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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17-10-20 본문
시험 마지막날 경복궁을 가다.
재작년인가 응선이가 왔을 때 한번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는데 실수로 사진을 다 날려버려서 다시 가서 찍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되고 3년 후인 1395년에 지어졌다.
경복궁이라는 이름과 주요 전각의 이름은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지었다고 한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은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이후 확장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만다.
그 후 270여 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1867년 흥선 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증건한 경복궁은 500여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빽빽하게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외전과 내전, 휴식을 위한 정원 시설들을 조성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일제는 계획적으로 경복궁을 훼손하였다.
1915년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 이상의 전각을 헐어버렸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다.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으며 조선총독부 건물은 철거했다.
일본 장수 오제키의 '조선 정벌기'에 의하면 1592년 5월 3일자에 '안으로 들어가보니 궁궐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중략)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고 적혀
있어 왜군이 들어온 후 그들이 불질렀을 가능성이 많이 있다.
한편 선조수정실록에 1592년 4월 30일자에 의하면 왕실과 조정이 서울을 떠나자 성난 백성들에 의해
'도성이 불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복궁을 두른 담장의 길이는 2,404m에 달하고 평균 높이는 5m,두께는 2m 정도다.
담장의 사방에 4대문을 만들어 1426년(세종 8년)에 건춘문-동, 광화문-남, 영추문-서, 신무문-북 이라
불렀다.
이것은 4계절과 나무 -불-쇠-물을 상징하고 가운데 자리한 근정전을 중심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전통적인 오행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광화문이 있는 전면 담장 두 끝 모퉁이에는 망루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세워 조선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형식을 갖추었다.
서십자각은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되고 동십자각은 도로 확장으로 인헤 담장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궐 밖의
길 한가운데 홀로 서 있게 되었다.
경복궁 홈페이지에 소개된 순서대로 나도 간다.
1. 광화문과 4대문 그리고 궁궐 담장
2. 근정전 일원
1867년 중건된 것으로,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 지은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270여 년 만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중건 당시 태조 때의 건물을 원래대로 복구하지 않고 회랑(廻廊)을 단랑(單廊)에서 복랑(複廊)으로 바꾸고 월대(月臺: 궁전 앞에 있는 섬돌)도 새로 만드는 등 변화가 있었다.
근정전은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정전(正殿)으로, 때로는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양로연(養老宴)이나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
일화문은 문신들이 드나들던 문이고 월화문은 무신들이 다니던 문이다.
문신 우대 정책이 출입문과 다니는 길에서도 나타난다.
바닥의 돌이 매끈하지 않은 이유는 궁전을 다닐 때 뛰어다니지 말고
조심하라는 의미와 햇빛의 난반사를 막고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3. 사정전 일원
경복궁의 편전으로 임금의 집무실이다. 1395년(태조 4)에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졌으나 1553년(명종 8)에 불탄 뒤 재건되고 이후 임진왜란이후 다시 소실되었다가 1867년(고종 4)에 중건되었다. 2012년 3월 2일에 보물 제1759호로 지정되었다.
4. 강녕전과 교태전
강녕전은 왕의 침전이고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5. 흠경각과 함원전
헌종(24대)의 어머니인 신정황후 조씨는 고종(26대)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신정왕후의 거처를 궐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은혜에 보답했다. 자경이란 이름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당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 의미는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안어른께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에 재건하여 경복궁 침전 전각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옛건물이다.
7. 동궁 일원
동궁 중에서 자선당은 서쪽에 있고 세자와 세자빈이 거처하던 내전이고 동쪽의 비현각은 공부를 하며 정무도 보던 외전에 해당한다.
조선 초에는 동궁이 궐밖에 있었으며 궐 안에 동궁전으로 자선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1427년(세종 9년)이다.
몇 차례 소실을 거친 뒤 1867년에 재건된다.
1914년에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 개최를 핑계로 완전히 철거했다. 현재의 건물은 1999년에 복원한 것이다.
