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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궁,능,원,묘 (73)
노래하는 사람
태릉(泰陵)은 조선 왕조 제11대 임금인 중종(中宗)의 왕비(제3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년∼1565년)의 능으로, 1565년에 조성되었다. 태릉은 왕비의 봉분(封墳) 1기만을 조성한 단릉(單陵)이다. 왕후는 중종의 제2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와 동원(同原)에 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봉은사(奉恩寺) 곁으로 천장(遷葬)하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히기를 원하였지만, 정릉(靖陵) 주위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 자주 침수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이 곳 태릉에 안장되었다. 태릉과 강릉은 모자간의 능이다. (위키백과에서 복사해 옴) 태릉泰陵(중종비 문정왕후) 위치 :서울 노원구 화랑로 681 능의 형식 :단릉 능의 조성 :1565년(명종 20) 능의 구성 태릉은 조선 11대..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공릉동)에 있는 조선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왕릉이다.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릉선수촌과 한국체육과학연구원을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 약 1km 지점에 어머니 문정왕후의 태릉이 위치해 있고 이 능의 오른편에는 삼육대학교가 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에게 도굴당한 선릉과 정릉과 달리 강릉과 태릉은 워낙 단단해서 도굴에 실패했다고 전한다. 또 2007년까지는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8년에 40년만에 부분 개방제로 바뀌었다. 한때 7월과 8월, 12월~2월까지는 산불 예방과 관람객 안전을 위해 개방하지 않았지만, 현재는 사계절 내내 관람이 가능하다. 어엿한 왕릉이건만 근처에 있는 어머니의 능인 태릉이 훨씬 더 유명하다. 아예 태릉이라는 능호 자체가 지명으로 쓰이기도 할 정도이고..
위키백과에 의하면 남양주 사릉(南楊州 思陵)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산 65-1에 위치하고 있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후사(後嗣) 없이 승하(昇遐)함에 부왕(夫王) 단종(端宗)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시가(媤家)인 해주정씨가(鄭氏家)의 묘역에 장례하였으며, 봉사(奉祀)도 정씨가에서 하여왔다.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
광해군은 과연 왕위를 빼앗길만큼 폭군이었을까? 연산군과 이 두사람에게는 이런 의문이 든다. 광해는 아버지 선조에 비해서는 훨씬 뛰어난 인물로 생각된다. 공과를 논하면 어느 쪽이 클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위치한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문성군부인 유씨의 묘이다.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인조 21년 1643년에 조성되었다.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문성군부인 유씨의 무덤이다. 봉분이 두개인 쌍분이며, 무덤 주변에는 석물들이 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아들로 형인 임해군 대신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경희궁에 가두는 행동을 하였다. 우리가 흔히 듣는 (廢母殺弟)때문..
전철 6호선 돌곶이 역에 하차해서 의릉으로 갈 수 있다. 한예종 정문과 의릉 정문이 바로 이웃해 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왕릉이다. 효종의 영릉(寧陵)과 같은 양식인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인데,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일직선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반면에, 의릉은 완벽히 상하의 위치로 능이 배치되어 있다. 아래쪽에 선의왕후 어씨가 묻혀 있고 위에 경종이 묻혀 있다. 의릉은 1970년 사적 제204호로 지정됐다. 경종의 아버지는 숙종이며 어머니는 한국 역사에 큰 파란을 일으킨 희빈 장 씨다. 경종을 비운의 왕이라 부르는데 생애가 어릴 적부터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경종은 폐비 장희빈의 소생인 데다 정치적으로는 남인계에 속하기 때문에 정치적 실세였던 서인..
전에 한번 다녀 온 적이 있었지만 오늘 다시 가다. 성종과 중조의 능이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능이다. 융건릉이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으로 부자간의 능이듯이 여기도 그러하다. 성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태평 성대의 시대를 살다간 왕으로 여겨지고 중종은 이복 형제인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성공시켜 왕위에 올랐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선정릉(宣靖陵, 사적 199호)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조선 왕릉으로 세 개의 능이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이 곳에는 조선 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 11대 임금 중종의 무덤인 정릉이 있다.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합쳐 선정릉(宣靖陵)이라 하는데, 선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495년에 성종의 능인 선릉을 세..
