그런데 이 친구는 남의 일 도와주는 것을 아주 즐기면서 한다.

마당발이어서 아는 지인들도 엄청나게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의 경조사를 다 챙긴다.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자기 돈 써가면서 도와준다.

그러면서도 허허 웃고 다닌다.

대학 작곡과 후배들 가운데 작품을 쓰는 후배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이 후배들이 작곡으로 입신할 수

있을까 도와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자기 학교로 불러서 밥사주고 곡 사주고 하면서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늘상 싱글벙글한다.

이런 바쁜 가운데도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서 방학때 한번 쯤은 꼭 같이 하려고 한다.

지난 겨울에는 경상도 청도에서 개척 목회하는 친구를 찾아가서 근처에 사는 친구들을 다 불러들여서

2박 3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 친구는 대학 다닐 때 메시야 연주회를 할 때 준비위원장을 했는데 일을 얼마나 잘 했는지 모른다.

이런 연주회에는 많은 비용이 드는데 학교에서 주는 돈은 언제나 모자라기 마련이다.

그는 직접 교회들이나 스폰서들을 찾아다니면서 모금을 했고 얼마나 열심히 했든지 연주회가 끝난 후에는

돈이 남아서 그 돈으로 합창단원 전체에게 리셉션 파티를 열어주고 학교 사무실에는 소파를 사 줄 정도였다.

일을 즐기니까 이런 엄청난 효율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일을 즐기는모습을 지금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해 보인다.

 

 

또 한 친구는 케냐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그 후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오래 하였다.

지금 그는 시골에서 교인 한 가정으로 개척목회를 시작했다.

지난 겨울에 그를 만났는데 그의 얼굴은 걱정보다 안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같이 믿음 약하고 여린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이미 시작했다.

그라고 내가 모르는 염려가 없겠는가? 

이 친구가 케냐 선교사 시절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도 바울이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을 농담처럼 했지만 그 말이 그의 생활에서 얼마나 실천에 옮겨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빌립보 4장 12절 말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
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나는 위의 말을 도저히 실천에 옮길 수 없다.

조금만 배 고파도 걱정하고, 궁핍하면 정신을 못 차린다.

그는 케냐나 미국 이민 목회에서 위의 말씀을 철저히 적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위의 사람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나도 저런 경지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같이 미련한 사람도 희망이 없지는 않다.

미련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을 이길 수는 없지만 미련한 사람도 일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자기 일을 할 수는

있는 것 같다.

나는 산 올라가는 것을 즐긴다.

축구 즐기고 남 도와주는 것을 즐기고 어려운 가운데도 목회하듯이 말이다.

산꼭대기에서 아무도 부르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숨을 헐떡이면서 미련스럽게 올라간다.

정상에 이르면 성취감을 느끼고, 일망무제 (一望無際) 그 시원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거의 매주 가는 북한산이나 처음 가는 산에서 다 같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처음 가는 호젓한 높은 산에서 받는 느낌은 새로운 도전정신과 호기심, 편안함등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선불교에서는 선방에 앉아서 참선하는 방법을 권하는데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걸으면서 생각할 것을

권한다.

산을 올라보면 힘든 가운데도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힘들고 높은 산은 더 그런 것 같다.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와는 달리 불교도들은 먼 길을 걸어서 히말라야에 있는 카일라스 산을 순례한다.

차를 타기도 하지만 워낙 험한 산이다 보니 걷는 길이 많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들은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실패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아마

이 말은 단순히 남을 위한다기보다 남의 눈치보고 산다는 말이 아닐까?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면 진정으로 남을 위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 일도 행복하게 해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서화가이며 문장가였던 유한준은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볼 수 있게 된다고 했는데 행복하게

즐기면서 일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나

그 일을 사랑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 때로는 큰 일을 추스리는 것보다 더 힘들 때가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고 보면 한 때의 일이다.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이 뭐꼬?"를 생각해보라.

마음에서 많은 문제가 생기고 또 해결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성경은 말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믿음은 행동에 옯겨져야 진짜 믿음인데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실제 행동으로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면 믿음대로 사는 것이 좀 더 쉬워질까?

 

 

오늘 설교중에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미 다들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겠지만 다시 한번 인용한다.

미련한 사람은 아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아는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知之者 不如好之者(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이다.)

