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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 레기스탄 광장, 부하라 old city 6.30 일 (쉼켄트를 출발해서 1박 2일만에 부하라에 도착하다.) 본문

여행/해외여행

사마르칸트 레기스탄 광장, 부하라 old city 6.30 일 (쉼켄트를 출발해서 1박 2일만에 부하라에 도착하다.)

singingman 2024. 7. 1.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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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출입국이 17시간이나 걸리는 바람에 타쉬켄트에서 차 안에서 쪽잠을 두시간 정도 자고 사마르칸트를 거쳐서 부하라까지 오다.
우즈베키스탄은 다른 중앙 아시아의 나라들에 비해서 농업이 어느 정도 잘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부하라까지 오는 도중에 오른편에는 목화밭이 아주 넓게 펼쳐져 있다.
사마르 칸트에서는 레기스탄 광장을 잠깐 보았고 부하라에서는 old city를 잠깐 둘러보았다.

네이버 지식 백과에 의하면 레기스탄 광장은

"'레기'는 모래, '스탄'은 광장의 뜻으로 레기스탄은 ‘모래 광장’을 뜻한다. 북쪽을 흐르는 운하 주변에 있는 모래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마르칸트의 중심지로 이곳에서 알현식, 사열식, 각종 모임 둥이 열렸다. 티무르 때는 대규모 시장이 있었고 울루그 베그 때는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교 교육기관)가 세워졌다. 현재와 같은 모습은 샤이바니 왕조 때 갖춰졌다. '레기'는 모래, '스탄'은 광장의 뜻으로 레기스탄은 ‘모래 광장’을 뜻한다. 북쪽을 흐르는 운하 주변에 있는 모래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마르칸트의 중심지로 이곳에서 알현식, 사열식, 각종 모임 둥이 열렸다. 티무르 때는 대규모 시장이 있었고 울루그 베그 때는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교 교육기관)가 세워졌다. 현재와 같은 모습은 샤이바니 왕조 때 갖춰졌다. 중앙에 티라카리 마드라사, 오른쪽에 셰르도르 마드라사, 왼쪽에 울루그 베그 마드라사가 세워져 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50숨짜리 지폐에 이곳 광장이 그려져 있으며, 국가적인 대규모 경축행사나 명절, 기념일 행사가 열린다. 겨울을 제외하고 매주 목, 토, 일요일 밤이면 ‘소리와 빛의 제전’이 열리고 있다가 세워져 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50숨짜리 지폐에 이곳 광장이 그려져 있으며, 국가적인 대규모 경축행사나 명절, 기념일 행사가 열린다. 겨울을 제외하고 매주 목, 토, 일요일 밤이면 ‘소리와 빛의 제전’이 열리고 있다."

부하라 역사 지구는
실크로드에 자리하고 있는 부하라(Bukhara)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 중세 도시 가운데 도시 구조가 많은 부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가장 완벽한 예이다. 특히 흥미로운 기념물들에는 10세기 이슬람 건축의 걸작으로 유명한 이스마일 사마니(Ismail Samani)의 묘(墓)와 수많은 17세기의 이슬람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 고등교육 기관)가 있다.

부하라 역사 지구
Historic Centre of Bukhara
유네스코 세계유산

실크로드에 자리하고 있는 부하라(Bukhara)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 중세 도시 가운데 도시 구조가 많은 부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가장 완벽한 예이다. 특히 흥미로운 기념물들에는 10세기 이슬람 건축의 걸작으로 유명한 이스마일 사마니(Ismail Samani)의 묘(墓)와 수많은 17세기의 이슬람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 고등교육 기관)가 있다.

