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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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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문화인류학 개론서이면서 소개하는 책이다. "차이는 존중하되 차별은 배격한다." 서구문화가 경제력과 힘을 바탕으로 18세기 이후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각 지역의 다른문화들을 잘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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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시대가 조선의 유교 국가화와 사대가 크게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는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정권을 잡음으로 인한 정통성의 부족을 중화와 성리학에 의존해서 강화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또 이 시대는 소중화 의식이 크게 일어났고 명나라와의 관계도 군신관계에서 부자관계로 변하면서 명나라에 대해서 절대적인 추종의 관계로 변한다. 조광조 일파가 축출되는 기묘사화를 통해서 사림이 퇴출된다. 이는 의리와 현실의 괴리로 보아야 한다. 대학연의와 소학으로 왕과 개인을 교육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났다.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었지만 절의를 지켰기 때문에 문묘에 종사되고 조광조를 비롯한 4현과 이황의 5현을 문묘에 종사하는 문제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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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연산군을 옹호하는 내용이다. 연산군은 왕도주의자가 아니고 패도주의자이며 신권 위에 강력한 왕권을 두려고 했다. 섹스 중독자가 아니고 낭만적이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무오사화는 훈구파와 사림의 대립으로 보고 신권세력의 도전에 대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로 본다. 갑자사화는 폐비사건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좀 과잉방어이긴 하지만 정당방위라고 주장한다. 연산군 시대는 아버지 성종대에 이어 태평성세였다. 군신공치는 사실은 신권이 왕권을 견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삼년상은 정확히 말하면 2년 3개월 즉 27개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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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역사와 수학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들을 설명한 책. 미적분에 대한 설명은 내가 아 부분을 전혀 몰라서 이해하기 어렵다. 언어 결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가 언어에 의해 결정되며 인간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사고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재미있는 문제 하나. 1. 1~9 사이의 숫자 하나를 생각. 2. 그 숫자에 9를 곱한다. 3. 그 숫자가 두 자리면 두 숫자를 더한다. 4. 그 숫자에서 4를 뺀다. 5. 그 숫자를 제곱한다. (1~9 사이 숫자의 9의 배수는 앞뒤의 숫자를 더하면 언제나 9가 되기때문에 9에서 4를 뺀 숫자의 제곱은 25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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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의 문화 8가지를 설명한책. 1장. 세종대의 역사와 문화 2장. 세종대의 제도문물 정비 3장. 세종대의 언어정책과 훈민정음의 창제 4장. 세종대의 문풍진흥책 5장. 세종대 집현전 문인의 문학활동 6장. 세종대의 서사 문학 7장. 세종대 음악정책의 전개 양상과 특성 8장. 세종대의 과학기술로 나누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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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읽은 책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와 내용과 저자가 같아서 앞책의 뒷부분인 청년기 이후의 세종만 읽었다.(409~483쪽) 젊은 시절의 세종과는 달리 말년의 세종은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의 노인이 된다. 그리고 불교에 깊이 심취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는 해동요순이라고 실록이 기록할만큼 뛰어난 왕이었다. 아버지 태종과 달리 다른 아들들에게 정치를 시킨 것이 문종 이후 단종의 비극을 불러일으킨 요인이 된 것 같은 느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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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 까지의 세종 대왕을 왕조실록의 기록과 비교하면서 설명한 책. 아버지 태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을 때 그는 충분히 준비된 왕이 아니어서 아버지가 죽을 때 까지 4년간은 거의 허수아비 왕이었다. 그후 열심히 공부한 덕에 우리가 아는 위대한 왕이 되었다. 불교를 옹호했고 풍수도 무시하지 않았다. 초창기의 세종은 신하들의 힘에 눌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하들을 압도하게 된다. 유학과 특히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게 되면서 신하들을 능가할 수 있었다. 변계량이 초기에 많이 도왔다. 자치통감을 경연에서 강의하도록 요구했다. 처음에는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결국 실행했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창제에도 많은 기여를 했고 입 안의 혀처럼 세종을 잘 도왔다. 최만리가 훈민정음 창제를 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은 논리적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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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전문가 10명을 소개한 책. 등산과 여행에 전문가가 된 정란 바둑기사 정운창 천민 출신 화가 최북 조각가 정철조 무용가 운심 책 브로커 조신선 원예가 유박 천민 시인 이단전 음악가 김성기 과학 기술자 최천약을 소개하고 있다. 