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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소백산 자락길 1구간 비로사~초암사 15'10-31 본문

트래킹/국내 트래킹

소백산 자락길 1구간 비로사~초암사 15'10-31

singingman 2022. 12. 2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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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선생님 15분과 속초에서 안희자 선생님이 와서 16명이 함께 소백산 자락길을 가다.

원래는 풍기에 있는 11구간을 계획했는데 이 구간이 전부 포장도로여서 산길을 좀 걷기로 하고 비로사 - 초암사간을 걸었다.

주차장 까지의 거리 때문에 3시간 반정도를 걸었다.

집에 와서 다시 검색해보니 우리가 걸은 구간이 자락길 1구간의 산길이었다.

1구간 전체는 소수서원에서 삼가리까지 가는 12.6Km인데 우리는 그 중 약 8Km를 거꾸로 걸었다.

차를 대절해서 가니까 편안히 잘 갔다올 수 있었다.

이 구간은 그리 경사가 심하지 않고 산길은 1시간 반이면 되지만 비로사 아래 주차장에서 비로사까지의 거리와 초암사에서 배점 주차장까지의 거리 때문에 그리고 도중에 밥먹느라 시간이 이렇게 걸렸다.

지금 풍기는 사과가 익는 계절이어서 사과를 실컷 보고 왔다.

날씨가 좀 싸늘하긴 했지만 걷기에는 오히려 아주 좋았다.

특히 오늘의 High light인 부석사를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출발하기 전 다같이 맨손 체조 시작~~~

 

이 사람들이 모두 함께 걸었다.

 

소백산 자락길 1구간이다.

 

원없이 구경하고 교감 선생님이 맛있는 사과를 사주어서 먹기도 하다. 나는 고등학교 때 기차가 사과밭속을 약 한시간 가량 달리는 영천 대구 구간을 매일 아침 다녔다.

 

박공주가 지금 안희자 선생님께 "저 사과가 예뻐, 내가 예뻐?" 묻고 있다. 사과가 예쁘다고 말했다가는 오늘 무사히 집에 못간다. 다른 사람들은 사과를 카메라에 담고 보느라  딴 생각이 없다.

 

올해는 너무 가물어서 단풍이 예쁘지 않지만 간혹 이렇게 예쁘게 물든 나무도 있다.

 

오늘 아침 날씨가 엄청 추웠다.

 

모처럼 나오니까 참 좋다고 강선생님은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삼가 탐방지원센터에서 초암사 아래 있는 배점 주차장까지 약 8km를 걸었다.

 

비로사까지는 포장도로를 걷는다. 조형섭 선생님은 혼자서 가을을 즐기고 있다.

 

노박나무 열매가 아주 탐스럽다.

 

햇살이 참 좋다. 사진을 잘 못 찍는 사람도 햇빛 시간을 잘 맞추면 누구나 훌륭한 사진사가 될 수 있다.

 

원래 이 구간은 차를 타고 비로사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입구에서 차량 출입을 막아서 걸어가는데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다람쥐는 프로모델 뺨치게 포즈를 잘 잡아준다.

 

비로사 일주문에서 우리는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가야 초암사 쪽으로 간다.

 

길에서 올려다 본 비로사.

 

월명루 아래를 통과해서 누하진입한다.

 

종각에는 종만 있다.

 

석등이었을까? 승탑이었을까?

 

이 절을 창건한 스님의 공덕비?

 

이런 석물이 많이 있는 걸로 봐서 전에 이 절이 상당히 큰 절이었던 같다.

 

절 이름이 비로사니까 당연히 주전각은 비로자나불이 있는 적광전이지.  아래 사진은 내가 못찍어서 http://blog.daum.net/rlatkdtnwlq/7209310 에서 복사해왔다.

 

적광전 안에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둘이 앉아있네.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은 어디로 가고? 아미타불은 집이 없나?  왜 여기 앉아있지? 보물 996호라고.(다른 사람의 사진을 퍼왔다.)

 

삼성각에서 내려다 본 비로사

 

당간지주가 이 정도면 상당히 큰 절이었을 것 같다

 

당간지주의 용도는 위 사진과 같다. 위 사진은 양산 통도사 당간이다.

 

비로사를 벗어나서 초암사쪽으로 올라간다.

 

이 산속에 작은 마을이 있다.

 

이 팻말보고 오른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드디어 흙길을 밟고 간다.

 

전나무 숲이라는데 이 산에는  키 큰 낙엽송이 아주 많다.

 

도중에 배가 고파서 도저히 못 가겠다는 김혜진 선생님의 협박 때문에 길 옆에 낙엽을 깔고 앉아 다 함께 점심을 먹고

 

어제 밤에 여기는 얼었다가 녹은 흔적이 있다. 이번 트래킹에서 가장 행복해 한 강선생님.

