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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한국 현대사 산책 본문
1940년대 부터 1990년대까지를 18권의 책으로 기록했다.
1940년대는 2권으로 기록했고 80년대는 4권으로 기록했다.
나머지 년대는 각각 10년 단위로 3권씩 기록했다.
각권은 대략 3백 수십 페이지를 넘는다.
저자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전북대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40년대 1권
해방 전후사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의 일들을 신문이나 다른 사람들의 기록을 인용해서 설명한 책.
이승만, 김구, 여운형, 박헌영등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편파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두한도 저자의 글에 의하면 우익에 편향된 사람으로 정권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우리 나라는 하지 중장이 책임자가 된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우리 나라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처리하고 소련의 성장에 따라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많은 결정을 하게 된다.
군정은 친일 인사들을 숙청하지 않고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 경찰이나 행정기관 곳곳에 다시 임명해서 친일숙청은 어렵게 된다.
이들이 한민당의 주축이 되고 일제시대에 번 돈으로 각종 조직이나 정당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남로당이나 공산당은 친일파를 철저히 배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좌우의 분열과 반목은 해방이 되었지만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고 남북이 각각 정부를 세울 구상을 한다.
북에는 새파란 김일성이 소련의 사주에 따라 권력을 잡게 되고 남한은 임정 요인들이 귀국했지만 이승만의 힘이 더 세어서 김구는 이승만의 힘 아래 놓이게 된다.
찬탁 반탁이 대립하면서 여러 정당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기지만 미군정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조종하려고 한다.
46년 10월에 일어난 대구 항쟁은 쌀부족이 원인이긴 했지만 미군정이 한국인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뜻대로 한국을 조종하려고 하는데도 원인이 있다.
이때 쌀값이 평소보다 10배나 올랐으니 서민들이 살기 어려워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조들이 파업을 일으키면 경찰들이 총을 쏘면서 진압해서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
박헌영은 월북해서 남로당을 조종하고 있다.
38선이 생겨서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하고 남북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40년대 2권
몽양 여운형은 좌우를 아우르면서 남북을 하나된 나라로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김일성이나 이승만이 남북 단독 정부를 세우려는 것과 달리 통일 정부를 세우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47년 7월 19일 한지근의 저격으로 암살당했다.
그는 11번째 테러에서 목숨을 잃었다.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에서도 친일파들은 여전히 정권을 잡았고 한민당은 이들 기득권 세력들이 득세했다.
제주 4.3 사건이나 여순반란에는 진압군들이 무자비하게 그리고 억울하게 죄없는 백성들을 너무 많이 죽였다.
청년단도 빨갱이를 색출한다는 미명하에 양민들을 너무 많이 죽였다.
미군정은 이런 사정을 무시하고 있었다.
김구는 이승만의 그늘에 가렸고 임정 사람들을 처음에는 기용하려다가 너무 늦은 48년에야 남북 합작 정부를 세우려고 한 주장이 이승만의 반공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밀렸다.
반공이 친일 청산보다 우선이었으며 초대 정부에는 대통령부터 김구등 개신교인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이들도 반공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억울한 사람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김일성은 전쟁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있었지만 이승만은 허풍만 치면서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을 듯이 뻥을 쳤다.
여운형, 장덕수, 김구등 암살당한 아까운 인물들이 많다.
이승만은 청년단을 잘 활용했고 이들은 경찰보다 더 센 힘을 가진 초법적인 기관이었다.
미.소가 해방을 시켜준 것이었기 때문에 통일은 요원한 것이었고 남북에 주둔한 이들 강대국의 뜻에 맞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이데올로기 전쟁에 우리는 대항할 힘이 없었다.
50년대 1권
50년대는 3권으로 되어 있다.
40년대가 2권이었던 것에 비해 분량이 많다.
50년대는 6.25부터 4.19전야까지의 우리 나라 상황을 기록했다.
이승만의 허풍과 무대책으로 북한군은 쉽게 서울을 점령하고 대통령 일행은 수원 대전 대구 목포 여수 부산등으로 피난을 다니며 대응한다.
