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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친구 24.12.10 본문
미국 사는 하태수 부부가 오랜만에 귀국했다.
77년에 같이 입학해서 같은 해에 군에도 함께 다녀오고 해서 졸업도 같이 한 친구다.
미국에서 힘든 교민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다가 몇 년 전 은퇴를 했다.
심성이 여리고 착한 친구여서 아마 목회하느라 엄청 고생을 많이 했을 거다.
이렇게 만나니 참 좋다.
경북 상주에 거처를 구하고 2월 말까지 우리 나라에 있는다고 한다.
오늘 용문에서 만나기로 해서 전철을 타고 갔다.
일산에서 용문역까지는 경의 중앙선으로 한번에 가기는 하지만 아침 출근 시간에는 2시간 반 가까이 걸린다.
그래도 친구가 보고싶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성수 부부와 문목 부부, 그리고 77대우 소목 부부를 함께 만나서 마침 용문 5일장 장구경도 하고 장터에서 파는 국밥도 사먹고 재미있게 놀다가 계전리에 있는 성수네로 다 함께 갔다.
여기서 밀린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성수 부인 영희씨와 태수 부인 영신씨가 각각 피아노와 오르간 전공이어서 두 사람이 피아노와 신디로 하는 반주에 맞추어서 오랜만에 성가와 가곡등을 실컷 불렀다.
그리고 양평장터에 있는 닭갈비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운전을 별로 즐기지 않는 나는 2시간 반이나 전철을 타고 가서 친구를 만나는 일이 즐겁긴 하지만 힘도 들었다.
지공선사가 되고 나니 운전을 더 안 하게 되고 전철을 많이 이용하게 된다.
전철 타는 고생보다는 친구 만나는 즐거움이 더 큰 것은 확실하다.
오늘은 친구 만나러 열흘씩이나 걸어가기도 한 의리의 사나이 남명 조식 선생의 친구 사귀는 모습에서 배움을 얻고자 한다.
그는 왕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의와 경을 중시해서 경의검이라는 검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자기를 깨어있게 하기 위해서 성성자라는 방울을 휴대하고 다녔다.
그가 대곡과 주고 받은 편지들을 보면 두 사람의 성품이나 학문적 성향이 비슷했고 도덕적 가치관이 일치했다고 한다.
정치적 성향도 당시의 척신정치에 비판적이었으며 남명은 대곡의 도덕적 고결함을 존경했고 대곡도 남명의 실천적 유학 사상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남명 조식 선생(1501~1572)은 57세때 25년 만에 자기 보다 네 살 위인 대곡 성운을 만나기 위해 열흘 가까이 걸어서 속리산으로 가 대곡을 만나고 열흘을 머물렀다고 한다.
이 시대에는 차가 없었으니 당연히 말이나 가마가 아니면 걸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남명은 지리산 아래 산청에 살았으니 열흘을 걸어서 속리산 아래 보은에 사는 대곡을 만나러 갔다.
이 당시에 산청에서 보은까지 가자면 말 그대로 산넘고 물건너 갈 수 밖에 없었다.
일기 예보가 없었던 당시에는 도중에 비라도 만나면 그대로 쫄쫄 맞거나 주막으로 들어가 피하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처럼 비가 와도 차타고 그냥 가는 시절이 아니었으니까.
열흘을 걸어서 가고 열흘을 머물렀으면 돌아오는 열흘을 포함해서 한 달이 걸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남명이나 대곡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산림에 은거하는 선비들이었으니까 이런 일도 가능했다.
남명은 당시 정치판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해서 아예 조정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았다.
왕이나 남명과 동갑인 퇴계 선생이 그의 지식과 인품을 높이 사서 조정에 출사할 것을 간곡히 부탁해도 그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대곡 성운(1497~1579)도 1545년(명종즉위년) 작은 형 제릉참봉 성우가 을사사화 때 죽임을 당하자 처(경주 김씨)의 고향인 속리산 보은읍 종곡리로 은거했다.
이래서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율곡과 송강의 친구인 우계 성혼은 대곡 성운의 5촌 조카다.
청송 성수침은 성운의 사촌 형이고 성혼은 청송의 아들이다.
아래는 남명과 동주 성제원 (https://song419.tistory.com/m/4494)이 만나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글에서 복사해 왔다.
"남명이 옛 친구 대곡 성운이 살고 있는 충청도 보은 속리산에 갔다가 당시 보은현감으로 있던 동주 성제원을 처음 만나 사귀고, 헤어져 돌아올 때 성제원이 이별을 안타까워하자 내년 추석에
합천 해인사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게 된다.