온릉은 미개방릉으로 있다가 2019년11월14일 무료 시범 개방되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온릉(溫陵)은 조선 중종의 원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능으로,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19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의 크기는 약 6만 6천여 평이다. 능 뒤에 곡장을 두르고 능 안에 석양, 석호 각 2필로 호위하게 하였다. 원분 앞에 혼유석을 놓고 양 끝에 망주를 세웠으며, 중앙에는 장명등을 놓고 양옆에 문석과 석마를 배치하였다. 단경왕후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중종)이 왕위에 추대되자 왕비에 책봉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인 신수근이 연산군 부인의 오빠인데다가 중종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7일 만에 폐비되어 사가에 머물다 1557년(명종 12) 71세로 소생 없이 승하하여 친정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후 16..
장릉은 우리 나라에 3곳이 있다. 김포 장릉(章陵)과 영월 장릉(莊陵)이 또 있다. 김포 장릉에 묻힌 사람이 파주 장릉의 주인인 인조의 부모인 원종과 인헌왕후이다. 영월 장릉은 비운의 왕 단종의 릉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파주 장릉(坡州 長陵)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이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3호로 지정되었다.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와 그의 원비 인열왕후의 합장릉이다.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는 1623년 3월 13일 즉위하였다. 그 후 청과의 외교관계가 악화되어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등의 변란을 겪었으며,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다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이 남아 있다. 가장 먼저 지은 경복궁, 그리고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그리고 경희궁이 있다. 궁궐들은 목조 건물들이어서 화재나 전쟁 또는 변란으로 인해 종종 파괴되었다. 대표적으로 경복궁은 임진왜란 이후 파괴되었다가 대원군 시절에 다시 복원된다. 그러나 곧 일제에 의해 다시 훼손된다. 다른 궁궐들도 일제에 의해서 많이 훼손되고 근래에 와서는 대한민국 정부나 서울시에 의해서 경희궁은 복원이 어렵게 된 경우도 있다. 궁궐의 건물은 품계가 있어서 이름만 보아도 그 건물의 중요도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경복궁 17-10-20 (tistory.com) 경복궁 17-10-20 시험 마지막날 경복궁을 가다. 재작년인가 응선이가 왔을 때 한번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는데 실수로 사진을 ..
조선 5대 궁궐 가운데 복원이 가장 되지 않은 궁궐이다.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에는 지금의 건물들도 없었던 것 같다. 정전과 편전 그리고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는 태령전만 있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경희궁은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궁궐로,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어 있다.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에 완공된 이궁으로,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들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에 대비되는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렸다. 규모로 보자..
몇 년 전 창덕궁을 올 때 온 적이 있지만 그때는 대충 둘러본 것 같아서 다시 왔다. 창경궁은 홈페이지에 의하면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세종 즉위년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
전부터 세종 대왕릉을 가보고 싶었다. 집에서 전철을 타고 세종대왕릉 역까지 가서 버스를 갈아타고 가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세종대왕 동상과 당시에 만들어진 과학기구들의 복사품이 진열되어 있다. 이 전시물들을 지나면 오른편에 최근에 새로 지은 재실이 있다. 좀 더 위에 옛날 재실이 있지만 새로 지은 곳이 원래의 자리여서 이 곳에 복원했다고 한다. 옛 재실은 지금은 작은 책방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여기서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실 수도 있게 되어 있다. 재실을 지나면 왼편에 연지가 천원지방설에 따른 형태로 있고 재실을 지나 금천을 건너면 이후부터는 홍살문과 참도 그리고 정자각, 봉분들이 다른 능들과 비슷하다. 영녕릉은 능침공간에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선 시대의 왕은 정조 대왕이다. 그래서 전부터 융건릉을 다시 가고 싶었다. 오래 전에 한번 다녀 온 적이 있긴 했지만 당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오늘 다시 가게 되었다. 지공선사가 되었으니 전철도 무료로 탈 수 있고 시간도 철철 남아도니까 여유롭게 다녀올 수 있었다. 백마역에서 병점역 까지 가서 병점역 후문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용주사와 융건릉을 갈 수 있었다. 2시간 40분 정도 걸려서 용주사를 먼저 들르고 다음에 융건릉으로 가다. 어릴 적 부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정조는 사도세자의 복권과 제사에 정성을 많이 쏟는다. 그래서 지지대 고개에서 송충이를 씹었다는 전설도 있고 신하들과 싸우면서 까지 아버지의 복권에 힘을 쏟았다. 궁중에서 이 곳으로 행차할 때 ..
다음 백과에 의하면성령대군 이종은 조선 태종의 넷째 아들로서 성녕군에 봉해졌다가 1414년(태종 14)에 대군이 되었으며 대광보국대부의 위계에 올랐다. 어려서부터 태도가 의젓하고 총명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4살 때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묘는 대자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장대석 3단을 쌓았으며 주위에 호석(護石)을 둘렀다. 묘소의 좌우에는 석호와 석양이 세워져 있고 묘 앞에는 상석, 장명등을 두었으며 좌우로는 문인석을 배치하였다. 신도비는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과 거북모양의 귀부를 갖추고 검은 수석으로 된 비신을 화강암 우주석에 넣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1418년(태종 18)에 세웠으며 비 전체 높이 300cm, 비신 높이 163cm, 폭 130cm, 두께 25cm의 규모이다. 비문은 ..
