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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궁,능,원,묘 (73)
노래하는 사람
강화도령 철종이 가족과 함께 유배와서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이름은 궁이지만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큰 대궐은 아니고 양반집 같은 분위기다. 성공회 강화성당 바로 아래 있어서 성당 구경 갔다가 함께 들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원래는 강화도에서 농사를..
겨울 방학이고 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종묘를 가다. 김수근의 제자 건축가 승효상의 건축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두 건물 가운데 하나인 이 종묘는 그의 표현에 의하면 '비움의 미학'을 극대화하고 있는 건축이라고 한다. 종묘는 태조가 계성에서 한양으로 오면서 궁궐 보다 먼저 지으라고 한 건물이다. 그는 종묘를 먼저 짓고 다음에 궁궐과 마지막으로 성벽을 쌓아 도성을 건설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종묘 사직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리라. 태조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한 후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주례에 따라 경복궁 왼쪽에 자리 잡았다. 1394년 10월에 시작해서 1395년 9월에 완성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했다가 신주의 수가 늘어남..
아세안 자연 휴양림 가는 길에 있어서 잠깐 들르다. 장흥 유원지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면 예뫼골 좀 못미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명장인 권율(權慄, 1537∼1599)과 정부인 창녕 조씨, 후부인 죽산 박씨의 묘이다. 권율은 안동 권씨로 선조 15년(1582)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주목사로 근무하던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한양 수복을 위하여 북상하였으나 용인싸움에서 패하자 다시 광주로 되돌아가서 군사를 모아 충청도 금산 이치싸움에서 왜적을 대파시켜 전라도 지역을 지켰다. 이어 함락된 한양의 수복을 위하여 다시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산성에 진지를 구축하고 왜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후 행주산성으로 진지를 옮겨 권율이 일사분란하게 통솔하고 군사들은 ..
문승기 장로님 댁 막내딸 지연이 결혼식 참석하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서 혼다 가다. 지금이 여행하기 좋은 때라서인지 5대궁과 종묘를 입장료 50% 할인해 주고 있다.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이었고 원래는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임진왜란 때 서울의 궁들이 다 불타고 없어지자 선조는 1593년부터 임시 거처로 사용했다. 광해군이 1611년에 이곳을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로 불렀다. 전성기 때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약 3배 정도 되는 큰 궁궐이었다. 동쪽에는 지금 조선호텔 자리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는 현재 미국대사관 건너편의 예원학교와 이화여고 자리까지였고 북쪽으로는 역대 임금들을 제사지내는 선원전이 있었다. 고종황제가 물러나면서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이 궁에는 서양식 건물도 들어서..
시험 마지막날 경복궁을 가다. 재작년인가 응선이가 왔을 때 한번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는데 실수로 사진을 다 날려버려서 다시 가서 찍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되고 3년 후인 1395년에 지어졌다. 경복궁이라는 이름과 주요 전각의 이름은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지었다고 한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은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이후 확장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만다. 그 후 270여 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1867년 흥선 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증건한 경복궁은 500여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빽빽하게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외전과 내전, 휴식을 위한 정원 시설들을 조성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일제는 계획적으로 경복궁을 훼손하였다...
중간 고사 둘째 날 일찍 끝나서 혼자 가다. 전에는 공릉으로 불린 적도 있고 공순영릉으로 불리기도 했다. 마침 문화재 안내원이 계셔서 친절하게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능에 들어가기 전에 오른쪽에 박물관이 있어서 간단히 공부하고 들어갈 수 있다. 왕릉이 조선 전기와 후기에 조성된 것은 양식이 다르다. 'ㄷ'자 집이다. 공릉恭陵(예종비 장순왕후) 위치 :경기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능의 형식 :단릉 능의 조성 :1462년(세조 8), 1470년(성종 1) 능의 구성 공릉은 조선 8대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 한씨의 단릉이다.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
성수 부부와 함께 가다. 광릉光陵(세조와 정희왕후) 위치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능의 형식 :동원이강릉 능의 조성 :1468년(예종 즉위), 1483년(성종 14) 능의 구성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모시고, 능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 최초로 조성되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세조, 오른쪽 언덕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
위키백과에 의하면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은 대한민국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능으로 홍릉(洪陵)은 대한제국의 초대황제 고종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능이며,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 융희제과 순명효황후 민씨와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이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丁字閣)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으며, 양쪽으로 문무석을 세워 홍살문까지 기린·코끼리·해태·사자 등의 석수를 세웠는데 중국 명나라 황제능의 제도를 따라 조성된 황제릉이다. 일제 강점기에 홍릉은 고종의 인산일[1](1919년)에, 유릉은 순종의 인산일(1926년)에 각각 조성되었다. 조선 왕릉 중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며 순종의 유해가 안장된 유릉은..