 

 

내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내 후배 목사님 중에는 축구를 엄청 좋아하는 목사님이 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한 때는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노는 데만 너무 정신이 팔린 것이 아닌가

오해한 적도 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서 아주 효율적인 목회와 선교를 하고 있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축구를 하는데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에게 아주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논다.

중국이나 동남아등지로 가서 그곳에서 축구시합도 하고 축구용품도 나눠주면서 복음도 나눠주고 사랑도

나눠 준다.

특히 그의 말에 의하면 중국 같은 곳에서는 이런 모임이 선교정책에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하면서 복음도 전하고 선교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게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또한 목회도 특이하다면 좀 이상할 지 몰라도 다른 목사님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한다.

많은 목회자들은 수천명 모이는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꿈과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잘못 된 것도 아니고  해서는 안 될 일도 아니다.

목회를 잘해서 교인들이 몰려 오는데 못오게 할 수 없지 않는가?

하지만 이 후배 목사는 교인이 어느 정도 늘어나면 그 아까운 교인들을 떼어서 새로운 교회를 근처에 하나

더 세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미 그런 교회의 숫자가 상당히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라고 해서 어려움이 왜 없고 욕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래서 그는 내 눈에는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또 내 친구중에는 중학교 교장이면서 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나는 흉내도 낼 수 없게 바쁘게 산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행복한 모습이다.

30수년간 친구로 지내오면서 미국 여행을 두 집이 같이 하자고 말은 했는데 아직도 이 친구가 너무 바빠서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정년퇴직하면 가능할까?

 

 

그런데 이 친구는 남의 일 도와주는 것을 아주 즐기면서 한다.

마당발이어서 아는 지인들도 엄청나게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의 경조사를 다 챙긴다.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자기 돈 써가면서 도와준다.

그러면서도 허허 웃고 다닌다.

대학 작곡과 후배들 가운데 작품을 쓰는 후배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이 후배들이 작곡으로 입신할 수

있을까 도와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자기 학교로 불러서 밥사주고 곡 사주고 하면서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늘상 싱글벙글한다.

이런 바쁜 가운데도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서 방학때 한번 쯤은 꼭 같이 하려고 한다.

지난 겨울에는 경상도 청도에서 개척 목회하는 친구를 찾아가서 근처에 사는 친구들을 다 불러들여서

2박 3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 친구는 대학 다닐 때 메시야 연주회를 할 때 준비위원장을 했는데 일을 얼마나 잘 했는지 모른다.

이런 연주회에는 많은 비용이 드는데 학교에서 주는 돈은 언제나 모자라기 마련이다.

그는 직접 교회들이나 스폰서들을 찾아다니면서 모금을 했고 얼마나 열심히 했든지 연주회가 끝난 후에는

돈이 남아서 그 돈으로 합창단원 전체에게 리셉션 파티를 열어주고 학교 사무실에는 소파를 사 줄 정도였다.

일을 즐기니까 이런 엄청난 효율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일을 즐기는모습을 지금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해 보인다.

 

 

또 한 친구는 케냐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그 후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오래 하였다.

지금 그는 시골에서 교인 한 가정으로 개척목회를 시작했다.

지난 겨울에 그를 만났는데 그의 얼굴은 걱정보다 안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같이 믿음 약하고 여린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이미 시작했다.

그라고 내가 모르는 염려가 없겠는가? 

이 친구가 케냐 선교사 시절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도 바울이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을 농담처럼 했지만 그 말이 그의 생활에서 얼마나 실천에 옮겨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빌립보 4장 12절 말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
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나는 위의 말을 도저히 실천에 옮길 수 없다.

조금만 배 고파도 걱정하고, 궁핍하면 정신을 못 차린다.

그는 케냐나 미국 이민 목회에서 위의 말씀을 철저히 적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위의 사람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나도 저런 경지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같이 미련한 사람도 희망이 없지는 않다.

미련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을 이길 수는 없지만 미련한 사람도 일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자기 일을 할 수는

있는 것 같다.

나는 산 올라가는 것을 즐긴다.

축구 즐기고 남 도와주는 것을 즐기고 어려운 가운데도 목회하듯이 말이다.

산꼭대기에서 아무도 부르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숨을 헐떡이면서 미련스럽게 올라간다.