미군이나 유엔군이 없었으면 남한은 쉽게 적화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덕분에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한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밀려 1.4후퇴가 일어나고 휴전의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6.25때 좌우가 양민을 학살한 사건은 너무 많다.
노근리, 신천학살, 흥남부두 철수사건, 거창 사건, 지리산 빨치산, 국민 방위군이란 이름으로 모병해서 제대로 보급품을 주지 않아 9만명이 죽는 해골의 행렬등 수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미군은 세균전을 벌였다는 증언도 있다.
맥아더에 대해서도 비난적인 시선이 많다.
우리 나라 목사들이 부산 피난 시절에 제주도로 탈출하려고 서로 싸우는 장면등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저자가 갖고 있다.
강원용 목사와 문익환 목사가 당시 젊은이로서 활약한 이야기도 나온다.
40년대 책에서는 영락교회가 적산을 불하받아 교회를 세운 이야기도 나온다.
전쟁 중에도 우리 나라의 교육 열기는 식지 않아서 텐트나 골짜기나 나무밑에서도 어디서나 교육은 계속되었다.
대학생들은 징집을 연기받을 수도 있어서 부유층들은 징집을 피하는 수단으로 자녀들을 외국 유학뿐만 아니라 대학에 보내었다.
어찌보면 어려운 국내 상황에서도 미래를 위해 젊은이들을 교육시킨 것은 높이 평가받을 일이기도 하다.
50년대 2권
전쟁 후에도 이승만의 독재와 부정 부패는 계속되고 미국의 영향이 강하게 미친다.
미국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영어는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소설 자유부인이 유행했고 사사오입 개헌이 있었고 학술원, 예술원이 만들어지고 이승만 우상화는 극심해졌다.
불교 정화운동으로 조계종이 태고종을 몰아내고 대처승들은 이혼을 해야 했다.
이승만은 이런 불교 정화운동도 자신의 권력을 위해 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민주당의 신익희가 선거를 앞두고 뇌졸증으로 죽는 바람에 이승만은 더 쉽게 권좌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군이 아주 부패했고 전쟁 미망인들이 어려움을 많이 겼었다.
박태선, 문선명, 나운몽등의 기독교 이단들이 득세했다.
골로 간다는 말은 양민들을 학살할 때 골짜기로 끌고 가서 죽인데서 나온 말이다.
50년대 3권
이 책에 의하면 이승만은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자신을 절대군주로 착각하고 산 사람같다.
기독교가 이승만이 장로라는 이유 때문만으로 혹은 권력에 기생하는 정치 목사들 때문에 부정 부패의 대해서 눈감고 있었던 것 같다.
이어령은 당시 최고의 문인이었던 김동리에게 도전했고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라디오 방송은 유선을 이용한 청취도 시골에서는 있었다.
tv방송도 생겼다.
가짜 이강석 사건이 생겼고 신익희에 이어 조병옥도 선거를 앞두고 죽는다.
조봉암은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을 당한다.
이승만은 한국을 세계 4대 강국이라고 선전하고 다녔다.
군인 수가 많았던 점에서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이정재나 임화수같은 깡패들이 이기붕과 손잡고 정치 테러를 했다.
재일교포 북송사건에 반대했지만 일본과 북한의 이익에 부합해서 이루어졌다.
경향신문이 폐간되었다가 4.19 이후 다시 복간된다.
재벌은 정경 유착으로 큰 돈을 벌어 정치자금을 대주었다.
삼성도 그런 재벌 가운데 하나였다.
제일모직을 불하받았고 은행도 운영할 수 있었다.
3.15 선거를 위해 온갖 부정이 다 계획되고 저질러졌다.
하지만 언론의 자유가 완전히 통제되지 않아서 신문들 가운데는 사실을 발표할 수도 있었다.
60년대 1권
3.15 부정 선거로 마산에서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신으로 바다에 떠오르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4.19혁명은 고등학생부터 시작해서 지방대학들이 가세하고 서울의 대학들은 그 후에 가세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특권의식이 있었고 이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4.19는 학생 의거이다 보니 이승만이 하야한 후에도 민주당은 어부지리로 정권을 잡게 되고 신구파의 분열은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고 이기붕 일가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총리 장면과 대통령 윤보선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장면은 사람은 좋았지만 정치가로서는 부족한 사람으로 보인다.
