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경연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 책. 성군들은 경연을 좋아했고 광해군이나 연산군같은 폭군들은 경연을 싫어했다. 세조나 정조는 경연에서 자기들이 신하들에게서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을 가르치려고 했다. 경연은 왕의 공부시간일 뿐만 아니라 왕과 신하들이 함께 협의해서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도 왕이 될 사람을 공부시키는 일이니까 중요한 일이었고 뛰어난 학자들이 그 일을 담당했다. 집현전과 홍문관은 이 경연을 담당하는 중요한 관청이었다.정조대의 규장각도 마찬가지이고. 규정대로라면 하루 세번은 기본적으로 경연을 열고 경우에 따라서는 주강 야강도 있었지만 상을 당하거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경연을 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날씨 건강등을 핑계로 경연을 게을리 했다.
들어가는 이야기
1장 문치와 경연 - 조선시대 문치란
문치와 왕도정치
문치라는 지평
경연 관청, 집현전과 홍문관을 세우다
경연 현장 생중계
2장 살 만한 나라를 위해 - 하루에 세 번 또는 다섯 번
공과 사를 구분하다
적어도 하루 세 번, 밤에도
세자의 공부, 서연
똑똑함을 자부한 왕들의 경연
3장 어지러운 시대에는 - 아파서 미루고 추워서 미루고
찬탈이 낳은 비극
네가 대신 출석해라
나는 배울 게 없다
아픈데 어쩌란 말이냐
4장 함께 공부할 때 세상이 바뀐다 - 21세기의 경연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길
21세기 시민의 경연
혜경궁은 경진년(1760) 이후로 세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영조가 내린 세자를 폐위시키는 반교[廢世子頒敎]」에 따르면, 사도세자를 낳은 어머니인 선희궁(영빈 이씨)이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을 말하면서, 내관과 나인 백여명을 죽였고 불에 지지는 악형을 가했다고 했습니다.
이듬해 1761년 1월 세자는 자신이 사랑하던 빙애(경빈 박씨)를 죽였습니다. 옷을 갈아입다가 의대증이 발병하여 때렸는데, 얻어맞은 빙애는 세자가 나간 뒤 신음하다가 절명했지요. 빙애를 구타할 때 세자는 빙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돌이 갓 지난 왕자 은전군도 칼로 쳤고, 칼 맞은 은전군을 문밖 연못에 던졌습니다. 이를 알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은전군을 구하여 이름을 하엽(荷葉生), 곧 '연잎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조는 그의 자(字)를 연재(憐哉), ‘가련하도다!'로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서연이 있고 경연이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비극적 상황이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원치 않게 세자가 되었던 한 인간의 좌절과 파탄, 그리고 그 좌절과 파탄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왕정은 제한적인 선택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뒤주 사건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 왕정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태종은 스님에게 보내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이그건 고려 말의 잘못된 풍습이라고 반대하여 성균관으로 보냅니다.
강의로는 기본적으로 정규 강의인 법(法講)과 공개강의인 회강(會講)이 있었습니다. 법강은 아침, 점심, 저녁 매일 세 차례 시행되었고, 빼놓지 말고 해야 하는 강의입니다. 책을 덮고 전날 배운 것을 외우는 것은 수업 시작 전에 당연히 하는 일이었으며, 5일마다 정식 시험인 고강(考講)이 있었습니다. 고강은 경서의 뜻풀이, 그러니까 해석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세자는 시강원에서 시험도 보았습니다. 물론 성적도 매겼을 테지요. 시험을 보면 점수가 있겠지요? 네 단계, 혹은 다섯 단계의 채점 방식이 있었습니다. 통했다는 뜻의 통(通), 그럭저럭 했다는 략(略), 조잡하게 했다는 조(粗), 못했다는 뜻의 불(不)이 있습니다. 통 앞에 순수하다. 완벽하다는 의미의 순(純)을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클 대를써서 대통(大通)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