정상에 이르면 성취감을 느끼고, 일망무제 (一望無際) 그 시원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거의 매주 가는 북한산이나 처음 가는 산에서 다 같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처음 가는 호젓한 높은 산에서 받는 느낌은 새로운 도전정신과 호기심, 편안함등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선불교에서는 선방에 앉아서 참선하는 방법을 권하는데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걸으면서 생각할 것을

권한다.

산을 올라보면 힘든 가운데도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힘들고 높은 산은 더 그런 것 같다.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와는 달리 불교도들은 먼 길을 걸어서 히말라야에 있는 카일라스 산을 순례한다.

차를 타기도 하지만 워낙 험한 산이다 보니 걷는 길이 많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들은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실패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아마

이 말은 단순히 남을 위한다기보다 남의 눈치보고 산다는 말이 아닐까?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면 진정으로 남을 위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 일도 행복하게 해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서화가이며 문장가였던 유한준은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볼 수 있게 된다고 했는데 행복하게

즐기면서 일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나

그 일을 사랑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 때로는 큰 일을 추스리는 것보다 더 힘들 때가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고 보면 한 때의 일이다.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이 뭐꼬?"를 생각해보라.

마음에서 많은 문제가 생기고 또 해결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성경은 말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믿음은 행동에 옯겨져야 진짜 믿음인데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실제 행동으로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면 믿음대로 사는 것이 좀 더 쉬워질까?

 

 

오늘 설교중에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미 다들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겠지만 다시 한번 인용한다.

미련한 사람은 아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아는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知之者 不如好之者(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이다.)

 

 

내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내 후배 목사님 중에는 축구를 엄청 좋아하는 목사님이 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한 때는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노는 데만 너무 정신이 팔린 것이 아닌가

오해한 적도 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서 아주 효율적인 목회와 선교를 하고 있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축구를 하는데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에게 아주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논다.

중국이나 동남아등지로 가서 그곳에서 축구시합도 하고 축구용품도 나눠주면서 복음도 나눠주고 사랑도

나눠 준다.

특히 그의 말에 의하면 중국 같은 곳에서는 이런 모임이 선교정책에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하면서 복음도 전하고 선교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게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또한 목회도 특이하다면 좀 이상할 지 몰라도 다른 목사님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한다.

많은 목회자들은 수천명 모이는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꿈과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잘못 된 것도 아니고  해서는 안 될 일도 아니다.

목회를 잘해서 교인들이 몰려 오는데 못오게 할 수 없지 않는가?

하지만 이 후배 목사는 교인이 어느 정도 늘어나면 그 아까운 교인들을 떼어서 새로운 교회를 근처에 하나

더 세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미 그런 교회의 숫자가 상당히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라고 해서 어려움이 왜 없고 욕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래서 그는 내 눈에는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또 내 친구중에는 중학교 교장이면서 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나는 흉내도 낼 수 없게 바쁘게 산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행복한 모습이다.

30수년간 친구로 지내오면서 미국 여행을 두 집이 같이 하자고 말은 했는데 아직도 이 친구가 너무 바빠서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정년퇴직하면 가능할까?

 

 

그런데 이 친구는 남의 일 도와주는 것을 아주 즐기면서 한다.

마당발이어서 아는 지인들도 엄청나게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의 경조사를 다 챙긴다.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자기 돈 써가면서 도와준다.

그러면서도 허허 웃고 다닌다.

대학 작곡과 후배들 가운데 작품을 쓰는 후배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이 후배들이 작곡으로 입신할 수

있을까 도와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자기 학교로 불러서 밥사주고 곡 사주고 하면서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늘상 싱글벙글한다.

이런 바쁜 가운데도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서 방학때 한번 쯤은 꼭 같이 하려고 한다.

지난 겨울에는 경상도 청도에서 개척 목회하는 친구를 찾아가서 근처에 사는 친구들을 다 불러들여서

2박 3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 친구는 대학 다닐 때 메시야 연주회를 할 때 준비위원장을 했는데 일을 얼마나 잘 했는지 모른다.

이런 연주회에는 많은 비용이 드는데 학교에서 주는 돈은 언제나 모자라기 마련이다.