미국을 너무 의존한 것 같다.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은 박정희 세력을 누르지 못하자 결국 협력하게 되고 미국도 반공산주의자인 박정희를 인정해주게 된다.
박정희는 자신의 남로당 경력 때문에 미국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혁신 세력들을 탄압했다.
대구에서 교원 노조가 강력하게 일어나고 어용지식인들에 대한 반대가 일어났다.
사이비 신문들은 기업체나 군인들의 비리를 이용해서 돈을 뜯어내고 기자들은 월급 대신 이렇게 먹고 살았다.
민족일보의 조용수는 박정희의 빨갱이 사냥에 희생된 인물이었다.
60년대 2권
박정희는 쿠데타 후에 국가를 군대식으로 운영했다.
민정으로 돌리겠다고 약속했다가 취소했다.
kbs tv 방송국이 개국하고 화폐개혁을 했지만 실패한 개혁이었다.
정치자금을 위해서 증권, 워커힐, 새나라 자동차, 빠찡꼬를 만들면서 의혹을 만들었다.
민주공화당을 창당했고 광부와 간호사를 서독에 파견해서 외화를 벌었다.
북에서 밀사로 내려온 황태성을 간첩으로 조작해서 사형시켰다.
kbs가 운영자금을 위해서 광고를 했다.
수출 위주의 경제 정책을 펴면서 1억불 10억불 100억불 수출을 단시간에 이루어냈다.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라는 노래와 회전의자 그리고 신성일 엄앵란이 주연한 맨발의 청춘이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른 최희준도 큰 인기를 얻었다.
60년대 3권
60년대는 수출을 증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정부로부터 특혜 저리융자를 받은 기업들은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맹호부대가 월남으로 파병되었다.
미국은 한국군의 파병을 위해서 박정희가 왠만한 잘못을 해도 눈감아 주었다.
삼성이나 재벌들의 정경유착이 심했다.
기자들이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쓰면 중앙정보부로부터 테러를 당하거나 불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TV 코미디가 인기가 많았다.
박정희 선거를 위해서 지역 분열주의를 조장했다.
경상도에는 많은 투자를 했고 호남은 박대 당했다.
3선 개헌을 위해서 총력을 기울여 성공했다.
동백림 사건으로 윤이상등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한강 개발과 여의도를 건설했다.
북한은 1.21사태를 일으켜 김신조등을 남파했으나 실패했고 푸에블로호를 납치했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였다.
이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했다.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으로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중학교 뺑뺑이 입학이 시작되었고 '월남에서 돌아 온 김상사', '서울의 찬가'가 유행했다.
3.1빌딩등 고층 건물이 들어섰다.
국산 자가용을 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박통 시절은 기회주의 공화국이었다.
70년대 1권
70년대는 내가 고등학생부터 2년 정도의 직장 생활을 거쳐 대학생활을 시작하고 군대 생활을 한 기간이다.
이 시대는 박정희의 독재가 절정을 이룬 시기였고 결국 부하의 총에 사라진 기간이다.
농촌은 급격히 붕괴되면서 도시로 몰려드는 젊은이들 때문에 도시 빈민과 노동문제가 큰 이슈였다.
전태일의 분신이나 도시산업 선교회등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수출이 아니면 살 수없던 시절이었다.
정인숙이라는 여자가 살해되고 그의 아들이 박통의 아이냐 정일권의 아이냐 하는 소문이 한창 떠돌았다.
요정 정치가 극심했다.
시인 김지하가 오적을 발표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민족적인 자신감도 많이 생겼고 하면 된다는 정신이 강하게 일어났다.
어용 지식인들은 박정희를 강력하게 비호했다.
언론 통제가 극심했다.
선거를 위해서 서승 서준식이란 형제를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켰다.
그린벨트와 산림녹화는 박정희가 가장 성공한 시책 가운데 하나다.
북파공작원들을 훈련시켰지만 이후락과 김일성이 만나면서 이들의 용도가 불분명해지자 학대했고 결국 이들이 버스를 탈취해서 시내로 돌진하게 되었다.