실크 로드에 자리하고 있는 부하라는 약 25세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 중세 도시 가운데 도시 구조의 많은 부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가장 완벽한 예이다. 특히 흥미로운 기념물들에는 10세기 이슬람 건축의 걸작으로 유명한 이스마일 사마니의 묘와 수많은 17세기의 이슬람 마드라사가 있다. 사실상 노천 박물관인 이 도시의 역사 지구는 도시의 긴 역사와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근래의 고고학 발굴로 부하라 유적에 있는 정착지는 일찍이 기원전 제2천년기(기원전 2000~기원전 1001)에 쿠샨(Kushan) 제국의 일부였음을 밝혀냈다. 4세기에 그 정착지는 에프탈 제국(Ephtalite state)으로 편입되었다. 아랍에 정복당하기 전에 부하라는 풍부한 오아시스와 고대 교역로의 교차로에 위치하여 중앙아시아에서 번영을 누리던 가장 큰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도시는 709년에는 바그다드 칼리프 조(朝, Caliphate of Baghdad)의 주요 문화 중심지가 되었고, 892년에는 독립 사만 왕국(Samanid Kingdom)의 수도였다.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을 이룬 시기는 1220년 칭기즈 칸이 이끈 몽골족이 이 도시를 약탈함으로써 끝이 났다. 부하라는 티무르 제국의 일부가 되면서 서서히 회복되었다. 15세기 말의 내부 분쟁으로 부하라는 셰이바니(Sheibani) 칸이 이끈 우즈베크 유목민 부족에게 점령당하였고, 부하라한국(Bukhara Khanate)의 수도가 되었다. 불안정하고 단명했던 왕조들의 긴 시기는 소연방으로 흡수되었던 1920년에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부하라는 주요 상업과 문화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공고히 하였다.

근대 부하라의 도시 경관은 이 도시가 거쳐 온 역사를 모두 보여 준다. 가장 초기의 기념물들에는 마고키(Magoki) 모스크, 차슈마 아유브(Chasma Ayub)의 성지(Shrine)를 따라 있는 10세기의 이스마일 사마니의 묘, 장식 벽돌로 된 11세기의 포이칼리안(Poi-Kalyan) 미나레트(minaret, 첨탑)가 있다. 티무르 제국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울루그베크(Ulugbek) 마드라사뿐이다.

가장 유명한 건축물들은 셰이바니 왕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포이칼리안 건물군, 리아비하우즈(Lyabi-Khauz), 코슈(Kosh) 및 가우쿠숀(Gaukushon) 마드라사가 있다. 그보다 조금 후에는 주요 교차로에 타키 사라폰(Taki Sarafon, 환전상들의 무덤), 타키틸팍푸루샨(Taki-Tilpak-Furushan, 모자 장수들의 무덤), 팀바자잔(Tim-Bazzazan), 그리고 팀아브둘라칸(Tim-Abdullah-Khan)과 같은 마드라사들이 생겨났다.

17세기 초기에 세워진 훌륭한 건축물들 중에는 새로 지은 훌륭한 모스크 마고키 쿠른스(Magoki Kurns, 1637)와 당당한 아브둘라칸 마드라사가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부하라를 가장 중요한 유적지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개개의 건축물이 아니라 샤이반 왕조(Sheibanid dynasty) 때부터 시작한 도시 계획과 건축물의 전체적인 수준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
고고학 발굴에 의해, 부하라의 유적에 있는 정착지는 일찍이 기원전 제2천년기에 쿠샨 제국의 일부였음을 밝혀냈다. 기원전 4세기에 그 정착지는 에프탈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아랍에 정복당하기 전에 부하라는 풍부한 오아시스와 고대 교역로의 교차로에 위치하여 중앙아시아에서 번영을 누리던 가장 큰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고대 페르시아의 도시는 거의 40㏊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있었는데, 거대한 직사각형의 흙 둔덕으로 남아 있는 북서 지구에는 지배자들의 거주지인 아르크(성채)가 있었다.

부하라는 709년 바그다드 칼리프조의 주요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892년 에미르 이스마일 이븐 아마드(Emir Isma'il ibn Ahmad, 892~907)가 독립 국가를 세우고 부하라를 강력한 사만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도시가 큰 규모로 성장했을 때, 특히 11세기부터는 카라한(Karakhanids) 왕조의 지배 아래서 커다란 경제 문화 발전의 시기를 맞았다. 그 후 칭기즈 칸의 몽골족에 의해 약탈을 겪게 되어(1220) 13세기 후반기가 될 때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1370년 부하라는 사마르칸트에 수도가 있었던 대(大)티무르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부하라는 여전히 마베라나흐(Maverannahr)의 두 번째 도시였고 건물도 신축되었다.

