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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하시중을 지냈고 여진족을 정벌했으며 동북 9성을 쌓았다. 정적들에 의해서 어려움도 당했지만 회복했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 고려 태조 때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 집형(執衡)이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습유(拾遺)·보궐(補闕)을 지내고 1087년(선종 4)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좌사낭중(左司郞中)이 되어 임의(任懿)와 함께 국신사(國信使)로 요(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으며, 1098년(숙종 3)에는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송(宋)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9년 우간의대부·한림시강학사가 되었고, 2년 뒤에 추밀원지주사가 되어..
심덕부 선생은 충숙왕 복위년 말에 음직으로 사온직장동정에 출사한 이후 좌우위녹사를 거쳐 1364년 수원부의 수령이 되었습니다 공민왕 말년에는 판위위시사가 되었고 우왕 즉위후 우상시를 거쳐 밀직부사, 의주부원수, 서해도원수 등의 요직을 거쳤습니다. 1385년에는 문화찬성사로서 동북면상원수를 겸하여 이성계와 함께 동북면에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1388년 요동출병애는 서경도원수로서 조민수와 더불어 좌군에 속하여 위화도회군을 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웟습니다. 이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폐가입진에는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와 더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이른바 9 공신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공양왕이 즉위한 후 문하좌시중이 되었고 조선이 개국된 후에는 회군공신 1등에 추록되었고 1397년 판문하부사..
윤호(尹壕, 1424년 ~ 1496년 4월 9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외척으로 성종의 장인이며 중종의 외할아버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字)는 숙보(叔保), 시호는 평정공(平靖公)이다. 윤호 묘비명 1447년(세종 29년) 식년사마시 생원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음서로 관직에 올라 군기시주부, 의금부도사 등을 지냈다. 행종부시승(行宗簿寺丞)으로 재직 중에는 세조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1455년(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3등관에 책록되었다. 춘장문과 급제 후 딸이 성종의 계비가 되면서 고속승진하여 병조참지, 참판 등을 지내고 영원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이후 의정부우의정을 거쳐 영돈령부사에 이르렀고 1495년(성종 26)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실록에 의하면 성품이 검소..
배집사님 부부와 함께 가다. 다음 백과 사전에 의하면 사적 제193호이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하였으며, 1855년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건원릉은 태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능지를 물색하다가 검교참찬의정부사 김인귀의 추천으로 하륜이 택정했다고 전한다.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 제23대 순조의..
소재혁 목사님 회갑 기념으로 경주 여행 중 들르다. 괘릉은 다음 백과에 의하면 "사적 제26호. 원형의 봉토분으로 앞에 석상을 놓았고, 아랫부분의 주위에는 다듬은 석재로 호석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봉분의 지름은 약 23m이며 높이는 약 6m이다. 그리고 호석은 지대석 위에 높이 95㎝, 길이 120㎝ 정도의 판석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갑석을 얹었고, 각 판석 사이에는 호석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시키는 탱석을 끼워 넣었으며 12지신상을 2개의 판석마다 하나씩 배치했다. 또한 호석의 바깥쪽 바닥에는 부채꼴의 판석을 정연하게 돌려 깔았으며, 봉토 주변을 둘러 석주를 세우고 석주와 석주 사이에 2개씩 돌난간을 끼웠다. 비교적 얕게 부조한 12지신상은 무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으며, 오상만이 정면..
결혼 36주년 기념으로 성수네와 강릉 여행 갔다가 오는 길에 들르다. 강릉디지털 문화대전에 의하면 강릉김씨의 시조인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의 묘. [명칭유래] 신라 태종무열왕 5대 손으로 알려진 김주원이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封)해졌기 때문에 왕릉이라고 한다. 신라 선덕왕(宣德王)이 후사(後嗣)없이 죽자, 신하들은 왕족 중에 김주원을 택하여 왕위에 추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침 경주에 내린 큰 비로 강을 건너지 못해 김주원은 회의에 참석치 못하게 되었다. 신하들은 “하늘이 비를 내려 김주원을 이 회에 참석치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이 김주원을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함이니 다른 사람을 뽑자.”고 하여 김경신(金敬京:元聖王)을 즉위케 하였다. 원성왕은 왕위에 오른 후 김주원을 강릉에 보내 명주, 삼척, ..
위키 백과에 의하면 장릉(章陵)은 조선 시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그의 비 인헌왕후 구씨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소재지는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 141-1이다. 문화재청 장릉지구관리소에서 관리·보호 및 관람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2호로 지정되었다.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의 무덤이다. 인조반정(1623)으로 아들 능양군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인조 10년(1633) 원종의 칭호와 함께 그의 무덤을 장릉으로 불렀다.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있는 쌍릉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보호석만 둘렀다. 무덤 아래에는 영조 29년(1753)에 세운 ‘조선국원종대왕..
