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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다니엘 선지자는 기독교와 이슬람에서도 중요한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꾸란에는 직접 나오지 않지만 여러 이슬람 문헌들에서는 언급되고 있다고 하며 예언자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다니엘이 바벨론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에서 활약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이야기가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상 숭배를 거부하다가 풀무불과 사자굴 속에 던져지는 형벌을 받고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안전하게 살아나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그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영묘들이 세계 여러 곳에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곳으로는 그가 활동했던 지금 이란의 수사에 있는 영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 외에도 여러 곳에서 다니엘의 영묘라고 주장하는 무덤들이..
대원군이 살았던 집이고 고종이 왕이 되기 전 살았던 잠저이다. 대원군은 김좌근이 안동 김씨들과 함께 권력을 좌지우지할 때 `상갓집 개`처럼 살았지만 자기 아들이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야망을 품고 이 집에 살았다. 고종이 왕이 되고 난 후 섭정을 하면서 순조비였던 순원왕후를 비롯한 안동 김씨들과 풍양 조씨들이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그들과 맞서기도 했다. 그는 부패한 안동 김씨들과 싸우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삼정문란을 개혁하려 했고 당파싸움의 온상이 된 서원을 철폐하기도 했지만 쇄국정책을 너무 강력하게 추진해서 조선이 문호를 열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천주교도들을 너무 탄압해서 서양의 문물이 들어 올 수 있는 기회를 막았으며 경복궁 재건으로 나라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초래하기도 ..
전철로 경복궁에 내려서 걸어가다. 칠궁은 황손 이석씨가 청와대 이야기 하면서 처음으로 들었다. 칠궁은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모이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칠궁이지만 5개의 건물만 있고 경우궁과 선희궁은 같은 건물에 방만 달리 해서 함께 있다. 육상궁과 연호궁도 그렇다. 청와대가 칠궁 옆에 담 하나 사이로 있어서 터가 안 좋다고 하면서 경복궁에서 칠궁으로 귀신들이 다닐 때 청와대를 지나다니기 때문에 귀신들이 다니는 길목이라고 한다. 그래서 청와대 주인들이 말년이 좋지 않다고 이석 황손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이승만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노무현, 이명박, 박근혜등이 다 끝이 별로 좋지 않았다. 칠궁은 조선시대에 왕을 낳은 일곱 비빈들의 신..
재철이와 함께 가다. 고궁 박물관에 들렀더니 전시물이 많이 바뀌었고 북한에 있는 칠보산 그림 특별전도 한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미리 예약한 3시 회차에 맞춰서 아내와 함께 가다. 효릉과 태실은 예약한 사람만 한 회차에 20명씩 들어 갈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없어서 아내와 둘만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면서 오붓하게 다녀 올 수 있었다. 효릉(孝陵, 인종과 인성왕후)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조성 연도 : 1545년(명종 즉위), 1578년(선조 11) 왕릉 형식 : 쌍릉 조선왕릉 홈페이지에 의하면 효릉은 조선 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효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인종, 오른쪽(동쪽)이 인성왕후의 능이다. 효릉은 1545년(인종 1)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정릉(靖陵, 중종과 장경..
남명 묘소는 남명 기념관 뒷산에 있다. 아래는 묘갈명 번역문 본처인 남평 조씨(1500 ~ 1568) 는 조수(曺琇)의 딸이다. 무덤이 어디에 있을까? 측실 은진 송씨(1532 ~ 1610)의 무덤이 남편 무덤 아래 있고 측실인데도 불구하고 숙부인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남명은 이 부인에게서 아들 셋을 얻었다. 조선 시대에 측실인데도 숙부인의 칭호를 얻은 여자들이 종종 있었을까? 큰 아들 차석이 은진 송씨 덕분에 대부가 된 공이 있어서 숙부인의 영예를 얻었다고 한다. 무덤 옆에 옛 비석들이 모여 있다.
향로봉 등산하고 내려오다가 이 묘를 발견했다. 오랫동안 여기를 지나다녔는데 오늘 처음 이 묘를 발견했다. 이 무덤군은 조선 성종의 13남인 영산군 이전과 그 아들인 장흥군 이상, 손자 덕원도정 이경의, 증손자 강진부정 이종등 4대에 걸친 묘역이다. 진관사 입구 한옥 마을을 지나면 공영 주차장이 있고 그 오른편 산 에 있다. 주차장 입구에 있는 카페 바로 옆에 있다. 영산군 신도비 세호가 다른 망주석들에 비해 엄청나게 크다.