그는 직접 교회들이나 스폰서들을 찾아다니면서 모금을 했고 얼마나 열심히 했든지 연주회가 끝난 후에는

돈이 남아서 그 돈으로 합창단원 전체에게 리셉션 파티를 열어주고 학교 사무실에는 소파를 사 줄 정도였다.

일을 즐기니까 이런 엄청난 효율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일을 즐기는모습을 지금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해 보인다.

 

 

또 한 친구는 케냐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그 후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오래 하였다.

지금 그는 시골에서 교인 한 가정으로 개척목회를 시작했다.

지난 겨울에 그를 만났는데 그의 얼굴은 걱정보다 안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같이 믿음 약하고 여린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이미 시작했다.

그라고 내가 모르는 염려가 없겠는가? 

이 친구가 케냐 선교사 시절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도 바울이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을 농담처럼 했지만 그 말이 그의 생활에서 얼마나 실천에 옮겨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빌립보 4장 12절 말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
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나는 위의 말을 도저히 실천에 옮길 수 없다.

조금만 배 고파도 걱정하고, 궁핍하면 정신을 못 차린다.

그는 케냐나 미국 이민 목회에서 위의 말씀을 철저히 적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위의 사람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나도 저런 경지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같이 미련한 사람도 희망이 없지는 않다.

미련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을 이길 수는 없지만 미련한 사람도 일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자기 일을 할 수는

있는 것 같다.

나는 산 올라가는 것을 즐긴다.

축구 즐기고 남 도와주는 것을 즐기고 어려운 가운데도 목회하듯이 말이다.

산꼭대기에서 아무도 부르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숨을 헐떡이면서 미련스럽게 올라간다.

정상에 이르면 성취감을 느끼고, 일망무제 (一望無際) 그 시원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거의 매주 가는 북한산이나 처음 가는 산에서 다 같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처음 가는 호젓한 높은 산에서 받는 느낌은 새로운 도전정신과 호기심, 편안함등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선불교에서는 선방에 앉아서 참선하는 방법을 권하는데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걸으면서 생각할 것을

권한다.

산을 올라보면 힘든 가운데도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힘들고 높은 산은 더 그런 것 같다.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와는 달리 불교도들은 먼 길을 걸어서 히말라야에 있는 카일라스 산을 순례한다.

차를 타기도 하지만 워낙 험한 산이다 보니 걷는 길이 많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들은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실패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아마

이 말은 단순히 남을 위한다기보다 남의 눈치보고 산다는 말이 아닐까?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면 진정으로 남을 위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 일도 행복하게 해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서화가이며 문장가였던 유한준은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볼 수 있게 된다고 했는데 행복하게

즐기면서 일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나

그 일을 사랑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 때로는 큰 일을 추스리는 것보다 더 힘들 때가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고 보면 한 때의 일이다.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이 뭐꼬?"를 생각해보라.

마음에서 많은 문제가 생기고 또 해결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성경은 말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믿음은 행동에 옯겨져야 진짜 믿음인데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실제 행동으로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면 믿음대로 사는 것이 좀 더 쉬워질까?

 

 

오늘 설교중에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미 다들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겠지만 다시 한번 인용한다.

미련한 사람은 아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아는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知之者 不如好之者(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이다.)

 

 

내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내 후배 목사님 중에는 축구를 엄청 좋아하는 목사님이 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한 때는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노는 데만 너무 정신이 팔린 것이 아닌가

오해한 적도 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서 아주 효율적인 목회와 선교를 하고 있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축구를 하는데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에게 아주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논다.

중국이나 동남아등지로 가서 그곳에서 축구시합도 하고 축구용품도 나눠주면서 복음도 나눠주고 사랑도

나눠 준다.

특히 그의 말에 의하면 중국 같은 곳에서는 이런 모임이 선교정책에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하면서 복음도 전하고 선교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게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또한 목회도 특이하다면 좀 이상할 지 몰라도 다른 목사님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한다.

많은 목회자들은 수천명 모이는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꿈과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잘못 된 것도 아니고  해서는 안 될 일도 아니다.

목회를 잘해서 교인들이 몰려 오는데 못오게 할 수 없지 않는가?