15세기 말 쇠망해 가는 티무르 지역에 잦은 부족 간의 분쟁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부하라는 셰이바니 칸이 이끈 우즈베크 유목민 부족에게 점령당하였는데, 셰이뱌니 왕조 치하에서 부하라는 우즈베크 왕국의 중심이 되었다. 부하라한국은 그 영토에서 경제와 문화 발전의 증진에 전력을 다했고, 도시는 잇따른 새로운 건설의 주요 수혜자가 되었다.

1598년 아브둘라 칸이 죽은 뒤 수세기에는 단명한 왕조들이 이어졌고, 17세기 후반부터 세력이 약화되자 이웃 지배자들로부터 계속된 습격과 약탈을 당하였다. 부하라가 새로운 망기트 왕조(Manghit dynasty)의 수도가 된 것은 1753년 이후였고, 왕조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비록 1868년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지만 이 시기에 부하라는 중앙아시아 전체의 주요 교역 집산지였다. 1848년에 적어도 38개의 대상(隊商) 숙소, 6개의 교역장, 16개의 공중목욕탕 그리고 45개의 시장들이 있었다. 부하라는 또한 200개가 넘는 모스크와 100개 이상의 마드라사가 있는, 근동에서 가장 큰 이슬람교 신학 중심지였다.


한국 음식을 사마르칸트에서 식후경이라는 음식점에서 김치찌개로 먹다.



레기스탄에는 마드라사가 3개나 있다.



중앙에 티라카리 마드라사, 오른쪽에 셰르도르 마드라사, 왼쪽에 울루그 베그 마드라사





왼편의 울르그 베그 마드라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드라사 내부의 작은 방들은 옛날에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상인들이 물건을 팔고 있다.





사람 얼굴과 동물이 그려진 마드라사 입구벽






아래는 박물관 전시물들





손씻는 용도로 사용되는 주전자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생각나는...







향로







오일 램프



필통



꾸란일까?























기둥이 나무로 되어 있다.













미흐랍



설교대 민바르 계단













마드라사에서의 학생들과 선생님의 수업 모습





데르비시(극도의 금욕 생활을 서약하는 이슬람교 집단의 일원. 예배 때 빠른 춤을 춤)





전통 의복



나무로 된 출입문



무덤



레기스탄 광장






아래는 부하라 old city 모습.
우리 경주같은 곳이다.
옛 건물들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재철이 말에 의하면 히바가 그런 면에서 최고라고 하는데 우리는 국경 통과로 하루를 허비하는 바람에 못가게 되었다.





토키자르카론, 토키라는 곳은 대상들의 거래장소로 사용되었다고



이것도 무슨 토키







시장 입구





오아시스 도시가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지하수로일까?





칼론 미나렛





오아시스 도시가 있게 만든 물



금계국 닮았다















돈키호테가 연상되는...



호수 주변의 야외 식당



작은 만두국 바슷한 음식 샤슬릭과 함께 먹으니 좋다.



우리가 묵은 호텔


초르 미노르

초르 미노르 마드라사

우즈베키스탄 부하라(부하라 역사 지구)에 있는 근대시대의 모스크이자 마드라사.

총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르 미나르' 또는 '차르 미나르'페르시아어로 "네 개의 미나렛"이란 뜻으로 건축물 주변에 네 개의 청록빛 돔들을 가진 탑들이 있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미나렛이 아니다.

부하라 토후국 후기인 1807년 부하라를 통치하던 망기트 왕조 때 투르크멘계 부하라 사람이었던 칼리드 니야즈 쿨(Khalif Niyaz-kul)이 세웠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칼리드 니야즈 쿨 마드라사'라고도 알려져 있다.

모스크이자 마드라사이지만 동시에 쉼터 역할도 겸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마드라사의 일부로서 정문에 해당된다.

이 마드라사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기념물에 등록되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일부가 복원되기도 했다.









아래는 이스마일 사마일 영묘

이스마일 사마니 영묘는 10세기에 건설된 영묘이다.