황사영 백서로 알려진 천주교 순교자로 무덤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위치해 있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제천현 배론의 산 속에 있는 굴에 몸을 숨기면서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자에는 천주교를 포교할 방안과 순교자들과 배교자들에 관한 사항,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 교황이 중국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 왕이 천주교를 박해하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였다. 결국 이 편지를 보내다가 도중에 검문으로 발각되면서 거열형을 당해 죽었다. 그후 이곳에 선산이 있어서 묻혔다. 그는 천주교 입장에서는 순교자이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자기 신앙을 위하여 서양의 강국들이 군함을 보내서 조선을 위협하라고 말한 반역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성인으로 인정받는데도 시간..
몇년 전에 갔지만 그 사이에 또 많은 복원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1867년에 경복궁이 완공되었고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황제가 되었으니 시기적으로는 칠조룡이 먼저 만들어졌다. 1444년 7월에 세종의 후궁 차씨가 연생전에서 벼락을 맞아 죽었다.
북한산 둘레길 걸으면서 가다. 이준 열사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했다.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며 이듬해 법관양성소에 입학,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귀국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그해 11월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독립에 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고 고종의 밀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참석의 길이 막히자 순국했다.(다음 ..
북한산 둘레길 구름정원길을 걸으면서 가다. 구름 정원길 출발점 바로 옆에 묘가 있다. 묘역 안에 이씨들 묘가 많고 막상 능침부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화의군의 묘인지 알기도 어렵다. 곡장이 있고 석물이 많은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1425년 9월 5일 ~ 1489년 이후[1])은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세종(世宗)의 여섯째 아들이며 서장자이다. 어머니는 영빈 강씨(令嬪 姜氏)이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서장자이며,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세조)에 맞선 육종영 중 한 사람이다. 금성대군, 혜빈 양씨 등과 함께 훈신들의 공격을 받고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수차례 탄핵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노비와 전답을 비롯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녀..
주천 사는 이화섭 선생님 댁을 방문하고 들르다. 조선 왕릉 마지막 남은 곳을 마침내 가게 되었다. 오래 전에 다녀 온 적이 있긴 하지만 아마 그때는 왕릉이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단종의 장릉은 다른 능과 좀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 정자각에서 능이 많이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정자각은 산 아래 있고 능은 산 위에 있어서 정자각에서는 능분이 보이지도 않는다. 아마 처음에 능을 조성할 당시에는 여기 정자각이 없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장릉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왕릉. 이전에는 노산군 묘(墓)로 불려왔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이 추존복위됨에 따라 노산군 묘에서 장릉으로 승격되었다. 1970년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었으며..
노량진 전철역 8번 출구를 나가서 한강쪽으로 300m 정도 걸어가면 사육신 공원이 있다. 오래전에 내가 상도동 살 때만 해도 그냥 초라한 무덤 몇 기만 있었는데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했고 바로 옆에능 서울 시내와 한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조망지점도 있다. 사당과 무덤이 있다. 원래는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 개의 무덤만 있었다고 한다. 후에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들어섰다고 설명되어 있다. 사당 뒤 왼편에는 왼쪽에서 부터 하위지 성삼문 류성원의 묘 3기가 있고 오른편에는 김문기 박팽년 이개 유응부의 묘가 나란히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사육신이 아니고 사칠신이 되는 것 아닌가? 김문기는 일반적으로 사육신 명단에 들어있지 않지만 실제로 군대를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당시 성삼문과 박팽년은 확실..
양주에 있는 비염 전문 병원인 고의원에 갔다가 대기시간이 하도 많이 남아서 근처에 있는 이곳을 다녀오다. 처음에는 고종 때의 이준 열사인 줄 알고 갔더니 다른 사람이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전성부원군 이준(全城府院君 李準, 1545∼1624)은 조선 왕족이며, 자는 평숙(平叔), 호는 뇌진재(懶眞齋)·서파(西坡)·삼귀(三鬼)이고 시호(諡)는 숙헌(肅憲)이다.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승정원도승지왕명출납·국왕비서관로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치죄한 공으로 평난공신[1](平難功臣) 2등으로 책록되어 전성군(全城君)으로 봉군되고, 임진왜란 시기에는 삼도순찰사[2](三道巡察使)·운향사(運餉使:전쟁물자 보급책임자)로서 공이있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나 이미 과거에 평난공신으로 책록되었던 적이 있어..