공화당 4인 체제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인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의 세력이 강했지만 결국 박정희에게 토사구팽당한다.
4.27대선 이후 부정 선거에 대한 시위가 빈발하자 12.6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더 독재를 강화한다.
윤형주, 송창식 양희은등 포크 음악 가수들이 인기를 얻었다.
라디오 dj들이 인기가 있었고 대학생들의 미팅 문화가 활발했다.
7.4 남북 공동성명으로 평화분위기를 만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독재는 더욱 강화된다.
조선일보는 외자로 코리아나 호텔을 짓고 통일벼가 증산에 성공하자 쌀부족에 한숨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혼식, 분식 장려는 학교에서도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새마을 운동이 일어났고 군대식으로 전국에 퍼져나갔다.
박정희가 스스로 새마을 노래도 만들었다.
이순신 숭배를 국민 의식 개조사업의 일환으로 사용했다.
한국 노총은 어용화되어 위원장은 국회로 진출할 수 있었다.
트롯에서는 남진과 나훈아가 인기를 누렸고 신중현과 김추자가 락음악에서는 인기를 얻었다.
70년대 2권
70년대 초반 우리 나라는 수출 증대와 중화학 공업 육성에 매진했다.
유신체재를 유지하기 위해 박정희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두환의 하나회가 이때 이미 박정희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언론인들을 회유해서 정관계로 진출시켰다.
일본인들의 기생관광과 현지첩이 기승을 부렸다.
기생과 현지첩들은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외화를 버는 애국자들이었다.
김대중 납치는 결국 무사귀환으로 끝났다.
서울법대 교수 최종길은 유신체재에 반대하다가 의문사를 당했다.
오일 쇼크가 터졌다.
TV 1일 연속극이 붐을 이루었고 장발과 미니 스커트 단속이 심했다.
나도 장발 단속에 걸려 두발을 잘린 적이 있다.
유신 헌법 개정을 위한 백만인 서명 운동은 실패했다.
영화 별들의 고향이 성공했고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가 유행했다.
박정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대신 죽었다.
문세광은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이 죽음도 의문이 남아 있다.
경호실장이 된 치지철이 박정희를 신격화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활약했다.
포드가 방한하도록 김한조가 로비해서 성공했다.
동아일보를 탄압하기 위해 광고를 억압해서 국민들이 성금을 보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신문사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산업선교회가 노동운동을 많이 했다.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의서의 승리로 박정희는 다시 힘을 얻게 되고 수사에서는 고문이 일상이 되었다.
조선.동아 두 신문사에서 많은 민주적인 기자들이 강제해직되었다.
민청학련 재판은 날조된 것으로 죄없는 사람들을 고문했고 인혁당 사건은 8명을 대법원 판결 다음날 새벽에 바로 사형하고 고문을 은폐하기 위해 시신들을 화장해버렸다.
서울대 농대 4학년 김상진은 독재에 항거하며 스스로 할복 자살했다.
월남은 결국 공산화되었다.
박정희와 김영삼의 회담은 투쟁열기를 식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준하도 등산갔다가 의문사했다.
이승만 때 있었던 학도호국단이 부활했다.
중동 건설붐이 일어 오일 달러를 많이 벌었다.
삼환기업이 최초로 성공했다.
종합무역상사들이 정부의 후원으로 많이 성장했다.
대마초 파동이 있어쓰고 영화 '영자의 전성 시대'가 성공했다.
70년대 3권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개발과 가족계획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영호남의 균형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포항에서 석유가 나온다는 해프닝이 있었다.
신민당은 내분이 일어났고 박정희는 세종대왕을 숭배하면서 자신을 그와 동일 인물로 만들려고 했다.
외래어 추방이 지나치게 시행되었다.
반상회를 통해 서로 감시하고 사회에서는 말 한마디 잘못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택시타고 가다가 술김에 한 말 때문에 경찰서에 잡혀간 사람도 있었다.
북한은 판문점 도끼만행으로 미군장교들을 죽였다.
하이틴 영화가 성공하고 이덕화, 임예진 같은 스타가 탄생했다.