창해 정란은 경상도 사대부 출신이면서 당시 금강산을 4번이나 올랐고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다 올랐다. 그의 스승 신유한은 서얼 출신이면서도 문과에 장원급제한 실력자다. 그는 산에 오를 때나 여행할 때 청노새 한마리, 어린 종 한 명, 보따리 하나, 이불 한 채였다. 당시 식자들은 등산할 때 친구들과 함께 기생과 악공들을 동반하고 말을 타거나 힘들면 도중에 중들을 동원해서 남여(뚜껑없는 가마)를 타고 오르기도 했다. 바둑 기사 정운창은 고흥 출신이다. 우리 나라 근현대의 국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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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 준 책(강추!) 제목처럼 우리가 아는 훌륭한 선비는 이 땅에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부분 뛰어난 선비는 있지만 정치가로서의 선비는 다들 낙제점이다.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고 산림이라고 하는 선비들도 뒤에서 그 제자들을 조종했다. 최근 30~40년 사이에 선비의 좋은 면만 강조한 글들이나 주장들이 많이 나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선 조선의 선비들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권력을 독점한 계급이었다. 유교의 가르침을 현실에서는 계급의 특권을 지키는 데 사용했다. 충과 효도 수직적인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다.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는 데 훨씬 더 관심이 있있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고 선비가 백성을 수탈하는 사회였다. 선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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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과 왕비들의 묘를 설명한 책 집권한 왕은 27명이었지만 왕릉은 40개다. 북한에 정종과 그 부인의 능인 후릉과 또 하나의 능인 재릉 2기가 있다고 한다. 능을 조성하는데도 태종대의 박자청의 공이 상당히 크다. 건축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박자청은 왕릉 조성에도 큰 공을 세웠다. 박자청을 보면 신분의 귀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능력이 중요한 것이다. 왕릉들은 이장도 하고 합장도 한다. 하나의 정자각에 두개의 능이 있는 동원이강릉도 있고 두 능이 나란히 있는 쌍릉도 있고 삼릉도 있다. 상하로 있는 능도 있고 한 능 안에 2명이나 3명이 함께 묻힌 경우도 있다. 고종 이후 황제국이 되면서 능의 형태도 달라진다. 황제국에 걸맞는 능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서다. 조선의 왕과 사대부들은 풍수지리에 상당한 지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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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관련 책인줄 알고 읽었는데 철학책이다. 철학자는 원리를 찾는 사람이어서 저자는 인공지능에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초지능 기계는 나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초지능을 학습할 수있는 프로그램을 인간이 만들어도 버그가 발생했을 때 인공지능 스스로가 자가수선은 할 수 없고 인간이 수선 프로그램을 다시 짜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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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7명 왕들의 치적을 중심으로 엮은 책이다. 각 왕들의 업적을 간략히 소개해서 조선 왕조 전체를 개략적으로 알 수 있게했다. 어린 아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썼다. 태조, 태종, 세종, 성종, 숙종, 영조, 정조등이 왕다운 역할을 했고 나머지 왕들은 너무 일찍 죽거나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포악해서 쫓겨나기도 하고 외척이나 당파 싸움에 의해 힘도 써보지 못한 왕들이 대부분이었다. 정조 이후 외척의 발효와 당파 싸움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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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양반과 관련된 내용을 엮은 책 원래는 고려의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었지만 점점 범위가 넓어져서 조선 시대에는 평민의 상대적인 말로 사용된 듯하다. 중국의 사대부나 일본의 무사가 비슷한 경우다. 양반은 과거에 합격해서 관직을 얻어야 양반 행세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과거 준비는 아주 치열한 경쟁이었다. 생원시나 진사시도 있었지만 성균관에 입학해서 대과를 거쳐야 제대로 된 중앙 관직에 나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과거 준비는 현대의 수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스트레스가 많고 치열한 경쟁이었다. 대과는 3년에 한번 뽑는데다가 33명 밖에 뽑지 않으니 아주 어려운 시험이었다. 물론 이 문과 외에 무과나 잡과도 있었지만 제대로 행세를 할려면 문과를 통과해야 했다. 지금은 뇌물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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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의 공격적인 행동을 보면 따라하는 경향이 높다. tv나 영상매체에서 본 공격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기도 한다. 따라서 영상매체 사용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갈등이 있을 때는 자기들잋직접 해결방안을 제시하도록 하고 서로 수용할 수 있는 절충안을 찾게 해야 한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거나 떼를 쓰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관심을 끌려고 하면 반응하지 말고 긍정적인 반응을 할 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좋다. 다릉 아이들의 욕구를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아이가 또래들에게 인기가 있다. 손자들의 양육 때문에 읽게 되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 집 교사를 위한 책이지만 내게도 도움이 많이 되고 영유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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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노비들이 생산의 주체였다.