하지만 이 후배 목사는 교인이 어느 정도 늘어나면 그 아까운 교인들을 떼어서 새로운 교회를 근처에 하나

더 세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미 그런 교회의 숫자가 상당히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라고 해서 어려움이 왜 없고 욕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래서 그는 내 눈에는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또 내 친구중에는 중학교 교장이면서 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나는 흉내도 낼 수 없게 바쁘게 산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행복한 모습이다.

30수년간 친구로 지내오면서 미국 여행을 두 집이 같이 하자고 말은 했는데 아직도 이 친구가 너무 바빠서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정년퇴직하면 가능할까?

 

 

그런데 이 친구는 남의 일 도와주는 것을 아주 즐기면서 한다.

마당발이어서 아는 지인들도 엄청나게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의 경조사를 다 챙긴다.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자기 돈 써가면서 도와준다.

그러면서도 허허 웃고 다닌다.

대학 작곡과 후배들 가운데 작품을 쓰는 후배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이 후배들이 작곡으로 입신할 수

있을까 도와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자기 학교로 불러서 밥사주고 곡 사주고 하면서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늘상 싱글벙글한다.

이런 바쁜 가운데도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서 방학때 한번 쯤은 꼭 같이 하려고 한다.

지난 겨울에는 경상도 청도에서 개척 목회하는 친구를 찾아가서 근처에 사는 친구들을 다 불러들여서

2박 3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 친구는 대학 다닐 때 메시야 연주회를 할 때 준비위원장을 했는데 일을 얼마나 잘 했는지 모른다.

이런 연주회에는 많은 비용이 드는데 학교에서 주는 돈은 언제나 모자라기 마련이다.

그는 직접 교회들이나 스폰서들을 찾아다니면서 모금을 했고 얼마나 열심히 했든지 연주회가 끝난 후에는

돈이 남아서 그 돈으로 합창단원 전체에게 리셉션 파티를 열어주고 학교 사무실에는 소파를 사 줄 정도였다.

일을 즐기니까 이런 엄청난 효율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일을 즐기는모습을 지금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해 보인다.

 

 

또 한 친구는 케냐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그 후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오래 하였다.

지금 그는 시골에서 교인 한 가정으로 개척목회를 시작했다.

지난 겨울에 그를 만났는데 그의 얼굴은 걱정보다 안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같이 믿음 약하고 여린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이미 시작했다.

그라고 내가 모르는 염려가 없겠는가? 

이 친구가 케냐 선교사 시절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도 바울이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을 농담처럼 했지만 그 말이 그의 생활에서 얼마나 실천에 옮겨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빌립보 4장 12절 말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
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나는 위의 말을 도저히 실천에 옮길 수 없다.

조금만 배 고파도 걱정하고, 궁핍하면 정신을 못 차린다.

그는 케냐나 미국 이민 목회에서 위의 말씀을 철저히 적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위의 사람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나도 저런 경지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같이 미련한 사람도 희망이 없지는 않다.

미련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을 이길 수는 없지만 미련한 사람도 일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자기 일을 할 수는

있는 것 같다.

나는 산 올라가는 것을 즐긴다.

축구 즐기고 남 도와주는 것을 즐기고 어려운 가운데도 목회하듯이 말이다.

산꼭대기에서 아무도 부르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숨을 헐떡이면서 미련스럽게 올라간다.

정상에 이르면 성취감을 느끼고, 일망무제 (一望無際) 그 시원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거의 매주 가는 북한산이나 처음 가는 산에서 다 같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처음 가는 호젓한 높은 산에서 받는 느낌은 새로운 도전정신과 호기심, 편안함등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선불교에서는 선방에 앉아서 참선하는 방법을 권하는데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걸으면서 생각할 것을

권한다.

산을 올라보면 힘든 가운데도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힘들고 높은 산은 더 그런 것 같다.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와는 달리 불교도들은 먼 길을 걸어서 히말라야에 있는 카일라스 산을 순례한다.

차를 타기도 하지만 워낙 험한 산이다 보니 걷는 길이 많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들은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실패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아마

이 말은 단순히 남을 위한다기보다 남의 눈치보고 산다는 말이 아닐까?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면 진정으로 남을 위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 일도 행복하게 해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서화가이며 문장가였던 유한준은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볼 수 있게 된다고 했는데 행복하게

즐기면서 일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나

그 일을 사랑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 때로는 큰 일을 추스리는 것보다 더 힘들 때가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고 보면 한 때의 일이다.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이 뭐꼬?"를 생각해보라.