미국에 로비하다가 코리아게이트가 터지기도 했다.
100만불을 뇌물로 주기도 했다.
충효교육으로 국민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mbc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등이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1백억 달러 수출으르 이루었다.
새마을 운동에는 양면성이 있었다.
공돌이 공순이에 대한 사회적 폭력이 있었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똥물을 뒤집어썼다.
강남 개발로 부동산 투기가 대단했다.
언론 검열을 피하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발표되었다.
비밀리에 국산 미사일이 개발되었다.
신문과 tv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수사에서 고문이 일상화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하고 죽기도 했다.
김영삼은 의원직을 제명되었다가 복귀해서 신민당 총재로 복귀했다.
그 뒤 다시 의원직에 제명당한다.
지미 카터는 한국을 방문했지만 박정희와의 대화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김장환 목사와 절친한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박정희에게 예수 믿으라는 전도를 하고 갔다.
yh노동자들은 많으느 어려움을 겪었다.
도시산업선교회가 노동자들에게 노동운동에 눈뜨게 해준 큰 공을 세웠다.
김형욱은 프랑스에서 실종되었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은 당사자들이 조직 이름을 잘못 사용해서 간첩같은 인상을 풍길 수밖에 없었다.
김재규는 경호실장 차지철과 박정희를 살해하고 나서 개인의 정분을 끊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박정희의 엽색행각은 일본 사무라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유부녀들은 거절하면 강요하지는 않았다고.
부정부패가 너무 심해서 결국 정권이 망했다고 보여진다.
전두환이 등장하면서 민주화는 또다시 좌절된다.
80년대 1권
1980년대의 우리 나라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시기이다.
국내에서 80년 5월에는 신군부의 잔인한 광주 학살이 있었고 그로부터 8년 뒤인 88년에는 아주 성공적인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렸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너무 많은 죄없는 자들의 피를 흘려야 했다.
사북탄광의 광부들이 데모를 하다가 탄압을 받았고 언론은 신군부의 탄압으로 숨을 죽여야 했다.
광주학살은 아직도 일부에서는 북한의 사주에 의한 혼란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만큼 당시 언론은 사실을 제대로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삼청교육대도 죄없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너무 많이 괴롭혔다.
민심을 얻기 위해 과외금지를 했고 대학은 졸업정원제로 많은 학생들이 좀 더 쉽게 진학할 수 있었다.
졸업정원의 130%가 입학할 수 있었다.
김대중은 내란음모 사건으로 죽다가 살아났다.
호남인들은 광주 학살 때문에 지금도 박정희나 신군부의 맥을 잇는 정당이나 사람에게는 표를 줄 수 없다.
80년대2권
5공에서는 야당도 여당의 들러리로 2중대,3소대등의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전두환은 김대중을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방미에 성공했다.
kbs와 mbc도 충성경쟁에 열심이었다.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정당이 압승했다.
광주에서는 그렇게 당하고도 민정당 후보들이 1,2등으로 당선되었다.
서울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1982년1월5일 밤12시를 기해 통행금지를 해제했고 애마부인등 선정적인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다.
대학 총장들도 어용이 되어갔지만 고대 준엽 총장은 투쟁하다가 짤렸다.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장영자. 이철희 사건이 터졌고 이순자의 아버지가 대한 노인회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 운동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금융실명제 파동이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농촌에서는 수입 곡물들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고 양파농가와 축산 농가들이 미국 소고기 도입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9시 뉴스 시작은 언제나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땡전뉴스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138일간 계속되어 1만 189명이 상봉하는 기록을 남겼다.
kal기가 소련에 의해 격추되었다.
아웅산 암살폭발사건으로 미얀마에서 정치인들이 많이 죽었다.
대도 조세형이 탈주해서 부자들의 돈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부 나눠주기도 하는 바람에 국민들이 그를 의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위장취업 노동 운동을 벌였고 민추협이 출범했다.
함평.무안 농민대회는 농민들이 단결 저항한 움직임이었다.
김대중이 귀국하고 2.12 총선에서 신민당을 위시한 야당이 선전해서 야당의 득표가 절반을 넘었다.