최영 장군 묘 올라가기 전 오른편에 있다. 2단으로 된 위의 묘는 경안군의 묘이고 아래에 있는 묘가 임창군의 묘이다. 경안군은 위키백과에 의하면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 1644년 10월 5일 ~ 1665년 9월 22일)는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3남이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회(檜), 초명은 석견(石堅)이다. 따라서 일부 문헌에서는 경안군 이석견(李石堅)으로도 부른다. 소현세자의 아들들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유일한 아들이었다. 소현세자 사후 1646년 민회빈 강씨가 인조의 수라에 독을 탔다는 혐의로 사사된 뒤, 연좌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숙부 효종 즉위 후 1656년 석방되고, 1659년(효종 9년) 윤 3월 4일 복권되고 경안군에 봉작되었다. 생전 관직..
위키 백과에 의하면 최영 장군 묘(崔瑩 將軍 墓)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무덤이다. 1975년 9월 5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후기의 명장이며 충신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처형된 최영(1316∼1388) 장군의 묘소이다. 부인 문화 유씨와의 합장묘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 그는 공민왕 1년(1352) 조일신의 난과 공민왕 3년(1354) 장사성의 난을 평정한 것을 비롯하여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고 수십 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흔들리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는 역할을 했다.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영토를 빼앗으려 하자 요동정벌 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백헌(白軒)이다. 그는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23년(인조 1)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한 공을 세웠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내려와 항복했을 때 예문관 제학으로 삼전도(三田渡) 비문을 지었다. 이후 대제학, 판서를 거쳐 1649년(효종 즉위)에 영의정에 올랐다. 묘가 있는 위치는 청계산(淸溪山)의 서남쪽 구릉인 석운동의 대감능골이다. 대리석으로 된 묘비의 규모는 높이 162㎝, 너비 53㎝, 두께 22㎝로, 1751년(영조 27)에 세워졌다. 앞면에는 ‘유명조선국영의정문충공백헌이선생경석묘정경부인전주유씨부좌(有明朝鮮國領議政文忠公 白軒李先生景奭墓貞敬夫人全州柳氏祔左)..
강화 나들길 3코스 걸으면서 가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고려시대 관리·문신·학자 이규보의 무덤. 시도기념물. 인천광역시 기념물 15호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다. 묘는 단분으로 하단에 호석이 둘려쳐 있으며 봉분의 둘레는 16m, 높이는 1.8m이고, 묘 앞에 상석과 장명등이,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과 석양(石羊) 1쌍, 묘갈이 배치되어 있다. 묘 주변의 석물 중 문무석은 매우 고졸하여 당시 유풍을 알 수 있는 귀한 조각이며, 석양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고려시기의 조각이다. 묘와 약간 떨어진 곳에 재실이 있다. 이규보는 벼슬이 집현전 대학사와 평장사에 이르렀으나 관운(官運)은 없었다. 북방민족에 시달리는 우리 민족의 기상을 고취시키고자 고구려 건국..
강화 나들길 3코스 걸으면서 가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후기 제21대 희종의 능. 왕릉. 사적. 강화 석릉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왕릉 중 하나이다. 강화 석릉 외에도 이 시기에 강화 곤릉(坤陵), 강화 가릉(嘉陵), 강화 홍릉(洪陵) 등의 왕릉이 조성되어 현존하고 있다. 고려시대 강화에 석릉이 조성된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찾아내어 다시 봉분한 바 있으며, 관리 소홀로 봉분이 붕괴되고 주변 석물들이 없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 정비하였다. 2001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사업을 시행한 이후, 현재의 모습..
강화 나들길 3코스 걸으면서 가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가릉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후기 제24대 원종의 왕비 순경태후 김씨의 능. 왕비릉. 사적. 강화 가릉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왕릉 중 하나이다. 강화 가릉 외에도 이 시기에 강화 석릉(碩陵), 강화 곤릉(坤陵), 강화 홍릉(洪陵) 등의 왕릉이 조성되어 현존하고 있다. 고려시대 강화에 가릉이 조성된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관리 소홀로 봉분이 붕괴되고 주변 석물들이 없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 정비하였다.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사업을 시행한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되었다. 사적으로 지정될 당시의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