마음에서 많은 문제가 생기고 또 해결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성경은 말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믿음은 행동에 옯겨져야 진짜 믿음인데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실제 행동으로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면 믿음대로 사는 것이 좀 더 쉬워질까?

 

 

오늘 설교중에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미 다들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겠지만 다시 한번 인용한다.

미련한 사람은 아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아는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知之者 不如好之者(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이다.)

 

 

내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내 후배 목사님 중에는 축구를 엄청 좋아하는 목사님이 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한 때는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노는 데만 너무 정신이 팔린 것이 아닌가

오해한 적도 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서 아주 효율적인 목회와 선교를 하고 있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축구를 하는데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에게 아주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논다.

중국이나 동남아등지로 가서 그곳에서 축구시합도 하고 축구용품도 나눠주면서 복음도 나눠주고 사랑도

나눠 준다.

특히 그의 말에 의하면 중국 같은 곳에서는 이런 모임이 선교정책에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하면서 복음도 전하고 선교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게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또한 목회도 특이하다면 좀 이상할 지 몰라도 다른 목사님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한다.

많은 목회자들은 수천명 모이는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꿈과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잘못 된 것도 아니고  해서는 안 될 일도 아니다.

목회를 잘해서 교인들이 몰려 오는데 못오게 할 수 없지 않는가?

하지만 이 후배 목사는 교인이 어느 정도 늘어나면 그 아까운 교인들을 떼어서 새로운 교회를 근처에 하나

더 세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미 그런 교회의 숫자가 상당히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라고 해서 어려움이 왜 없고 욕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래서 그는 내 눈에는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또 내 친구중에는 중학교 교장이면서 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나는 흉내도 낼 수 없게 바쁘게 산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행복한 모습이다.

30수년간 친구로 지내오면서 미국 여행을 두 집이 같이 하자고 말은 했는데 아직도 이 친구가 너무 바빠서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정년퇴직하면 가능할까?

 

 

그런데 이 친구는 남의 일 도와주는 것을 아주 즐기면서 한다.

마당발이어서 아는 지인들도 엄청나게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의 경조사를 다 챙긴다.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자기 돈 써가면서 도와준다.

그러면서도 허허 웃고 다닌다.

대학 작곡과 후배들 가운데 작품을 쓰는 후배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이 후배들이 작곡으로 입신할 수

있을까 도와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자기 학교로 불러서 밥사주고 곡 사주고 하면서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늘상 싱글벙글한다.

이런 바쁜 가운데도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서 방학때 한번 쯤은 꼭 같이 하려고 한다.

지난 겨울에는 경상도 청도에서 개척 목회하는 친구를 찾아가서 근처에 사는 친구들을 다 불러들여서

2박 3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 친구는 대학 다닐 때 메시야 연주회를 할 때 준비위원장을 했는데 일을 얼마나 잘 했는지 모른다.

이런 연주회에는 많은 비용이 드는데 학교에서 주는 돈은 언제나 모자라기 마련이다.

그는 직접 교회들이나 스폰서들을 찾아다니면서 모금을 했고 얼마나 열심히 했든지 연주회가 끝난 후에는

돈이 남아서 그 돈으로 합창단원 전체에게 리셉션 파티를 열어주고 학교 사무실에는 소파를 사 줄 정도였다.

일을 즐기니까 이런 엄청난 효율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일을 즐기는모습을 지금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해 보인다.

 

 

또 한 친구는 케냐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그 후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오래 하였다.

지금 그는 시골에서 교인 한 가정으로 개척목회를 시작했다.

지난 겨울에 그를 만났는데 그의 얼굴은 걱정보다 안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같이 믿음 약하고 여린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이미 시작했다.

그라고 내가 모르는 염려가 없겠는가? 

이 친구가 케냐 선교사 시절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도 바울이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을 농담처럼 했지만 그 말이 그의 생활에서 얼마나 실천에 옮겨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빌립보 4장 12절 말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
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나는 위의 말을 도저히 실천에 옮길 수 없다.

조금만 배 고파도 걱정하고, 궁핍하면 정신을 못 차린다.