국제그룹은 괘씸죄에 걸려 해체되었다.
동아와 조선은 서로 자기들이 정통 민족지라고 싸웠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이 있었다.
구로 공단 사람들이 노조를 결성해서 대항했다.
남북이 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기록을 중심으로 해서 광주의 참상을 잘 보여주었다.
80년대 3권
장충체욱관에서 통일주체 국민회의 의원들을 모아서 대통령을 뽑은 전두환이었지만 대통령 직선제를 향한 국민의 요구는 거세었다.
대학생들은 전방입소 반대투쟁을 했고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생이었던 권인숙은 부천에 있는 주식회사 성신이라는 가스배출기 업체에 취직했다.
위장취업으로 조사받던 그녀는 담당 형사 문귀동으로부터 성고문을 받았다.
이게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보도지침에 대한 폭로가 있었고 왜곡보도에 대한 반발로 TV시청료 거부운동이 있었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이 성공했다.
평화의 댐 사건으로 안보를 핑계로 국민들을 탄압했고 코묻은 돈까지 긁어모았다.
김대중은 대통령 불출마선언을 했지만 나중에 출마해서 대통령이 되었다.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이 있었다.
전두환은 독재를 했지만 유가하락과 세계 경기가 좋아서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었다.
전두환의 공과에서 공으로 꼽는 것이 올림픽 유치와 경기진작과 물가안정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다.
연세대 앞에서 6.10 항쟁이 있었고 중산층도 호응했다.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란 민중가요가 유행했다.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언론노조가 결성되었다.
kal기 폭파 사건이 있었다.
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교육관 3층에서 서울대생 조성만이 양심수 전원 석방, 미국 축출, 공동 올림픽 개최 등의 유서를 남기고 할복 투신 자살했다.
군사독재 기간에 많은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저항했다.
87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열된 덕분에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87년에 서머타임제가 실시되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미국영화 직배가 시작되어 국내 영화인들이 데모를 많이 했다.
서울 올림픽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우리 나라는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4위가 되면서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넘쳤다.
80년대4권
전통은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서 협박도 했지만 촌지도 엄청 많이 주었다.
그래서 자기에게 유리한 기사들을 쓰게 만들었다.
저자는 조선일보가 특별히 나빴다고 말한다.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등 그의 노래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농촌은 파탄나고 서울로 서울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광주 항쟁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고 호남인들의 한을 모르니까 그들을 욕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노태우는 중간 평가하겠다고 선거전에는 말했지만 하지 않았다.
중간평가에 대해서 김대중과 김영삼의 생각이 달랐다.
김영삼은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아서 대통령에 당선된다.
내 생각에는 이래서 우리 나라 야당의 선명성이 무너졌고 그가 민주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과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
황석영, 문익환, 임수경등이 통일과 민족 화합을 위해 방북했지만 반공법 위반으로 다들 옥고를 치렀다.
조선대 교지 편집장 이철규가 저수지에서 의문사했다.
동의대 사건을 진압하던 경찰 7명이 도서관에서 불에 타 죽었다.
전교조가 이승만 정권 이후 다시 결성하다.
nl.pd논쟁이 붙었다.
대학생들이나 재수생들을 협박해서 학내 정보를 캐내는 학원 프락치 공작을 많이 했다.
uip영화 직배 반대 운동이 있었다.
광주 항쟁을 잊게 하기 위해서 올림픽을 많이 활용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증권과 부동산 투기가 엄청 심했다.
영호남 갈등을 정권은 이용했고 그 여파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호남인들에 대해 영남인들이 근거없는 경멸과 비난을 하고 있다.
정주영의 방북으로 화해무드가 조성되기도 했다.
해태의 프로 야구 우승으로 호남인들의 환호가 터졌다.
조정래 태백산맥이 엄청나게 팔리면서 남북문제와 앙민 학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90년대 1권
90년대는 3당 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를 다루고 있다.
김영삼은 노태우의 민자당과 합당해서 대통령이 된다.
노태우의 황태자로 위세를 떨치던 박철언은 김영삼과 불화하고 부동산 투기가 엄청났다.
