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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지리산의 추억 본문
내가 처음으로 지리산을 오른 것은 대학 다닐 때입니다.
3월 개강을 바로 앞 두고 구례 화엄사에서 노고단을 올랐습니다.
당시에는 아마 성삼재까지 차가 올라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젊은 혈기만 믿고 경험도 없이 눈이 쌓인 산길을 올라가는 일이 아주 힘들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의식주를 다 짊어지고 다니던 시절이니 배낭도 무겁고 제대로 먹지도 않고 눈길을 올라가다 보니 결국 탈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마 노고단 산장이 없었다면 지금 이 글을 쓸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용감하고 무식한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데 당시 나는 산에 관해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학교에 있을 때 선생님 몇 분과 여름 방학 때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까지 2박 3일 종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아주 여유롭고 추억에 남는 산행이 되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끼니 때가 되면 밥을 해먹고 밤에는 산장에서 자면서 가는 산행이 아주 즐거웠습니다.
이때 미숫가루가 아주 좋은 행동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산장은 만원이어서 밤에는 산장 근처에 텐트를 치고 자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지리산은 설악산과는 달리 능선이 부드러워서 일단 노고단에만 올라서면 천왕봉까지 그리 힘들지 않게 갈 수 있습니다.
흔히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이라고 하는데 능선을 걸어보면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겨울 방학에 백무동에서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로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이 코스는 서울 남부 터미널에서 첫 차를 타면 백무동 등산로 입구까지 차가 가니까 바로 산행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산리로 내려오면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어서 당일치기가 가능합니다.
그 외에도 친구들과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오르기도 하고 정령치에서 고리봉을 가기도 하고 또 철쭉이 좋은 철에는 바래봉을 다녀온 적도 있습니다.
남명은 유두류록에서 지리산 주변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방을 돌아보는데, 동남쪽으로 남해의 뒷산이 파랗게 높이 솟고, 바로 동쪽으로 하동, 곤양의 산들이 물결처럼 널리 가득 차게 엎드리고 있다. 또 동쪽 은은한 하늘 저편에 검은 구름과 같은 사천의 와룡산(臥龍山)이 솟고 그 사이로 서로 꿰이고 뒤섞여 강과 바다와 포구를 이루는 혈맥이 경락처럼 얽혀 있다."
지리산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조선 성리학에서 퇴계와 쌍벽을 이룬 남명 조식 선생입니다.
두 사람은 1501년 같은 해에 태어나서 남명이 퇴계보다 2년을 더 살고 1572년에 졸했습니다.
경상 좌도에 퇴계가 있었다면 우도에는 남명 선생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경(敬)과 의(義)를 중시하고 실천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항상 경의검(敬義劍)과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깨어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경의검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내명자경 외단자의)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이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이런 그의 영향으로 그의 제자들 가운데는 임진란 때 의병들도 많이 나오고 올곧은 선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론을 정립하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그는 보여주었습니다.
경(敬)을 중시한 것은 남명만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모든 유학자들을 관통하는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영주 소수서원에도 가면 입구에 경(敬)자 바위가 있습니다.
그는 문정왕후와 명종을 과부와 고아라고 부를만큼 과격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지요.
그는 지리산이 너무 좋아서 정상인 천왕봉도 올라갔다 왔고 결국 지리산 밑에 집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했습니다.
태어나기는 합천에서 태어났고 젊었을 때는 아버지를 따라 한양과 처가가 있는 김해에서 살기도 했지만 조정의 부름도 거절하고 70 평생을 지리산의 품에서 보냈습니다.
부유한 처가를 만난 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는 기록에 의하면 지리산을 12차례 유람했습니다.
1528년 28세가 되던 해에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친구인 대곡 성운의 친형 성우와 함께 지리산을 처음으로 유람했습니다.
남명은 지리산 아래 살았고 대곡은 속리산 아래 살았습니다.
남명이 57세때 25년 만에 친구 대곡을 찾아 열흘 가까이 걸어가서 만나고 열흘을 머물렀던 적도 있습니다.
30세에는 처가의 도움으로 김해 신어산 아래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기도 했습니다.
61세 되던 해에 산청으로 가서 산천재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가 말년을 보낸 산청의 산천재에서는 천왕봉이 잘 보인다고 합니다.
지리산을 당시에는 두류산, 방장산 등으로 불렀습니다.
두류산이란 이름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대간이 여기까지 흘러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지리산을 좋아한 그는 시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지리산처럼'이란 시가 있습니다.
저 천석들이 종을 보라.
크게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네.
어찌하면 지리산 같을 수 있을까?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네.
이 시에서 임금이 불러도 때가 아니면 나가지 않았던 지리산 같은 남명을 볼 수 있습니다.
남명의 유두류록을 보면 당시의 유산(遊山) 풍습은 말 그대로 유람입니다.
16일이나 걸렸으니 함께 간 진주 목사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직무유기가 아닐까요?
기생도 데리고 여러 사람이 함께 다니며 즐깁니다.
섬진강을 배를 타고 가기도 하고 절에 있는 중들이 먹을 것을 들고 오기도 하고 절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합니다.
https://song419.tistory.com/m/4143
퇴계 선생님도 소백산을 유람하고 쓴 유소백산록이 있습니다.
중들을 시켜서 가마를 타기도 하고 말을 타기도 합니다.
https://song419.tistory.com/m/140
https://song419.tistory.com/m/3055
https://song419.tistory.com/m/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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