 

초암사에 왔다. 여기도 적광전이다. 소백산 정상 봉우리 이름이 비로봉이라서인가?

 

여기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 옆에 부처들이 제대로 앉아있다.

 

반야용선도 - 극락을 갈 때 배를 타고 물을 건너간다. 기독교에서는 요단강을 건넌다고 말하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스틱스 강을 건넌다.

 

삼성각 안에는 아래 사진에 보이는 산신령과 칠성 그리고 독성이 다 있다.

 

초암사에는 대웅전도 있고 적광전도 있다.

 

통일 신라시대에 가장 흔했던 3층 석탑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원래 대웅전이 있었는데 적광전은 최근에 다시 지은 듯,

 

이 다리 이름이 해탈교나 극락교라야 하는데...

 

승탑밭이 절 한참 아래 있다.

 

이 계곡에는 노박덩쿨이 많다. 노박은 색깔이 변한다.

 

사과는 정말 원없이 본다.

 

이 열매들은 무슨 열매일까? 색깔이 참 밝다.

 

이게 거북바위?

 

단풍이 하도 고와서...

 

늦게까지 수국이 남아있다.

 

부석사에 왔더니 사과 축제 한다. 3주 전에 문경새재 갔더니 문경사과 축제 하던데 영주사과가 더 늦게 익나?

 

오가피 열매란다.

 

부석사 입장료는 성인 1,200원

 

부석사 올라가는 길에는 은행이 떨어져서 냄새가 고약하다.

 

왜 여기가 태백산이지? 부석사 일주문 - 일주문은 문이 없다. 기둥만 있고, 이건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란다.

 

단풍이 하도 좋아서

 

 

 

일주문부터 이 천왕문까지가 3단으로 된 부석사의 제일 아랫단으로 사찰 건축의 기승전결 중 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만다라 9품 중에는 하품에 속하는 지역이다.

 

동방 지국천왕은 악기를 연주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남방 증장천왕은 보검을 들고 마귀들을 한칼에 없앤다.

 

서방 광목천왕은 용을 잡을 정도니까 도술이 아주 뛰어난 천왕

 

부처로부터 가장 많은 설법을 들은 똑똑한 북방 다문천왕

 

이 문은 안이 비어있는데 무슨 용도로 쓸려고 지었을까?

 

종루 아래  이 사리탑들이 있다.

 

종루는 올라가면서 보면 지붕이 팔작지붕인데 올라가서 뒤돌아보면 아래 사진처럼 맞배지붕이다. 왜 이런 특이한 구조를 갖는가에 관해 소백산줄기를 내려다보는 전망을 위해 간소하게 했다는 설명이 있다.

 

종루에는 허락을 받은 사람들만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있는 듯...

 

종루에는 종만 빼고 목어와 운판 법고가 있다.

 

이 사진은 2013년 9월에 찍은 사진이다. 앞에 보이는 건물이 안양루이고 뒷건물이 무량수전이다. 이 사진에서 보듯이 부석사는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의 하품과 천왕문에서 안양문까지의 중품과 무량수전의 상품으로 이루어진 3단 구조로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안양문이니까 이 문을 들어서면 극락이다. 그러니까 이 문을 들어서서 정면에 바로 보이는 무량수전이 극락이 되는 것이다. 무량수전의 다른 이름이 극락전이나 안양전이기도 하니까. 어떤 스님이 쓴 책에 보니까 안양이란 말이 극락이니까 안양 제일교회는 극락 제일교회가 된다는 재미있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안양문 위에 있는 부석사라는 글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안양문을 들어가서 뒤돌아보면 안양루라고 되어 있다. 누하진입이니까 극락에 들어갈 때는 머리를 숙이고 겸손하게 들어가라는 이야기?

 

무량수전 앞에 있는 이 석등은 정말 잘 생겼다. 얼마나 잘 생겼으면 국보가 될 정도일까? 얼핏 봐도 앙련에서 복련 사이의 8각기둥이 아주 늘씬하고 아름답다.  화사석에는 보살상까지 새겨져 있다.

 

1994년에 우리 나라 고건축 전문가 200명에게 건축 전문 잡지 '플러스'가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물었더니 압도적으로 무량수전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배웠는데 몇년 전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건물로 밝혀졌다.

이 건물을 설명할 때 배흘림 기둥과 안쏠림,귀솟음등을 많이 언급하는데 귀솟음이 착시현상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에 대해 어떤 장인은 지붕 무게 때문에 현실적인 이유에서 한 것이라고 말한다.(http://blog.daum.net/tasofhso/16138171)

전면 5칸, 옆면 3칸으로 된 건물이고 팔작지붕에 주심포 건물이다.

'그 절이 그 절'이었던 시절에는 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유한준은 석농화첩 발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곧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곧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유한준 (조선 후기의 문장가.서화가)

 

이 글이 공민왕의 글씨라고 한다.