8. 함화당과 집경당
함화당과 집경당은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신정왕후가 이 곳에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전의 용도로도 쓰였던 것 같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 당시 여기서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도 있다.
9. 향원정과 건천궁
향원정에는 사각형 연못이 있고 정자가 있는 섬은 천원지방의 사상에 따라 원형이다.
다리를 원래 있던 북쪽으로 옮기고 기울어진 정자를 보수하기 위해 지금은 공사중이다.
고종은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기록에 의하면 향원지 북쪽에는 최초의 발전소를 지어 건청궁의 밤을 밝혔다.
건청궁 내에 있는 관문각은 원래 전통적인 목조건물이었으나 고종의 명에 의해 러시아인 건축가 시바틴이 1891년에 서양식 3층
건물로 다시 지었다. 향원지의 물을 이용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기를 '물불'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아시아 최초의 전기 사용이었다.
에디슨은 그 무렵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세상에, 동양의 신비한 왕궁에 내가 발명한 전등이 켜지다니... 꿈만 같다.'
건천궁은 고종이 아버지 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세웠다.
궁 안의 궁이다.
10.집옥재 일원
1876년에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가 1885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서 생활했다.
1891년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던 집옥재와 협길당등을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 와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했다.
집옥재는 양옆 벽을 벽돌로 쌓아 만든 청나라풍 건물로 밖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중2층으로 되어 있다.
팔우정은 팔각 누각으로 기둥 상부에 청나라풍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협길당은 조선 고유의 건물로 온돌방을 두어 휴식 장소로 사용했다. 이 세 건물은 복도로 연결된다.
명성황후가 여기서 일본 자객들에게 시해되었다고 한다.
집옥재는 도서관 역할도 하고 제일 왼쪽에 있는 팔각정은 현재 카페로 사용되고 있고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고종이 최초로 커피를 마신 사람이는 설도 있다. 커피에 아편을 많이 타서 고종을 시해하려다 실패한 사람도
있었지.
13. 수정전과 궐내각사
수정전은 왕실업무를 위한 관청이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던 관청들을 궐외각사라 하고 궁내에 있는 관청들을 궐내각사라 했다.
근정전 서쪽에 위치한 궐내각사는 크게 네 부류로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교서관등은 왕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정치 행정기구였다.
내반원, 상서원, 상의원, 사옹원, 사복시 등은 왕족의 생활과 활동을 보좌하던 실무 관서였다.
흠경각, 보루원, 관상감, 간의대 등은 천문과 시각을 관측하는 과학 부서였고
도총부 ,내병조, 선전관처으 충장위 등은 궁궐 수비와 왕족 경호를 맡은 군사 부서였다.
궐내각사 중에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수정전은 세종 때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으로 쓰였던 곳이다.
관청 건물로는 드물게 월대를 두었고 보물 1760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이 건물을 보지 못했는데 그 후에 복원된 것 같다.)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창덕궁도 건축한 천민 출신인 박자청이 설계하고 건축했다.
궁의 수해를 조절하는 기능을 가진 연못이기도 하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867년에 재건했다.
세종 때 교서관에 근무하던 구종직이란 자가 숙직을 서던 어느 밤 경회루에 몰래 숨어들어가 풍치를 즐기다가 왕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가 경회루를 구경하고 싶어 미관말직의 몸으로 죄를 지었다고 고하자 세종은 풍류를 아는 자라 여겨 노래를 불러 보라 하였다. 춘추까지 외우게 한 왕은 다음날 구종직을 불러 정9품이던 그에게 종5품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11. 태원전 일원
왕자 출신이 아니었던 고종은 부친 흥선 대원군과 함께 왕권 승계의 정통성 시비에 대응해야 했다.
그 일환으로 태원전을 지어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심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1868년(고종 5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태원전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이후 명성 황후의 시신을 모시는 빈전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1979년 이른바 '경복궁 모의'를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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