동구릉에는 서울 동쪽에 9개의 능이 있어서 동9릉이고 서오릉은 서울 서쪽에 5개의 능이 있어서 서오릉이다.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여기는 5개의 능과 2개의 원 그리고 한 개의 묘가 있다. 처음으로 능이 만들어진 것은 1457년 경릉으로 시작했다. 창릉, 익릉, 명릉, 홍릉 순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왕릉은 입장료가 1,000원인데 광복절 기념으로 내일까지 무료입장이다. 서오릉 주차장은 무료이고 입구가 서울쪽으로 옮겨가서 제실 앞에 있던 주차장은 없어졌다. 왕릉이지만 시민들을 위해 산책로를 잘 만들어 두었다. 서어나무길과 소나무길이라는 이름의 산책로가 봉산 아래 서오릉 경내에 잘 조성되어 있어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1. 명릉 명릉은 제19대 숙종(1661~1720)과 계비 인현왕후 민..
공양왕릉은 삼척에도 있다. 문헌에 의하면 고양에 있는 것이 공양왕릉일 것이라고 한다. 삼척에 있는 것은 전설에 의하면 그곳에 귀양도 갔고 했으니까 그곳에 있는 것이 공양왕릉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 같다. 고양에 있는 왕릉은 조선 왕릉에 비하면 아주 초라해 보인다. 망국의 군주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하는 수모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병풍석이나 난간석도 없고 능 앞에 있는 석인들이나 석수들이 조선왕릉에 비해 규모가 아주 작고 숫자도 적다. 제실이나 비석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향로나 어로는 아예 없다. 제사 지내줄 후손이 제대로 없어서인가? 고려의 충신 후손들이라도 어떻게 좀 해볼 수 없었을까? 하긴 서슬이 시퍼런 조선 시대에 고려왕의 제사를 지낸다고 하면 그 사람이 온전했을 리가 없었겠지. 역사는 승자..
고봉산을 갔다가 우연히 무덤 앞에 서 있는 石人들의 얼굴 표정이 다들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여기에 DB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석등이나 비석들도 있지만 우선은 石人들을 중심으로 해 보겠다. 고봉산 진밭쪽은 아마도 함종 魚씨들의 선산인 모양이다. 다들 魚씨들 무덤이고 중산마을 쪽으로 오면 다른 성씨들의 묘도 많이 있다. 어운해(1536년(중종 31)~1585년(선조 18))는 조선전기 상의원주부, 형조좌랑, 평창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이조 참판이면 오늘날 행정 안전부 차관으로 추증되었다고. 이 무덤 앞에 서 있는 문인석으로 보이는 석인은 미소를 띈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다. 고인도 이렇게 잘 웃고 인품이 좋은 분이었을까? 진밭쪽으로 가서 길에서 왼편으로 꺾어 올라가면 오른편에..
위키 백과에 의하면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은 가야 시대 수로왕의 왕비무덤이다.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 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인도 야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의 무덤으로, 커다란 원형 토분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둘렀다.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허씨지릉”이라고 새긴 능비가 서 있다. 개요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무덤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성이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인도 아유타의 공주로 16세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9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에게 왕비의 성..
위키 백과 사전에 의하면 수로왕릉은 수로왕릉(首露王陵)은 사적 제73호로, 가락국(駕洛國)의 초대 국왕이며,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의 능이다.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 (서상동)번지에 있다. 봉분 이외에 아무런 시설도 없는 원형 토분이다. 1580년(선조 13) 영남관찰사 허엽(許曄)이 왕릉을 수축하여 상석·석단·능묘 등을 갖추었고, 1647년(인조 25)에 가락국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라 새긴 능비가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수로왕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다고 전한다. 능의 전면에는 가락루·연신루·회로당 등의 건물이 있다. 《지봉유설》에 의하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이기록에는 임진왜란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위키백과에 의하면 영경묘, 준경묘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준경묘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 장군의 무덤이고 영경묘는 장군의 부인인 평창 이씨의 무덤이다. 삼척 준경묘·영경묘(三陟 濬慶墓·永慶墓)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 장군의 묘인 준경묘와 장군의 부인 평창 이씨의 묘인 영경묘의 묘역으로, 조선 왕조 최고의 선대묘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후 어명을 내려 선대의 묘를 찾아 고종 임금때인 광무 3년(1899년) 4월 16일에 고종이 공식적인 선조의 묘로 추봉(追封)하고 묘와 재각, 비각 등을 수축·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위치 명산으로 알려진 두타산의 지맥에 자리를 잡고 있어 고려시대 이후 꽤 이름이 알려진 풍수로 부터 조선 왕조의 태동을 비롯해 500여 년 왕조의 정기를 이을 수..
의암호에서 소양강 댐 가는 길에 길가에 안내판이 있어서 들르다. 신숭겸 장군을 한국 관광 공사에서 인용한 백과 사전에 찾아보니 신숭겸(?∼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고려개국의 1등 공신인 신숭겸 장군은 궁예가 세운 나라인 태봉의 기병장수였다. 그런데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 지 몇년 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심해지자 동료 기장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고려 태조 10년(927)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전하였다. 왕건이 이 곳 공산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빠지자, 왕건의 옷을 입고 변..