 

이 기둥이 바로 그 유명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그 기둥이다.

 

안쏠림이 느껴지나요?

 

무량수전 안에 있는 이 아미타불은 소조불상으로 소조란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진흙을 붙여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불상은 문을 열면 정면에 불상이 있는 다른 법당과는 달리 왼편 즉,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쳐다보고 있다. 왜 이런 배치를 하고 있느냐에 설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한 두가지를 살펴보면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있는 부처니까 동쪽을 바라보고 앉으면 자연히 그 앉은 자리가 서쪽이 되니까 극락인 서방정토를 잘 묘사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무량수전 동쪽편에  따로 떨어져 있는 탑과 마주보게 하려는 배치라는 설도 있다.

 

무량수전 천장은 따로 장식을 하지 않고 내부가 그대로 드러나게 두었다.

 

이 3층 석탑은 무량수전 동편에 있다. 탑을 이 자리에 세운 배치가 독특한 배치다. 그렇다고 금당과 탑을 따로 배치한 양원가람으로 보기는 어렵고... 불교에서 탑은 신앙의 대상이다. 석가모니 사후 그의 사리를 넣은 탑이 신앙의 대상물이었지만 더 이상 탑에 넣을 사리가 없어지자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만큼 절에서 탑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이야기다.

 

저 멀리 보이는 능선이 정말 아름답지요?

 

배롱나무 꽃이 피어있는 사진은 13-09-17일에 찍은 사진이다.

이 광경을 보니 최순우 선생의 글이 또 생각난다. 그는 미술품에 대한 대단한 안목을 가지기도 했지만 글솜씨가 너무 좋아서 부럽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부러원한 것보다 더 부럽다. 아래 그의 글이 아주 마음에 와 닿는다.

 

 

" . . .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 .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 .

 

응진전에는 16나한들이 다 있다.

 

자인당에는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두고 비로자나불 불상이 양옆에 있다.

 

단하각이 어떤 전각이냐고 스님에게 무어봤더니 단하라는 성인을 모셨다고 한다.

 

이 사람이 단하?

 

 

아래 벽화들은 그러니까 다시 그린 것들이라고...

선비화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택도없는 말을 믿고 이 나무를 잘라가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볼 수도 없게 이렇게 막아놓은 스님들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 치고는 너무 가는 것 아닌가?

 

이 절의 창건설화와 관련해 중요한 인물인 선묘낭자를 여기서 만난다.

 

중국에 유학 온 의상을 사모한 중국여인 선묘

 

이 그림들은 아래 설명을 보면 이해가 가는 그림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갔을 때 양주(陽州)에 이르러 병을 얻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때 그의 딸 선묘(善妙)낭자가 의상에게 연정을 갖게 되었다. 의상의 나이 37, 선묘의 나이 17살쯤이다. 하지만 의상은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았다. 

선묘낭자의 정성으로 몸이 완쾌된 의상은 다시 길을 떠나 종남산 지상사에서 10년을 공부하고 671년 급거 귀국하는 길에 선묘의 집을 찾았지만 만나지 못하고 뱃길로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선묘는 비단 선물을 챙겨 산동성(山東省) 해안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이 탄 배는 까마득히 멀어져 간 뒤였다. 선묘는 들고 있던 선물을 의상의 배를 향해 던지며 “원컨대 이 비단이 의상대사님께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 하니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의상이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자신도 용이 되게 축원을 하고 바다로 몸을 던지니 과연 용으로 변해 의상의 배를 호위해 무사히 배가 신라에 닿았다. 그 덕에 당나라의 침략을 사전에 막아낼 수 있게 됐다.

신라로 온 선묘낭자는 다시 의상의 꿈에 나타나 500명의 이교도들을 제압할 방법을 일러주었다. 다음날 아침 의상은 선묘낭자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한 번 두들기니 커다란 바위가 공중에 떠올랐다 내려앉았다. 용으로 화신한 선묘낭자가 들어올린 것이다. 이를 두 번, 세 번 이어서 반복하자 겁먹은 이교도들이 일제히 의상대사에게 무릎을 꿇고 함께 절을 짓는데 앞장섰다.

그렇게 공중에 세 번 뜬 바위가 무량수전 서쪽 산비탈에 있는 ‘부석(浮石)’ 바위다.

(위의 글은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40421000060&md=20140424005937_BL 에서 복사해 옴)

 

이 돌이 바로 이 중환이 택리지에서 돌이 공중에 떠 있다고 사기친 부석

 

이 경치들이 정말 좋지요?

 

지장보살은 모세와 바울을 생각나게 한다. 모세나 바울은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해줄 것을 기도했고 지장 보살은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다 제도할 때까지는 성불도 미루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