소령원 숲속이라는 음식점 가는 길에 들르다. 전에도 이 음식점 지나가면서 본 적은 있는데 오늘도 가봤더니 원 입구에 있는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제삿날에는 문을 열겠지만 평소에는 이렇게 잠겨 있다고 음식점 사장이 말했다. 파주 소령원(坡州 昭寧園)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조선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의 후궁이며 21대 영조(재위 1724∼1776)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무덤이다. 1991년 10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58호 소령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1]되었다. 숙빈 최씨는 최효원의 딸이며 숙종 44년(1718)에 49세로 죽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영조는 최씨의 무덤 근처에다 막을 짓고 무덤을 받들었으며, 친필 비(碑)와 비각을 4곳에 세웠다. ..
조선왕릉은 남한 18곳과 북한 두 곳 합해서 20개 지역에 40기의 능이 있습니다. 왕릉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입니다. 여기에 연산군과 광해군의 2기의 묘가 더 있습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의 신분으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능이 아닌 묘에 묻혔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들지도 못했습니다. 왕릉은 조선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규정에 따라 한양 도성으로부터 10리에서 100리 사이에 마련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주 영녕릉이나 영월 장릉처럼 예외도 있습니다. 대능명능주조성연대형태1건원릉(健元陵)제1대 태조고황제1408년단릉제릉(齊陵)제1대 태조 원비 신의고황후1391년 1392년(봉릉)단릉정릉(貞陵)제1대 태조 계비 신덕고황후1409년(이장)단릉2후릉(厚陵)제2..
서삼릉(西三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희릉, 효릉, 예릉의 세 능(三陵)이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서삼릉(西三陵)은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의 3기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이 처음 들어선 이후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무덤 효릉,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이 조성되면서 3릉이 한양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삼릉'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삼릉에는 3기의 왕릉 이외에도 3기의 원과 1묘,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7기, 태실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166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를 이곳에 안장하고 소현묘(昭顯廟)라고 칭하였..
한 때는 왕이었던 남자 연산군의 묘는 광해군의 묘에 비해서는 잘 조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란 책을 쓴 신동준에 의하면 연산군은 그렇게까지 나쁜 폭군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중종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연산군을 사실 이상으로 나쁘게 평가했다는 주장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연산군묘(燕山君墓)는 조선 제10대 연산군(1495∼1506 재위)과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 愼氏)(1476 ∼ 1537)의 무덤이다. 중종 8년(1513년)에 조성되어, 1991년 10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었다. 왕 또는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지만 연산군은 그 지위가 군(君)으로 강봉되었기 때문에 묘(墓)라 하였다. 그 후 중종 7년(..
위키백과에 의하면 헌인릉(獻仁陵, 사적 194호)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조선조 왕릉이다. 이 곳에는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인 헌릉, 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인 인릉이 있다. 1 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태종과 세종이 합장된 왕릉이었으나 7대 임금이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가 세종의 능을 이장하자는 추진에 따라 예종 1년 현재의 경기도 여주로 이장하여서 태종의 능만 남았다가 후에 23대 임금인 순조가 안장되면서 현재의 헌인릉이 되었다. 헌릉 헌릉(獻陵)은 태종과 원경왕후를 같은 언덕에 봉분을 달리하여 안장한 쌍릉으로 두 봉분 모두 아래 부분을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세웠으며, 그 밖으로 각 봉분에 12간의 난간석으..
위키백과에 의하면 정릉(貞陵)은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으로 원래 정동(貞洞)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던 것을 태종 9년에 옮겼다. 사적 제208호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신덕왕후 강씨는 1356년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태조 원년(1392년) 조선의 개국으로 강씨는 음력 8월 7일 조선의 첫 왕비가 되어 현비(顯妃)에 봉해졌으며, 그 당시 이미 태조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두고 있었다. 태조는 신덕왕후 소생의 왕자이자 자신의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정안군 방원 등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태조 5년(1396년) 음력 8월 13일 신덕왕후가 사망하자 태조는 신덕왕후의 능침을 한양도성 안에,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