수원 창현고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우현기 선생님이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왔습니다. 고궁을 둘러보고 싶다고 해서 지난 화요일에 경복궁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매주 화요일이 정기 휴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창덕궁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평소 후원은 워낙 인기있는 곳이어서 인터넷 예매를 하지 않으면 입장이 어렵습니다. 혹시나 해서 후원 입구에 갔더니 다행이 바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부용지 일원만 여기에 소개합니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동궐로 불렸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서울에 있는 궁들이 모두 불탔습니다. 전쟁 후 1610년(광해군 2년)에 지어서 1867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가장 오랜 기간 조선의 법궁 역할을 ..
어제 처 외삼촌께서 병원에 계시는 장모님 뵈러 오셨다가 박재궁을 잠깐 들러보시겠다고 하셔서 처음으로 가봤다. 밀양 박씨들 중시조들 묘와 재실이 있다. 간혹 원당을 지날 때 박재궁이란 팻말을 보고 뭔가 궁금했었는데 오늘에야 그 궁금증이 풀렸다. 상당히 넓은 땅을 주택가 바로 옆에 차지하고 있다. 외삼촌 말씀에 의하면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이 지금보다 훨씬 더 넓었는데 야금야금 팔고 지금의 땅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도 아직 상당히 많은 땅이 남아있다. 침 흘리는 후손들이 꽤 있을 것 같다.
부산에서 올라 온 우현기 선생님과 경복궁을 가기로 약속하고 경복궁을 갔더니 매주 화요일이 정기휴일이다. 그래서 가까운 창덕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창덕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박자청이다. 왕의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배를 가면서까지 소신껏 왕궁을 건축한 인물이다. 창덕궁 안내 팸플릿에는 창덕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내전과 외전 한국의아름다움,그참모습을보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사신 접견 등 나라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1908년 인정전 내부를 고치면서, 커튼, 전등 설치 등 서양식 실내 장식이 도입되었다. 청기와를 얹은 선정전은 왕이 평상시 나랏일을 보시던 편전이다. 옆에 있는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가면서 왕과 왕..
어제 저녁에 음악회에서 만난 성수가 오늘 황손부부가 아버지 묘에 온다고 찍사를 해달라고 해서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 전주에서 황손부부는 올라오고 나는 성수 부부와 왕십리역에서 만나서 함께 가다. 성수는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이 되더니 여러모로 더 바쁘다. 집에 있으면 병날 사람이어서 맡은 일을 즐겁게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황실문화재단이 확 바뀌어서 활성화 될 거다. 작년에 홍유릉은 성수부부와 함께 간 적은 있었지만 오늘은 홍유릉 등 다른 능은 들르지 않고 황손의 아버지인 의친왕묘와 고모인 덕혜옹주묘만 들르다. 홍유릉 안에는 아버지의 묘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와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들,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고모 그리고 조카인 이구씨의 회인원까지 다 있다. 양력 8/15일이 아버지인 의..
경순왕릉 갔다가 나오면서 들르다. 경순왕릉은 몇 번 왔는데 이 영단은 그동안 못 보고 지나쳤다가 오늘 처음 봤다. 영단은 영가(靈駕/죽은 사람의 넋·영혼)를 안치한 단(壇)이라고 한다. 마의태자는 위키백과에 의하면 마의태자(麻衣太子, ? ~ ?)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이다. 신라 경순대왕의 왕자로,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는다. 후대에 마의를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 태자라 부른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신라 경순대왕과 왕후 죽방부인 소생의 왕자로, 935년 10월 부왕 경순왕이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나라를 고려에 귀부(歸附)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여, 개골산(지금의 금강산)에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草食)으로 연명하다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1] 왕자의 이름은 사서(..
77이 세집(우리, 성수네 태수네)이 함께 가다. 문산에서 연천 쪽으로 가다가 장남면에서 임진강을 건너가면 우리가 즐겨 가는 장남 매운탕 집이 있고 그 집을 지나서 좀 더 가면 왕릉이 있다. 가월리 콩국수 집에서 국수로 점심을 먹고 경순왕릉, 마의타자 영단, 화석정,자운서원 임진각을 가다. 나라를 고려에 바쳐야 했고 왕건의 신하가 되어 죽어서도 경주에 묻히지 못한 비운의 왕, 경순왕릉을 보면서 실력이 없으면 죽어서도 외롭게 남게 된다는 것을 배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경순왕(敬順王, 897년 ~ 978년 4월 4일)은 신라의 제56대 마지막 군주(재위: 927년 ~ 935년)이다. 경순왕(敬順王)은 성이 김(金)이고, 이름은 부(傅)이며,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일명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