님부군이란 영화가 성공하면서 우리 사회에도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수서사건은 정치와 언론의 부패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보그룹이 엄청난 특혜를 받고 뇌물로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었다.
강경대 치사로 사회가 다시 혼란해졌고 시인 김지하는 자살을 조종하는 세력이 있다고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고 말해서 운동권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순재,최민수,하희라가 출연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와 태평양 전쟁 막바지의 시대를 다룬 '여명의 눈동자'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할리우드 영화 직배로 우리 영화가 큰 타격을 입었다.
정주영은 통일 국민당을 김동길과 함께 칭당했으나 대통령이 되는 데는 실패했다.
마광수와 이문열의 문학관이 충돌했다.
마이카시대가 도래했다.
10대들이 대중문화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출현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었다.
노래방이 대중화 되었다.
김영삼은 대통령 초기에는 아주 잘 해서 지지도가 90%를 넘었다.
이건희는 아내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어야 한다면서 개혁을 강조했다.
우르과이 라운드로 쌀개방이 되었다.
서편제 열풍이 일었다.
김영삼은 청교도적 생활을 했고 박정희 복고주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90년대 2권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은 문민 정부에서 막강한 실력자였다.
김일성이 죽고 서강대 박홍 총장이 주사파 에 대해 강경 발언을 많이 했다.
성수대교 붕괴, 충주호 유람선 화재, 아현동 도시 가스 폭발, 대구 지하철 가스 사고, 삼풍 백화점 붕괴등 대형 사고들이 많았다.
삼성이 승용차 시장에 진입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인기.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가 인기.
pc통신붐이 일어났다.
차인표. 신은경이 인기.
태백 산맥, 투 캅스 인기
지존파가 무차별 살인했다.
전두환, 노태우 구속하다
이건희의 변화 역설.
조선 총독부 건물 철거.
모래시계 열풍. 김건모,박진영 인기.
oecd 가입. 우리 나라 정치 기업등 주요 자리는 서울대 출신들이 거의 장악하고 있다.
서울대 폐교론이 있었다.
월드컵 유치 열풍이 있었다.
김자옥의 공주병이 유행.
90년대 3권
한보가 부도가 나면서 정경 유착과 뇌물 문제가 많이 언급되었다.
김현철은 김영삼의 황태자 노릇을 했다.
결국 구속되었다.
북한 최고위층 황장엽이 망명했다.
이회창은 대선 후보로 선츨되었지만 아들의 병역 문제로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아들이 군에 안 갔는지 못 갔는지 모르겠지만 키에 비해서 몸무게가 너무 적게 나가서 군 입대가 불허된 것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IMF로 온 나라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금모으기등 온 국민의 노력으로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예상보다 훨씬 빠른 기간에 빚을 다 갚았다.
박찬호와 박세리가 희망을 주었다.
마이카 시대가 열려서 집보다 차를 먼저 사게 되었다.
이것은 집값이 하도 비싸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대중화 되었다.
동성애나 유치한 차림등이 솔직한 것처럼 여겨져서 한동안 유행했다.
김영삼이 노태우와 손잡고 대통령이 되었듯이 김대중은 김종필과 손잡아서 대통령이 되었다.
정주영이 소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갔고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영호남 지역주의가 정치인들에 의해 점점 고착화 되었다.
헐리우드 영화에 대항해서 스쿼린 쿼터제를 살리려고 영화인들이 많이 노력했다.
쉬리를 비롯한 좋은 한국 영화들도 많이 나오면서 허리우드에 맞서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가 되었다.
햇볕정책이 논란이 되었다.
서해교전에서 김대중 정부가 너무 북한을 의식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래방, pc방 등이 전국에 엄청 많이 생겼다.
한류가 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했다.
스타벅스가 이대 앞에 최초로 우리 나라에 진출했다.
저자는 내 기준으로는 약간 좌편향된 사람으로 보이지만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정보를 많이 주었다.
하지만 80~90년대를 젊은 시절에 살아온 사람이라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저자가 호남 출신이라면 더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40~90년대 까지를 일괄할 수 있어서 고맙다.
1940년대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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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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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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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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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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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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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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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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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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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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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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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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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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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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