그는 케냐나 미국 이민 목회에서 위의 말씀을 철저히 적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위의 사람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나도 저런 경지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같이 미련한 사람도 희망이 없지는 않다.

미련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을 이길 수는 없지만 미련한 사람도 일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자기 일을 할 수는

있는 것 같다.

나는 산 올라가는 것을 즐긴다.

축구 즐기고 남 도와주는 것을 즐기고 어려운 가운데도 목회하듯이 말이다.

산꼭대기에서 아무도 부르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숨을 헐떡이면서 미련스럽게 올라간다.

정상에 이르면 성취감을 느끼고, 일망무제 (一望無際) 그 시원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거의 매주 가는 북한산이나 처음 가는 산에서 다 같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처음 가는 호젓한 높은 산에서 받는 느낌은 새로운 도전정신과 호기심, 편안함등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선불교에서는 선방에 앉아서 참선하는 방법을 권하는데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걸으면서 생각할 것을

권한다.

산을 올라보면 힘든 가운데도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힘들고 높은 산은 더 그런 것 같다.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와는 달리 불교도들은 먼 길을 걸어서 히말라야에 있는 카일라스 산을 순례한다.

차를 타기도 하지만 워낙 험한 산이다 보니 걷는 길이 많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들은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실패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아마

이 말은 단순히 남을 위한다기보다 남의 눈치보고 산다는 말이 아닐까?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면 진정으로 남을 위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 일도 행복하게 해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서화가이며 문장가였던 유한준은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볼 수 있게 된다고 했는데 행복하게

즐기면서 일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나

그 일을 사랑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 때로는 큰 일을 추스리는 것보다 더 힘들 때가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고 보면 한 때의 일이다.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이 뭐꼬?"를 생각해보라.

마음에서 많은 문제가 생기고 또 해결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성경은 말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믿음은 행동에 옯겨져야 진짜 믿음인데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실제 행동으로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면 믿음대로 사는 것이 좀 더 쉬워질까?

 

 

오늘 설교중에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미 다들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겠지만 다시 한번 인용한다.

미련한 사람은 아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아는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知之者 不如好之者(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이다.)

 

 

내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내 후배 목사님 중에는 축구를 엄청 좋아하는 목사님이 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한 때는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노는 데만 너무 정신이 팔린 것이 아닌가

오해한 적도 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서 아주 효율적인 목회와 선교를 하고 있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축구를 하는데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에게 아주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논다.

중국이나 동남아등지로 가서 그곳에서 축구시합도 하고 축구용품도 나눠주면서 복음도 나눠주고 사랑도

나눠 준다.

특히 그의 말에 의하면 중국 같은 곳에서는 이런 모임이 선교정책에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하면서 복음도 전하고 선교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게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또한 목회도 특이하다면 좀 이상할 지 몰라도 다른 목사님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한다.

많은 목회자들은 수천명 모이는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꿈과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잘못 된 것도 아니고  해서는 안 될 일도 아니다.

목회를 잘해서 교인들이 몰려 오는데 못오게 할 수 없지 않는가?

하지만 이 후배 목사는 교인이 어느 정도 늘어나면 그 아까운 교인들을 떼어서 새로운 교회를 근처에 하나

더 세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미 그런 교회의 숫자가 상당히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라고 해서 어려움이 왜 없고 욕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래서 그는 내 눈에는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또 내 친구중에는 중학교 교장이면서 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나는 흉내도 낼 수 없게 바쁘게 산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행복한 모습이다.

30수년간 친구로 지내오면서 미국 여행을 두 집이 같이 하자고 말은 했는데 아직도 이 친구가 너무 바빠서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정년퇴직하면 가능할까?

 

 

그런데 이 친구는 남의 일 도와주는 것을 아주 즐기면서 한다.

마당발이어서 아는 지인들도 엄청나게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의 경조사를 다 챙긴다.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자기 돈 써가면서 도와준다.

그러면서도 허허 웃고 다닌다.

대학 작곡과 후배들 가운데 작품을 쓰는 후배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이 후배들이 작곡으로 입신할 수

있을까 도와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자기 학교로 불러서 밥사주고 곡 사주고 하면서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늘상 싱글벙글한다.

이런 바쁜 가운데도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서 방학때 한번 쯤은 꼭 같이 하려고 한다.