다음해, 조상님들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추석차례를 동생에게 맡기고 남명은 해인사로 길떠날 차비를 하는데, 추석 3일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장대같이 쏟아졌고 게다가 거센 바람까지
불었다.
늦은 태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초가집 이엉이 다 걷히고 기왓장이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불어 키 큰 나무가 뽑히고 곡식이 쓰러졌다.
추석 이틀전에 남명이 떠나려고 하니 동생과 제자들이 모두 말렸고 부실 송씨도 걱정스런 얼굴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남명은 친구와의 약속을 깨뜨릴 수 없으므로 여러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세차게 오는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 옛날에는 폭우가 내릴때 길을 떠나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삼가에서 출발하여 오후 늦게 황강에 도착한 남명은 저 건너편 뱃사공을 소리쳐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강물은 불어있고 날은 이미 어두워졌으므로 뱃사공이 자기 목숨을 걸면서까지 세찬 물살을 건너오려고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강가 주막에 든 남명은 젖은 옷을 말리고 술로 몸을 따뜻하게 한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일찍 강가에 나와 보니 빗줄기가 조금 약해졌고 시야도 밝아져 건너편이 뚜렷이 보였다.
강에는 여전히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다. 몇차례 크게 소리쳐 불러서야 사공은 강을 건너와 배를 대었다.
남명을 태운 배는 세찬 물살을 헤치며 겨우 강을 건넜다.
워낙 물살이 센 탓에 보통 때의 선착지보다
훨씬 아래쪽에 닿았다.
합천 고을을 지나 빗속을 종일 걸어 가산에서 하루밤을 묵은 남명은 다음날 두모산 오른쪽 기슭을 넘어 야로를 거쳐 홍류동계곡을 끼고 해인사로 향했다.
연일 계속 내리는 비로 시냇물은 불어 곳곳에서 바위에 부딪혀 허연 물보라를 일으키고 굉음을 내며 흘러갔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해질녘에야 해인사 일주문 앞에 닿은 남명이 고개를 들어보니 동주 성제원이
문루에 올라가 비에 젖은 우장을 벗으려 하고 있었다.
"자경", 자경은 동주의 자다.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동주가 굽어보니 남명이 일주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두사람은 마주보며 잠시 말없이 웃었다. 서로의 신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주는 이때 보은현감 자리를 버리고 남명을 찾아 빗속에 600리 길을 달려온 것이니, 자기가 한 한마디 말을 끝까지 실천해 내는 선비다운 자세를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하늘이 두사람의 신의를 축하라도 하는 듯, 그렇게 여러 날동안 오던 비가 밤이 되자 개고 바람도 잠잠해 졌다.
달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도록 두사람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학문과 선비의 자세,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다음날, 두사람은 함께 가야산을 올랐다.
가야산은 기암괴석과 계곡, 송림, 구름 등이 어우러져 아주 경치가 좋았다.
남명은 동주와 함께 여러날 노닐다가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둘 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인지라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므로 두사람은 말없이 손을 잡고 한참을 마주 섰다가 헤어졌다."
이런 옛 선비들의 만남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유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남명이 열흘을 걸어서 보은으로 간 기록을 보면서 남명은 걷기를 아주 좋아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흘을 잠자고 먹는 시간 외에는 걷기만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나도 우리 나라 동부 전선 제일 오른쪽에 있는 고성에서 부산까지 해파랑길 770km를 며칠씩 잠자고 먹는 시간만 빼고 계속 걸어본 적이 있다.
오늘날은 강을 만나면 다리가 놓여져 있고 산을 만나도 지자체들이 길을 잘 보수해서 걷기 좋게 만들고 산 위에도 길을 잃지 않도록 안내 팻말을 잘 설치해 두었다.
그래도 때로는 길을 놓치기도 하는데 당시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험한 산에서는 호환도 두려웠을 것이다.
삼연 김창흡(金昌翕, 1653년 ~ 1722년)은 설악산 백담사 위에 영시암을 짓고 거기에서 여생을 보낼려고 했지만 자기를 도와주던 찬모가 호랑이에게 물려죽자 거기에서 나와야 했다.
그러니 이 시대에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등산을 즐기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남명은 등산을 즐기긴 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지리산을 열번 이상 올랐다.
그러나 열흘씩이나 친구를 만나러 먼 곳으로 가는 것은 또다른 일이다.
그런 시대에 친구를 만나러 산넘고 물건너 갔다는 사실은 모험을 동반한 일이다.
겨우 2시간 반 전철타고 가서 친구 만나고 와 놓고는 너무 생색내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