창덕궁을 가서 후원 예약을 했다. 오늘은 다행히 신청자가 많지 않아서 인터넷 예약을 하지 않고도 창덕궁을 돌아보는 사이에 후원 예약 시간이 되어서 다녀올 수 있었다. 아내와 함께 창덕궁 후원을 현장 매표해서 가다. 30분 간격으로 100명씩 들어갈 수 있다.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면서 함께 움직여야 한다. 해설하는 동안 사진을 찍거나 다른 일을 보아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미리 공부해 가지 않았다면 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아내는 나와 같이 천천히 다니면서 데이트를 하고 싶었는데 내가 그 마음을 모르고 혼자 사진 찍는다고 바삐 돌아다녔더니 화가 많이 났다. 분위기 파악도 못한 내 죄가 크다. 후원은 우리 나라 최고의 정원이다. 볼 수 있는 자는 볼진저! 이 곳은 내의원에 속하는 건물이라고, 역대 국..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서 좀 작은 궁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궁이고 일제가 많이 훼손해서 현재의 모양이 되었다.\한때는 서울 시민들이 밤벚꽃놀이를 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고 궁궐을 훼손하려고 일부러 여기에 동물원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드나들게 만들기도 했다. 창덕궁에 갔다가 연결된 문이 있어서 여기도 가다. 경복궁이 법궁일 때 창경궁과 창덕궁은 동궐로 불렸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 묘인 경모궁이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자리에 있어서 굳이 창경궁에도 있었다고 하며 그래서 담장을 헐고 월근문을 만들기도 했다고.
창덕궁을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가다. 아침 일찍 가서 후원까지 예약해서 후원에는 아내와 함께 가다.창덕궁은 태종 5년(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 불린다.임진란 이후 창덕궁은 경복궁을 대신해 법궁의 역할을 오래 하다 대원군 때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다시 그 역할을 넘겨주게 된다.현재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통치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낙선재 ,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뒤쪽으로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에는 금천이 흐르고 있는 배산 임수의 지형이다.과거가 햇볕을 쬐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된다는데 여기는 역사가 살아있지?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
유상훈 선생 아들 혼사에 갔다가 성수 부부를 만나서 가다. 남서울교회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우리 집에와서 한참 앉아 놀다가 서삼릉을 가다. 지난 주는 선릉과 정릉을 갔는데 2주 연속으로 능행을 하게된다. 이름 그대로 3개의 능과 원들이 있다. 능은 왕이나 왕비의 묘고 원은 세자나 세손의 묘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3릉은 아래와 같다. 희릉(禧陵)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능이다. 중종(中宗)의 능은 명종 17년(1562년) 이곳에서 정릉(靖陵,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장되었다.[1] 효릉(孝陵)은 조선 제12대 왕 인종(仁宗)과 정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의 능이다. 예릉(睿陵)은 조선 제25대 왕 철종(哲宗)과 정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의 능이다. 이외에도 폐비..
최성인 아들 현우의 혼사와 이귀자 교수님의 막내딸 혼사가 강남에서 있어서 갔다가 성수가 오늘 결혼식을 근처에서 6곳을 돌아야 한다고 짜투리 시간에 왕릉에 가보자고 해서 다녀오다. 대도시 한복판에 왕릉이 있다. 선릉역에서 내리면 걸어갈 수 있다. 성종과 그 계비인 정현왕후 그리고 중종의 묘가 있다. 능을 한바퀴 다 돌면 한시간 정도 걸린다. 서오릉이나 서삼릉에 비해 약간 작은 느낌이 있지만 도심 한복판에 이런 유네스코에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능이 있어서 이 동네 사람들의 공원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는 것 같다. 능 앞에있는 석물들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