이스마일 사마니 영묘는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 위치해 있으며, 사마니 영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영묘의 건설 연도는 사만 조 시대인 대략 10세기 초이다. 이 영묘는 사만 조의 왕실 가족 영묘이나 이스마일 사마니(Abū Ibrāhīm Ismā'īl ibn Aḥmad, 재위: 892년~907년)의 영묘도 포함하고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스마일 사마니 영묘’라는 이름도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다.

1568년에 필사된 와크프 문서에 의하면, 이스마일의 아들인 아흐마드 사마니(Ahmad Samani, 재위: 907년~914년)를 위해 와크프에 기부한 것이다. 영묘 내부에는 세 구의 시신이 있으나, 목재 비문에서는 이스마일의 손자인 나스르 이븐 아흐마드/나스르 2세(Nasr ibn Ahmad or Nasr II, 재위: 914년~943년)의 이름만 확인할 수 있다.

이 영묘는 칭기즈 칸이 부하라를 침략했을 당시 홍수로 인해 진흙 속에 묻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영묘는 발굴되지 않은 채로 보존되었다가 20세기 초 소련 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고 1937년~1939년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후 소련은 영묘 주변의 묘지를 없애고 인근에 공원을 건립했다.

영묘는 정육면체 몸체에 반구형 돔으로 덮여 있으며 외부는 벽돌을 문양을 만들며 쌓아 올렸다. 각 면은 약 10mx10m가량의 정사각형이며, 건물 상부로 향할수록 안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다.

벽의 두께는 약 1.8m이다. 각 면에는 벽돌로 만든 첨두 아치형 문이 있으며 문 주변 벽감에는 말각조정 형태(사각형 내 마름모, 마름모 내에 다시 정사각형이 있는 문양)의 벽돌 장식이 각각 하나씩 존재한다. 영묘의 사면에 각각 아치형 문이 있는 형태는 사산 조 조로아스터교 신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각 면을 이어주는 모서리에는 벽돌을 둥글게 쌓아 올린 기둥이 있다. 몸체 상단부에는 작은 아치형 벽감이 각 면당 10개씩 늘어서 있다. 처마에는 개구부가 있어 내부의 채광을 돕는다. 지붕을 이루는 반구형 돔의 지름은 약 7m이다. 이 돔 주변에도 4개의 장식용 작은 돔이 있다.

내부에도 역시 벽돌을 얽어 쌓아 장식성을 더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사각형 몸체와 돔을 안정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스퀸치가 중앙아시아에서 적용된 사례다. 벽돌은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재료인데, 이스마일 사마니 영묘에서는 바구니 무늬, 바둑판 무늬, 잎 모양, 로제트, 꽃, 리본 무늬 등을 다양하게 구현해냈다.

이슬람교는 영묘 건설을 억제하라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설된 이스마일 사마니 영묘는 중앙아시아에 세워진 영묘 중 가장 초기의 것이며, 이후 중앙아시아 영묘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 관점에서도, 건축사적 관점에서도 중요성이 큰 건축물이다

타직 사람들은 이 사람을 이스마일 사모니라고 부른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다.







이 안에 시신이 있는 것 같다.


영묘 천장















칼론 마드라사





근처 집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



저녁 식사







밤에 불켜진 미나렛 보러 다시 간다





여기 건물들은 목재 기둥들이 아름답다



목재 기둥 장식





미나렛 근처 밤풍경



불켜진 미나렛은 실크로드 상인들에게 밤에도 등대 역할을 했다




칼론 모스크







미르 아랍 마드라사





오늘 묵는 호텔



호텔 주인 가족들과





식당에서 연주자들과







여기는 이효리가 서빙한다















이곳 아이들은 관광객들을 많이 만나서인지 외국인에게 아무런 스스럼없이 말을 잘 걸어온다.















우즈벡 평원 모습


사마르칸트 레기스탄

마드라사는 사방이 건물로 되어 있고 그 가운데 정원이 있다.



마드라사 내부



3개의 마드라사가 모여 있다


아래는 부하라 올드 시티

올드 시티 거리 모습



전통춤 공연



부하라 올드 시티



오아시스의 귀중한 물



부하라 올드시티 골목길



전통 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