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노래하는 사람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박석무 저 한길사 2003년 530/558쪽 ~12/27 본문

독서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박석무 저 한길사 2003년 530/558쪽 ~12/27

singingman 2023. 4. 15. 09:38
728x90

저자는 유신 반대와 광주민주화 운동때 옥고를 치른 사람이다.
저자를 보면서 맹자를 철저히 공부한 사람들은 투사가 된다는 생각이 점점 더 확신이 생긴다.
도올과 함께 다산에 대해 8시간에 걸쳐 강의한 내용을 영상으로도 보았다.
다산 연구소 소장을 할 만큼 다산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그를 깊이 연구했다.

다산은 1762~1836년까지 살았다.
조선의 르네쌍스라고 불리는 정조 때 사람으로 정조로 부터도 많은 총애를 받았지만 그의 사후 당시 당정 싸움 때문에 천주교를 믿는 서학으로 몰려서 장기현과 강진으로 유배를 가서 18년이나 살았다.
하지만 이 때 500권에 달하는 그의 책들이 다 쓰였다.
그의 사상을 말하면 저술들에서도 불 수 있듯이 불쌍한 백성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능력이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마과회통,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은 의술과 관리들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기술 그리고 공정한 재판을 위한 내용들이 자세히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의 후손이 도올 학당에서 말한 내용을 보면 자기는 어릴 때 자기 집안이 의사집안인 줄로 알았다고 한다.
사실 왕가에 병이 났을 때 다산을 두번이나 불렀지만 미처 손 쓰기도 전에 환자들이 죽은 기록도 있는 것으로 봐서 다산은 당시 의술로도 당대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던 것 같다.

어릴 때는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한 때는 천주교에 심취해서 세례도 받았고 그가 천주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지금도 유학자들과 천주교단 사이에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형들 가운데 정약종은 신앙 때문에 순교하기도 했고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기도 했던 것으로 봐서 그의 집안에 천주교 신자들이 한 때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20대에 홍문관에 들어가서 정조로부터 여러가지 주문을 받을 때마다 잘 해결했다.
정조가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 한강을 폼나게 건너도록 배다리(부교)도 만들었다.
수원 화성을 설계해서 거중기등 건설기계를 동원한 덕분에 백성들을 강제노역 시키지 않고 자금을 4만냥이나 줄였고 10년만에 완공하라는 성을 34개월 만에 완공했다. 그것도 6개월의 쉬는 기간이 있었으니 실제로는 28개월이다.
성호 이익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실학의 대가가 되었으며 경서에서도 주자를 극복하고 실사구시를 주장하는 그의 해석을 내어 놓았다.

경학뿐만 아니라 시에 있어서도 서정시나 자연을 노래한 뛰어난 문장들을 남겼다.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명을 잘 따라서 훌륭한 학자로 성공했다.
고산 윤선도가 6대 외조부이고 공재 윤두서가 다산 어머니의 증조부였다.
자신은 당시 풍홍달서로 이름을 날리던 풍양 홍씨 집안으로 장가 가서 15살 때 한 살 위의 부인을 맞았다. 
그의 집안은 8대째 옥당(홍문관)에 들어간 뛰어난 집안이었다.

1800년에 정조가 죽고 나자 어린 순조를 수렴청정하던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는 벽파 집안이었다.
남인 시파 계열이었던 다산은 이때부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다음 해인 1801년에 지금의 포항시인 장기현으로 유배를 갔다가 홍사영 백서 사건 때 다시 서울로 불려와시 옥살이를 하고 고문을 받은 후 혐의가 풀렸지만 심환지의 주장 때문에 다시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하지만 어찌보면 이 유배 때문에 오늘날의 다산이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사회를 보면 유교 사회이긴 하지만 절에서 독서하거나 스님들과 교제한 기록들을 보면 학식이 풍부한 승려들과의 교제도 빈번했던 것 같다.
스물 두살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스물 여덟에 문과에 합격해서 정조로부터 총애와 신뢰를 받고 업적들을 남기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적들도 또한 생기게 마련이다.
특히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시대를 살았으니...
사표를 내고 출근을 하지 않아 해미로 10일간 유배를 간 적도 있다.

1819년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 조정에서 그를 다시 기용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서용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암행어사로 활약할 때도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한 일이 많이 있었다.
충청도 온양에 있는 봉곡사에서는 성호 이익의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다산 초당에 있을 때는 뒤에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의 혜장스님과도 가까이 지내면서 도움을 받았고 산 아래 있는 율동 마을의 외가척 사람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는 다른 책에서 가져온 아래 도표에서 보듯이 퇴계의 제자인 남인학자로 분류되지만 현실 정치에 깊이 관여한 점에서는 어쩐지 퇴계 보다는 노론 학자인 율곡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다산 초당

 

 

 

울산 도호부사로 있던 아버지를 영천 은해사에서 만나고 오는 길에 들렀다.

 

 

다산 초당 뒷산에 있는 백련사

 

 

 

 

 

 

 

 

 

 

 

 

 

 

다산의 매조도

 

 

 

 

 

 

 

 

강진 사의재에서 지내다가 다산 초당으로 올라간다.

 

 

 

 

 

 

정조가 수원으로 갈 때 한강을 건너기 위해 다산이 만든 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