지난 겨울에는 경상도 청도에서 개척 목회하는 친구를 찾아가서 근처에 사는 친구들을 다 불러들여서

2박 3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 친구는 대학 다닐 때 메시야 연주회를 할 때 준비위원장을 했는데 일을 얼마나 잘 했는지 모른다.

이런 연주회에는 많은 비용이 드는데 학교에서 주는 돈은 언제나 모자라기 마련이다.

그는 직접 교회들이나 스폰서들을 찾아다니면서 모금을 했고 얼마나 열심히 했든지 연주회가 끝난 후에는

돈이 남아서 그 돈으로 합창단원 전체에게 리셉션 파티를 열어주고 학교 사무실에는 소파를 사 줄 정도였다.

일을 즐기니까 이런 엄청난 효율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일을 즐기는모습을 지금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해 보인다.

 

 

또 한 친구는 케냐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그 후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오래 하였다.

지금 그는 시골에서 교인 한 가정으로 개척목회를 시작했다.

지난 겨울에 그를 만났는데 그의 얼굴은 걱정보다 안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같이 믿음 약하고 여린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이미 시작했다.

그라고 내가 모르는 염려가 없겠는가? 

이 친구가 케냐 선교사 시절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도 바울이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을 농담처럼 했지만 그 말이 그의 생활에서 얼마나 실천에 옮겨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빌립보 4장 12절 말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
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나는 위의 말을 도저히 실천에 옮길 수 없다.

조금만 배 고파도 걱정하고, 궁핍하면 정신을 못 차린다.

그는 케냐나 미국 이민 목회에서 위의 말씀을 철저히 적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한 목회자로 보인다.

 

 

위의 사람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나도 저런 경지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같이 미련한 사람도 희망이 없지는 않다.

미련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을 이길 수는 없지만 미련한 사람도 일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자기 일을 할 수는

있는 것 같다.

나는 산 올라가는 것을 즐긴다.

축구 즐기고 남 도와주는 것을 즐기고 어려운 가운데도 목회하듯이 말이다.

산꼭대기에서 아무도 부르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숨을 헐떡이면서 미련스럽게 올라간다.

정상에 이르면 성취감을 느끼고, 일망무제 (一望無際) 그 시원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거의 매주 가는 북한산이나 처음 가는 산에서 다 같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처음 가는 호젓한 높은 산에서 받는 느낌은 새로운 도전정신과 호기심, 편안함등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선불교에서는 선방에 앉아서 참선하는 방법을 권하는데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걸으면서 생각할 것을

권한다.

산을 올라보면 힘든 가운데도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힘들고 높은 산은 더 그런 것 같다.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와는 달리 불교도들은 먼 길을 걸어서 히말라야에 있는 카일라스 산을 순례한다.

차를 타기도 하지만 워낙 험한 산이다 보니 걷는 길이 많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들은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실패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아마

이 말은 단순히 남을 위한다기보다 남의 눈치보고 산다는 말이 아닐까?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면 진정으로 남을 위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 일도 행복하게 해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서화가이며 문장가였던 유한준은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볼 수 있게 된다고 했는데 행복하게

즐기면서 일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나

그 일을 사랑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 때로는 큰 일을 추스리는 것보다 더 힘들 때가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고 보면 한 때의 일이다.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이 뭐꼬?"를 생각해보라.

마음에서 많은 문제가 생기고 또 해결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성경은 말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믿음은 행동에 옯겨져야 진짜 믿음인데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실제 행동으로는 그러지 못하고 산다.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면 믿음대로 사는 것이 좀 더 쉬워질까?

 

 

 
 현상민79성악 14.03.09. 16:51
ㅎㅎ 행복합니다...
행복합시다...
행복해야 합니다.
 
 
 
 김은자86성악 14.03.10. 08:20
당신처럼 멋진 선배님이 계셔서 ......,
우린 늘~행복합니다.
선배님 생각하며 칠보산(수원,안산경계에 있는 야트막한 산)에 오르렵니다.......
 
 
 
 김성수77작곡 14.04.06. 20:24
언제 이런 글을 썼노?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약간은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요?
ㅎㅎ
 
 
 
 문승호 지휘75 14.04.20. 21:11
난 너같은 친구와 이글에 등장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너무너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