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국민의 약 30%가 노비였다. 호구지책을 위해서 스스로 된 노비도 있지만 신분을 물려받은 노비가 대부분이다. 부모 가운데 어느 한 쪽이 노비면 자녀는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노비는 인권이 없는 물건처럼 매매되었다. 종부법이나 종모법을 따라도 몇 예외를 제외하면 그 자녀는 노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왕이나 귀족들이 적정한 선에서 노비를 소유하는 것이 통치에 편리했다. 간혹 재산이 많은 노비는 양인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양인 남자가 노비 여자와 결혼하는 경우는 많이 있었지만 양인 여자가 노비 남자와 결혼하는 일은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노는 남자, 비는 여자 노예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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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궁의 여자들에 관한 책. 궁궐에 있는 모든 여자는 왕의 여자였다. 궁녀는 공노비 가운데서 뽑은 궁궐의 노비였다. 궁녀는 보통 4~10살 사이의 소녀들을 뽑았다. 조선 시대 궁녀의 최대 숫자는 300명 미만이었다. 궁녀의 보조자인 무수리나 정식 궁녀가 되지 못한 생각시들도 있었다. 궁녀들은 내명부 소속이었지만 의녀들만 유일하게 내의원 소속이었다. 의녀들이 조선 후기에는 기생 노릇을 하기도 했다. 궁녀들의 우두머리인 상궁은 보통 근무한지 15년 정도가 지나야 하고 지밀 상궁이나 대전 상궁은 고급 관료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정 5픔까지는 궁녀이고 그 위는 후궁으로 보인다. 후궁은 선발하는 경우도 있고 왕과 동침해서 되는 경우도 있다. 왕과 동침하고도 후궁이 되지 않고 상궁으로 남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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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이어받을 왕자가 세자다. 원칙적으로 적장자가 세자가 되지만 조선의 27명의 왕들 가운데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세자는 탄생부터 세자 책봉 그리고 세자 교육과 성균관 입학. 관례, 혼례, 대리청정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세자 시절에 교육을 잘 받은 세종이나 정조처럼 훌륭한 욍도 있지만 소현세자나 사도세자처럼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고 비운에 간 세자들도 있다. 세자와 나머지 왕자들은 정적 관계가 될 수도 있어서 긴장관계가 종종 형성된다. 그래서 친형제나 이복 형제를 죽이는 일도 있고 심지어는 인조나 영조처럼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도 있다. 왕비가 낳은 첫아들은 원자로 불리고 적절한 때에 세자로 책봉되면서 동궁에 머물러 교육을 받는다. 우리도 공후백자남의 작위를 왕족이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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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최만리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사대부들을 우대하는 정치를 했다. 아버지 태종이 힘들게 제정해놓은 종부법을 종모법으로 환원함으로써 수많은 노비 신분들이 대를 이어 노비가 되게 만들었다. 사대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김종서를 시켜 백두산 너머의 만주땅을 강토로 지킨 것은 잘 한 일이다. 문종은 준비된 왕이었고 무예와 무기에도 능했고 정치도 잘 했지만 너무 일찍 그것도 갑자기 죽는 바람에 어린 단종이 즉위했으나 세조에 의해서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불게 된다. 문종의 죽음에는 수양대군과 도승지 강맹경 그리고 어의 전순의의 책임이 있다는 의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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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방원은 신하들에게는 폭군이었고 백성들에게는 성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칼로 권력을 차지했으며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도 칼을 사용했다. 사병혁파와 종부법의 시행은 귀족들의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나라의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1.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탈취했고 부인 민씨도 권력욕이 대단했던 것 같다. 종부법의 시행으로 노비들을 양민으로 만들어 준 것은 아버지 태조가 고려 귀족들의 땅을 빼앗아 나누어 준 것에 비할 수 있겠다. 지나친 사대로 명나라가 어수선할 때 요동땅을 되찾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황제에게서 압록강 너머의 국경선을 인정받은 것은 실리 외교라고 할 수 있다.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우리 국경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알려진 것은 큰 실수다. 정종은 과도기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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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편이어서 고려말의 상황도 상세히 나온다. 공민왕과 그 뒤를 이은 우왕, 창왕 그리고 공양왕까지. 고려가 망한 가장 큰 원인은 구가세족들이 토지를 산천을 경계로 할 만큼 독점한데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송나라가 망할 때도 그랬다고 한다. 태조는 원나라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 이자춘에게서 군사적 능력을 키웠다. 태조가 그렇게 갑자기 죽지 않고 정도전과 함께 원나라나 금나라 세력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쳤다면 결과를 알 수는 없지만 세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 않고 정도전을 죽이지 않았다면 고구려의 옛 강토를 되찾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최영 장군이나 정몽주의 죽음은 아깝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이성계가 권력은 칼에서 나온다는 것을 방원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자기도 ..